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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민지, 강명석, 나원영(대중음악비평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빌리프랩

선택의 기로

오민지: ENHYPEN의 정규 1집 ‘DIMENSION : DILEMMA’는 앨범명 ‘DILEMMA’의 의미처럼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자신을 결정의 순간에 직면한 오디세우스에 빗댄다. 콘셉트 포토의 제목인 ‘ODYSSE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으로, 전쟁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소용돌이 ‘카리브디스’와 괴물 ‘스킬라’ 중 후자를 택해 6명의 선원을 희생하고 좁은 해협을 무사히 빠져나온다. 콘셉트 포토는 이 진퇴양난의 선택지를 멤버들이 직면한 딜레마와 연결시킨다. ‘CHARYBDIS’에서 멤버들이 사는 곳은 작은 방 한 칸이 전부지만, 물감(니키)이나 복싱 글러브(성훈), 자동차 잡지(정원)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 편인 친구들과 풀숲이나 널어놓은 빨래 사이에서 장난을 치거나 서로에게 기대고 어깨동무를 하며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반면 ‘SCYLLA’는 화려한 세계에서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지만 완벽하게 내 것은 없는 공간이다. 물 위에 지폐, 바닥에 금화를 뿌려 그 위에 누워도(제이, 선우), 장신구로 치장하고 화려한 조명과 네온사인을 바라봐도 외롭고 낯설게만 느껴진다. 작고 평범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공간과 바랐던 모든 걸 가져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공간 사이. 이 딜레마는 친구들과의 자유로웠던 평범한 일상과 화려하지만 낯선 아티스트 사이의 기로에 놓인 현재 ENHYPEN의 상황일 수도, 혹은 ‘CHARYBDIS’에서 멤버들의 일기에 적힌 ‘나 자신과의 싸움(제이크)’이나 ‘고민이 만든 늪(희승)’처럼 데뷔한 후 이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갈등일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는 소중한 동료를 잃은 대신 절체절명의 순간을 벗어났다. 반면 ENHYPEN은 모두를  위해 물러서지 않는다. 타이틀 곡 ‘Tamed-Dashed’의 가사처럼, ‘발을 내딛기가 / 난 겁이나’지만, ‘일단 뛰어(NA NA NA) / 불꽃에 사로잡혀도 버려진대도 / 정답은 지금 알 수 없’으니까. ENHYPEN이 머린 룩을 입고 표현한 콘셉트 포토 ‘ODYSSEUS’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기다리고 있을 그 바다 앞에서 헤엄과 물장난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때 멤버들이 가지고 노는 럭비공은 타이틀 곡 ‘Tamed-Dashed’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일단 뛰어’가기로 한 ENHYPEN이 딜레마의 정점에서 보여주는 퍼포먼스가 ‘럭비’라는 점은 흥미롭다. 상대를 붙잡고 쓰러뜨리던 경기가 끝나고 ‘노 사이드(No Side)’가 선언되면 편이니 적이니의 구분이 사라지는 럭비처럼, 함께여서 행복했던 멤버들이 언젠가 이들이 마주한 이분법적 딜레마의 끝에서 ‘노 사이드(No Side)’를 선언할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데뷔 때부터 ‘주어짐과 쟁취함(Given-Taken)’ 사이 증명의 기로에 서야 했던 소년들은, 새로운 세계의 모순을 깨닫고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직은 좁은 해협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대답은 확신에 차 있다. ‘Intro : Whiteout’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이쪽에서 버티고 있는 몬스터와 저쪽에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 중에 하나를 뚫고 가야 해, 나는 일단 달려볼 생각인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다크 청량’이라는 게 있다면 

