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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선재, 임수연(‘씨네21’ 기자), 김겨울(작가),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넷플릭스

‘더 글로리’ (넷플릭스 오리지널)

최선재: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 죽어보자.” 고등학교 시절 학교 폭력의 피해자 문동은(송혜교)이 가해자이며 주동자인 박연진(임지연)에게 말한다.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고교 자퇴 후 인생을 걸고 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위한 준비를 하고, 그사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주여정(이도현), 지속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강현남(염혜란)의 도움을 받는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폭력의 이유로 “난 이래도 아무 일이 없고, 넌 그래도 아무 일이 없으니까”, “심심해서” 같은 말을 했었고, 연진처럼 돈과 권력을 가진 가해자는 끔찍한 학교 폭력을 저질러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가진 것 없는 피해자로서 학교로부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던 동은은 어른이 돼서 법과 제도 또는 언론에 호소하는 대신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는 바둑처럼 자신이 직접 가해자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한다. 글자로만 옮겨도 시청자들이 ‘사이다’처럼 시원한 복수를 원할 법한 이야기지만, ‘더 글로리’는 자극적인 사건들과 등장인물 간의 긴장감 넘치는 대사로 순간순간 몰입감을 주되 복수를 향한 여정은 바둑처럼 차근차근 진행한다. 동은의 이 대사 같은 드라마란 얘기다. “오늘부터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자극적이고 끔찍할 거야.”

‘화이트 노이즈’

임수연(‘씨네21’ 기자): ‘프란시스 하’, ‘결혼 이야기’의 노아 바움백 감독이 넷플릭스를 통해 신작을 공개했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돈 드릴로 작가의 출세작이었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독성 폐기물을 운반하던 트럭이 기차와 충돌하면서 검은 연기가 마을에 퍼지기 시작하고, 잭 글래드니(아담 드라이버)의 가족은 각자 주관에 따라 유독 가스의 치명도를 가늠하며 피난을 준비한다. 넓은 주파수 범위를 가지고 있는 백색 소음은 평소에는 거의 인지되지 않다가, 한번 의식하고 나면 평온한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화이트 노이즈’는 이에 슈퍼마켓으로 상징되는 소비주의와 정보 과부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비유한다. 1985년 원작 소설의 문제의식이 현 시대에도 매끄럽게 이식되는 가운데, 폭발과 파괴의 이미지로 쾌감을 전달했던 1980~90년대 액션 영화의 클리셰를 직접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감독만의 포스트 모던 풍자 코미디를 영화적으로 완성해냈다. 노아 바움백의 동반자 그레타 거윅이 오랜만에 그의 영화에 주연 배우로 등장한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 제니 오델

김겨울(작가): 신년을 맞아 마음과 몸을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다. 몸이야 다이어트며 운동을 한다고 해도, 마음 정돈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마다 지향하는 마음 상태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떤 방향이든 일단 출발점은 나의 관심과 주의를 분산하지 않고 잘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과 주의야말로 현대인이 가장 약탈당하고 있는 심적 자원이다.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관심 경제의 한가운데에 선 우리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현실 세계로 다시 붙잡아올 것을 요청하는 책이다. 진실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현재에 집중하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알림과 새롭게 떠오르는 이슈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 새들, 공간들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각자의 마음을 잘 정돈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자, 파괴된 공동체의 감각을 되살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밤에 숨어요’ – 나이트오프 (Night Off)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어둠은 공포다. 손바닥만 한 빛도 허용되지 않은 완전한 어둠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을 느낀다.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모든 게 안전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눈은 추위다. 대기가 얼어붙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결정체다. 한 번이라도 눈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뼛속까지 시린 그 감각을 기억한다. 눈이라는 단어만으로 으슬으슬한 어깨가 자동으로 움츠러든다. 노래 ‘이 밤에 숨어요’는 그런 어둠을, 눈을 우리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서 이상한 안온함을, 밤사이 소복이 쌓인 눈에서 포근함을 꺼내 우리의 눈과 귀 앞에 펼쳐 놓는다. 보컬 이이언과 기타 이능룡이 만나 2018년 결성한 나이트오프는,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늘 그런 소리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왔다. 첫 싱글 ‘Take A Night Off’도, EP ‘마지막 밤’과 ‘예쁘게 시들어 가고 싶어 너와’, ‘반짝이는 순간들은 너무 예쁘니까’까지 한결같았다. 우리가 그린 원 밖의 세상이 어떤 허무와 절망으로 채워져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여기, 이 음악과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내내 일렁인다.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봄이, 끝내 우리를 헤어지게 할 아침이 희망으로 물든다.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목소리로 사랑의 역설을 노래한다. 한없이 잔인하고, 한없이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