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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도헌 (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 BBC 유튜브

현지 시각 6월 24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단권(낙태권)을 헌법에 기초한 기본권으로 보장한 기념비적인 판결 ‘로 대 웨이드(Roe v. Wade)’를 49년 만에 파기했다. 팬데믹 이슈로 3년 만에 열린 영국의 세계적인 음악 축제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은 그날로 미국 연방대법원을 규탄하는 거대한 성토장이 되었다. 첫째 날 헤드라이너로 무대를 펼치던 빌리 아일리시가 공연 도중 말한 것처럼, 이날은 “미국 여성에게 너무도 암울한 날(dark day for women in the US)”이었다.

 

다음 날에는 ‘drivers license’, ‘good 4 u’로 디즈니 스타를 넘어 전 세계 Z세대의 상징으로 등극한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작심 발언을 이어갔다. 글래스톤베리 아더 스테이지(The Other Stage)에서 게스트 릴리 알렌(Lily Allen)을 소개하던 올리비아는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에 찬성한 대법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이번 판결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수많은 여성과 소녀들을 생각하니 너무도 두렵고 충격적입니다. 이번에 부를 노래는 자유에 대해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미국 다섯 대법관에게 바치는 곡입니다. 새뮤얼 알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닐 고서치, 에이미 코니 배럿, 브렛 캐버노. 우린 당신들이 싫어요.” 눈치 빠른 팬들은 다음 곡을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었다. 릴리 알렌의 2009년 싱글 ‘F**k You’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몸소 피를 흘리고 3일 후 부활한 일요일의 글래스톤베리 헤드라이너는 2022년 최고의 앨범으로 손꼽히는 ‘Mr. Morale & the Big Steppers’의 주인공 켄드릭 라마였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열정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던 켄드릭 라마는 마지막 곡 ‘Savior’를 열창하다 댄서들과 함께 무대에 우뚝 선 채로 질끈 눈을 감았다. 가시 왕관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하얀 셔츠를 흠뻑 적시는 가운데, 켄드릭은 누구도 들어본 적 없던 단 두 구절을 목이 쉬도록 외치다 마이크를 던지고 퇴장했다.

 

“여성의 권리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그들은 당신을 판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판단한다네(Godspeed for women’s rights, They judge you, they judge Christ.).”축제 내내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피비 브리저스(Phoebe Bridgers), 로드(Lorde) 등 수많은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F**k the Supreme Court”를 외쳤다. 밴드 아이들스(Idles)의 조 탤보트(Joe Talbot)는 “미국이 중세 시대로 돌아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은 바다 건너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전 세계에 얼마나 중대한 위협인지를 일깨우는 정치적 축제의 기능을 십분 수행했다.

‘로 대 웨이드’는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다. 텍사스주 낙태법으로 인해 낙태 수술을 거부당한 익명의 여성(Roe)이 위헌소송을 제기하여 텍사스 검사 헨리 웨이드(Henry Wade)를 상대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수정헌법 제14조 1절 적법 절차에 의거, 임산부는 낙태 여부를 결정할 사생활 권리가 있다.”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은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으며, 이후 49년 동안 갑론을박을 부른 주제였다.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긴 시간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주도면밀하게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고자 심혈을 기울여왔고, 진보 성향 대법관들은 여성의 권리를 수호하는 판결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의 미국 정치 지형을 꾸준히 관찰해온 이들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국 대통령이 지명하고 미국 상원의회의 동의를 받아 취임하는 미국 연방 대법관 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대법관은 종신 임기를 보장받기에 대법관의 보수 및 진보 성향이 특히 중요한데, 2022년 현재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6명에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임명한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보수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을 대법관을 임명하겠노라 천명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기 동안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세 명을 임명하며 약속을 지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지난 5월 2일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Politico)’가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 초안을 유출했을 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이었다. 하지만 실제 판결 결과가 가져온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도브스 대 잭슨 여성 보건 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판결을 통해 임신 15주 이후 임신 중단을 금지한 미시시피주법에 6대 3으로 합헌 판결을 했다.

 

결과 발표와 동시에 미국 주요 언론은 국가 재난 상태에 준하는 실시간 보도를 쏟아냈다. 낙태권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에 확실한 것은 한 가지였다. 미국 여성의 인권, 더 나아가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심각하게 후퇴했다는 사실이었다.

 

강경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판결 ‘별개 의견’을 통해 ‘그리스울드 대 코네티컷(Griswold v. Connecticut)’, ‘로렌스 대 텍사스(Lawrence v. Texas)’, ‘오버게펠 대 호지스(Obergefell v. Hodges)’ 판결 등 '명백한 오류'를 가진 판결 실수를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그리스울드 대 코네티컷’은 주정부가 부부의 피임 결정에 관여할 수 없다는 판결, ‘로렌스 대 텍사스’는 ‘비정상적 성관계 금지법’을 폐지한 판결, ‘오버게펠 대 호지스’는 동성 결혼 합법을 공표한 판결이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시작일 뿐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다.

 

대법원의 결정을 기다렸다는 듯 미국 50개 주 중 13개 주가 즉각 낙태를 금지하는 ‘방아쇠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임기 여성 중 3,600만 명이 낙태권 금지 주에 거주하게 되는 셈이다. 미국인들의 과반수 이상이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지만, 대중의 의견은 법원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선 이들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팝 스타가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에 대해 분노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며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는 전 미국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Michelle Obama)의 트위터 입장문을 리트윗하며 “수십 년간 여성들이 신체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왔으나 박탈당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밴드 그린데이의 보컬 빌리 조 암스트롱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런던 스타디움에서의 콘서트에서 걸쭉한 욕설과 함께 미국 시민권 포기와 영국 이주를 선언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여파를 대비하는 움직임도 선명하다. 릴리 알렌과 함께 ‘F**k You’를 합창한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경우 그의 공식 팬 계정 livieshq(@livieshq)가 아티스트의 행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미국 가족계획연맹을 위한 기금 모집을 시작했다. ‘Juice’, ‘Truth Hurts’와 함께 보디-포지티브(Body-Positive) 운동을 전개하며 여성의 자부심을 고취했던 아티스트 리조(Lizzo)는 낙태권 단체를 위해 100만 달러 상당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고매한 대법관들의 귀에는 팝 아티스트들과 절실한 소수자들의 외침이 들릴 리 없다. 그들의 용기 있는 외침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의 역할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미국 연방 대법관들은 종신 임기를 보장받는다. 음악인들은 대법관을 바꾸지도, ‘로 대 웨이드’ 판결 번복을 뒤집지도 못한다. 하지만 세계 여성의 인권을 박탈한 미국 연방 대법관의 이름은 역사 속 오명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반면 대중과 호흡하는 팝 아티스트들은 용기 있는 한마디를 통해 좌절한 소수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비춘 위인으로 명예를 드높이고 있다. 음악이 암울한 시대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