강명석: 데뷔부터 ENHYPEN의 ‘DIMENSION : DILEMMA’에 이르기까지 이 팀의 보컬 디렉팅에는 일관된 특징이 있다. ‘DIMENSION : DILEMMA’의 타이틀 곡 ‘Tamed-Dashed’에서 제이가 ‘정답은 지금 알 수 없어’를 부르는 부분처럼, 멤버들은 기교를 배제하고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있는 힘껏, 자기 목소리 그대로 지르듯 노래한다. ‘Intro : Whiteout’과 마지막 곡 ‘Interlude : Question’처럼 영어 내레이션이 들어간 앨범의 시작과 끝 곡을 제외하면 한국어와 영어를 막론하고 상대적으로 또박또박 발음한다. 이번 앨범 수록 곡 ‘Blockbuster (액션 영화처럼) feat. 연준 of TOMORROW X TOGETHER’에 참여한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연준이 이펙트가 걸린 상태에서 발음을 굴리듯 시니컬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반면, ENHYPEN은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 힘차게 지른다. 상이한 목소리는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의 차이와도 유사하다. 연준이 ‘답 없어 이 세계는 / 현실, 가상 다 unify’라고 하면, ENHYPEN은 ‘맘대로 세상을 흔들어’라며 세상에 대한 포부를 밝힌다. 연준은 ‘0X1=LOVESONG (I Know I Love You) feat. Seori’, ‘LO$ER=LO♡ER’ 등을 부른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세계 속에서 입에 먼지가 씹힐 것 같은 버석한 현실을 경험했다. 반면 ENHYPEN은 현실에서나 앨범 ‘BORDER’ 시리즈에서나 대중 앞에서 검증의 시기를 거쳐 이제 막 ‘딜레마’가 있는 ‘차원’으로 왔다. 거대한 알처럼 닫힌 세계나 다름없었던 오디션 프로그램 Mnet ‘I-LAND’의 경쟁을 통해 ENHYPEN이 된 그들은 ‘BORDER : DAY ONE’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BORDER : CARNIVAL’로 아이돌 세계에서 입지를 더욱 성장시켰다. 현실에서도 그들은 ‘Tamed-Dashed’의 가사인 ‘I can’t stop me like / Summer’를 외쳐도 좋을 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ENHYPEN의 목소리는 ‘Blockbuster (액션 영화처럼) feat. 연준 of TOMORROW X TOGETHER’ 다음 곡 ‘Attention, please!’의 후렴구에서 메탈 기타 사운드에 묻힌다. 두 곡과 ‘Tamed-Dashed’ 사이에는 ‘한여름 밤의 꿈’을 노래하는 ‘Upper Side Dreamin’, ‘너’로 인해 ‘내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몰랐어’, ‘승리 아님 패배뿐인 Game 같은 세상’을 노래하는 ‘모 아니면 도 (Go Big or Go Home)’가 있다. 검증의 시간을 거쳐 넓은 세계에 나왔지만 날씨 좋은 여름날의 바다처럼 좋은 일들만 있을리는 없고, 세상의 법칙은 노력이라는 과정보다 결과로서의 ‘대박’이 더 중요해 보인다. ‘Intro : Whiteout’는 도입부부터 사운드 볼륨의 크기가 급격하게 바뀌면서 불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Upper Side Dreamin’과 ‘몰랐어’를 제외하면 곡마다 들어가는 다양하게 변주된 드릴 비트는 앨범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Tamed-Dashed’처럼 멜로디 라인과 리듬 구성은 1980년대 미국 하이틴 영화에 어울릴 법한 경쾌한 로큰롤에 가까운 곡조차 무거운 전자음과 적절하게 울림을 사용한 목소리 등으로 조금은 어둠을 드리운다. 애초에 ‘Tamed-Dashed’에서 ‘일단 뛰어’라고 하는 것부터가 ‘선택의 딜레마’에서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다. 그리고 복잡한 소리들로 만들어낸 쨍하지만 미묘하게 불길한 이 세계 속에서, ENHYPEN의 목소리는 그들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알 속의 오디션처럼 노력만으로는 ‘모’가 나올 수 없는 세상일지라도, 있는 힘껏 소리 지른다. 그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운드 사이에서 거친 만큼 선명하게 멤버 개개인의 색깔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 준비는 덜 됐고 앞일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뛰고 소리 질러. 

