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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수연(‘씨네 21’ 기자), 최지은(작가), 김겨울(작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tvN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임수연(‘씨네 21’ 기자) : 의학에서 심리학 그리고 사진으로 옮겨 가는 율리에의 변덕만큼 그의 연애사도 요동친다. 직관적으로는 오슬로 배경의 ‘프란시스 하’라는 비유가 어울리겠지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최선을 갈망하나 최악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로맨스의 본질을 익숙한 뉴요커 영화보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수작이다. 정보 과잉과 애프터 미투 시대의 혼란 속에서 페미니스트의 이성애 연애는 태생적 모순을 자문할 수밖에 없다. 혼돈한 세계마저 유쾌하게 끌어안은 율리에는 온전히 육체적일 수도 정신적일 수도 없는 욕망을 한껏 감각하며 섹스가 즐거운 에이빈드와 예술적 감성을 나눌 수 있는 악셀 사이를 낭만적으로 배회한다. 더불어 12개의 챕터로 타임라인을 분절한 구성은 시간의 비가역성과 로맨스의 실존적 위기를 형식적으로 연결하며 탁월한 통찰을 영화적으로 완성한다. 도시의 어지러운 청년들을 담은 요아킴 트리에 영화감독의 ‘오슬로 3부작’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율리에를 연기한 레나테 레인스베가 2021년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tvN)

최지은(작가) : 음모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은 천재 의원 유세엽(김민재)과 혼인하자마자 병약한 남편이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서은우(김향기)는 절벽 앞에서 처음 만난다. 미래를 빼앗기고 살아갈 의지를 잃었던 두 사람은 의원 계지한(김상경)에게 의탁하며 환자들을 만나고 함께 사건을 해결하면서 서로를 구원한다. 배경은 조선 시대지만 학대 아동, 전쟁 성폭력 피해자, 이주민, 교제 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사연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와의 연결을 꿈꾸는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인간의 선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다.

‘우리는 모두 조금은 이상한 것을 믿는다’ - 한국 스켑틱 편집부

김겨울(작가) : 누구에게나 비과학적인 믿음이 조금씩은 있다. 가볍게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유령이나 영혼의 존재에서부터, 심각하게는 과학으로 이미 틀렸음이 증명된 지구가 평평하다는 믿음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스켑틱’은 이름에서부터 드러나듯 철저한 과학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회의주의자들을 위한 잡지로, 비과학적인 믿음에 대해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 스켑틱 편집부가 그동안 발간된 잡지 내용 중 비과학적인 믿음을 다룬 아티클을 뽑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혈액형별 성격론, 점성술, 지동설, 예지몽, 유체 이탈 등 다양한 소재에 대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첫 아티클은 놀랍게도(어쩌면 놀랍지 않게도) MBTI에 대한 글이다. 사실 MBTI는 그 기원부터가 비과학적이며, 반대되지 않는 기질을 마치 반대되는 것처럼 설정하는 등의 여러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MBTI에 열광하는 이유는 MBTI라는 도구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초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과학적인 믿음을 인간에게서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과학적인 지식을 알아두는 것 역시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Illusion’ - 브론즈 with 김사랑, Jason Lee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 한여름 태양에 종일 달궈진 미지근한 공기가 주위를 감싼다. 아이스 커피 한 잔이나 차갑게 식힌 맥주 한 잔이 절실해지는 순간, 멀리서 느긋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어딘가 추억 어린 신시사이저 연주, 별빛처럼 흐드러지는 멜로디, 조금 여유가 있다면 그 위로 색소폰이나 풍성한 코러스가 화사하게 덧입혀진다. 묘사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 음악은 분명 ‘시티팝’ 언저리의 무언가일 것이다. 

 

뉴 잭 스윙 뮤지션 기린이 수장으로 있는 레이블 에잇볼타운(8BallTown) 소속 브론즈(Bronze)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티팝으로 규정되는 스타일을 가장 완성도 높게 선보이는 대표적인 프로듀서다. 그의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데뷔작 ‘East Shore’(2019)부터 3집 ‘Skyline’(2022)까지 시티팝 그 자체로 불리는 작가 나가이 히로시(永井博)의 일러스트로 모조리 꾸민 앨범 커버만 봐도 알 수 있다. ‘Illusion’은 그렇게 꼼꼼한 기획을 자랑하는 그의 음악 가운데 ‘한국 가요적’ 요소가 흥미롭게 녹아 있는 곡이다. 1집부터 호흡을 맞춰온 제이슨 리(Jason Lee)의 여유로운 색소폰 연주와 그루브 넘치는 베이스 리프에 맞춰 세기말 청춘의 아이콘 김사랑의 목소리가 잿빛 도로 위를 달린다. 허무한 도시의 네온사인이 우리를 스쳐 지난다. 익숙하고 애틋한, 서울의 어느 여름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