선택의 경계에서 내적 딜레마의 차원으로 

나원영(대중음악비평가): ENHYPEN의 역대 타이틀 곡명들을 ‘DILEMMA’라는 묘한 부제와 함께 FIRST+VIEW에서 언급된 ‘햄릿’의 존재론적 양자택일, ‘있음이냐 없음이냐’의 모순율과 함께 둬보자. 데뷔 EP의 ‘Given-Taken’에서 상충했던 양쪽 단어가 지난 EP의 ‘Drunk-Dazed’에서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가, 다시 이번의 ‘Tamed-Dashed’에서 ‘길들여지냐 내쳐지냐’의 역설로 돌아온 꼴이다. 그러나 ‘DIMENSION : DILEMMA’에서 가장 확실하게 진퇴양난인 곡은 제목부터 그러한 ‘모 아니면 도 (Go Big or Go Home)’일 것이다. 둔탁하고 장엄했던 ‘Drunk-Dazed’를 따라 충분히 ‘록’적으로 들릴 백 비트와 베이스 음을 강조한 초반에 비해, 뜬금없이 LDN 노이즈(LDN Noise)와 에이드리언 맥키논(Adrian McKinnon)까지 참여한 정석적인 하우스가 랜덤 박스 아이템처럼 튀어나오니 말이다. 여기서 멤버들은 ‘승리 아님 패배 Game 같은 세상’ 같은 이분법적 ‘될놈될’로 ‘중간 같은 건 Feel like a loss’라고 얘기하나, 결국 ‘고민할 시간에 가챠를 뽑아보자’며 감행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도박이 ‘딜레마’까지는 아닐 테다.

하지만 다음 트랙인 ‘Blockbuster (액션 영화처럼) feat. 연준 of TOMORROW X TOGETHER’가 시작되자마자 작렬하는 전기기타와 함께 연준의 랩이 날아 들어올 때, ENHYPEN이 이번 ‘딜레마’에서 선택한 ‘아이템 획득 합성 강화’가 분명해진다. 프란츠(FRANTS)의 베이스 연주를 기반으로 ‘록’적 성질이 담긴 ‘Tamed-Dashed’를 한쪽에, 하우스로 구성된 ‘모 아니면 도 (Go Big or Go Home)’를 다른 쪽에 두며 억지로라도 이번 EP에서의 대립항을 두자면, 전기기타에 이어 현란하고 빽빽한 드럼 앤 베이스가 잠시 깔리며 코러스로 돌입할 즘 두 사운드가 통합되는 ‘Blockbuster (액션 영화처럼) feat. 연준 of TOMORROW X TOGETHER’는 ‘록 아니면 하우스’ 같은 거짓 딜레마를 설정한 후 ‘혼돈의 장’에서 해결사라도 불러오듯 중간을 가르며 정면돌파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천 개의 의심/불신’을 가져왔던 처음의 난제는 애초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ENHYPEN은 진작 그 ‘경계선’을 지나 이미 그들의 ‘차원’에 진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천연덕스럽게 ‘Attention, please!’라고 주목을 요청하며 막바지에 더욱 강한 록 사운드로 돌진하는 건 꽤 당연한 귀결 같다. 프란츠가 알맞게도 전기기타를 들고 팝적인 그런지 트랙에서 따온 듯한 톤의 연주를 덧붙이며 ‘록’적 성질의 함유량이 높아지고, 따라 부르기 참 좋은 멜로디를 함께 외치는 구간은 진중했던 타이틀 곡과 달리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호기로웠던 록 구간 이후의 브리지에서, 멤버들은 ‘갈림길에 서서 꼼짝 못해, 난 딜레마에 빠져 진짜 전부 다 잃을까 겁나’라며, 지금까지와 사뭇 다르게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한다.

 

ENHYPEN이 거쳐 온 ‘서사’가 경계선에 거주하며 위태로운 카니발을 통과하는 것이자 단단한 소속사가 제작한 서바이벌 방송의 최종 생존자로 ‘Mixed UP’될 때, ‘DIMENSION : DILEMMA’의 사운드는 전작에서 단절된 선택을 하기보다 도리어 ‘Drunk-Dazed’의 공식을 연장해 록적 지향을 더 키우기로 택한 듯 들린다. 하지만 별안간 원점으로 돌아간 듯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를 묻는 ‘Interlude : Question’은 ENHYPEN이 아직까지 ‘답해지지 않은 질문들이 끝없이 쓰인 종잇장들’을 마주하고 있다 전한다. 선택지의 문제를 지나 주어진 것에 대한 확신을 내리지 못한, 미완의 내적 ‘딜레마’를 수록 곡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