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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리은, 임수연(‘씨네21’ 기자), 김겨울(작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안테나 플러스

‘핑계고’

김리은: 유튜브 채널 ‘뜬뜬’의 콘텐츠 ‘핑계고’는 유재석이 정해진 방송 간격도 없이 ‘랜덤’하게 게스트를 초대해 진행하는 웹 예능 프로그램이다. ‘설 연휴는 핑계고’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유재석의 전화에 바로 섭외된 이동욱은 그를 11년 연속 ‘한국갤럽 선정 올해를 빛낸 예능 방송인 1위’라 소개한다. ‘핑계고’는 자칫 거창해 보일 수 있는 유재석의 위상을 가장 소박한 방식으로 증명한다. 유재석과 평소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게스트들이 산책, 피크닉, 몸보신, 설 연휴 등 다양한 핑계로 모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핑계고’에는 특별한 진행자도, 정해진 룰도, 회차마다 달성해야 하는 목적도 없다. 방송이라는 목적을 의식하지 않다 못해 간과해버린 듯한 그들의 대화는 서울 몽마르뜨공원에서 돗자리 하나 깔고 유재석, 지석진과 토크를 하던 이광수가 이동 중에 땅에 떨어진 (포장을 안 뜯었으나 밟힌 흔적은 있는) 초코바를 제작진이 미리 준비한 것인 줄 알고 ‘당 충전’을 위해 먹는 것처럼 뜻밖의 웃음을 낳는다. 또한 평소 방송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재석의 사적인 일상과 출연료를 ‘정’이라 부르는 방송인들의 현실, 게스트들 간의 실제 관계처럼 관찰 예능에서도 보기 힘든 리얼한 모습들이 드러난다. 마치 친구들의 수다를 엿듣는 것처럼 친밀하고 솔직한 토크쇼의 틀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유재석이 방송에서 해온 상황 극, 리얼 버라이어티 쇼, 콩트 등을 모두 ‘리얼’로 해내는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유튜브 콘텐츠로서는 파격적인 한 편당 30~60분의 분량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쇼츠와 틱톡처럼 짧은 영상이 보편화돼 방송에 위기가 온 시대에도 재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위기가 됐든 아니든 우리는 매주 우리가 맡은 일에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라는 유재석의 말처럼, 유튜브의 자율성을 활용해 방송인으로서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발휘하는 것. 2023년의 유재석이다.

‘상견니’

임수연(‘씨네21’ 기자): 무수한 시간선이 존재하는 ‘상견니’ 유니버스에서, 드라마와 다른 타임라인을 포착해 독자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영화가 개봉했다. 만약 왕취안성이 비행기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혹은 천윈루가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미 도래한 비극을 없던 일로 돌이키고 싶다는 희망을 안고 타임슬립을 시도했던 동명의 드라마 시리즈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 역시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우바이의 ‘Last Dance’를 들으며 과거로 돌아간다. 드라마보다 타임라인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플롯을 2시간 내에 풀어가다 보니 스토리를 따라가기 수월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 ‘상견니’가 전형적인 첫사랑 로맨스를 넘어 수많은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사람)’를 양산했던 이유,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의 존재를 소중히 긍정하는 데 이르는 사려 깊은 서사의 본질은 영화에서도 충만히 계승되어 작품의 정서를 확장한다. 영화만의 시간선을 다루기 때문에 원작 소설과 드라마를 보지 않고 시간 여행에 얽힌 기본 설정만 숙지해도 작품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 옥타비아 버틀러

김겨울(작가): 이대로 세상은 점점 나빠지게 될까? 경기는 나빠지고 긴장은 심해지고 기후는 매년 변하는 요즈음 세상에 대해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이대로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면, 그리고 그때 내가 살아 있다면. 집도 가족도 잃어버리고 폭력이 판치는 거리로 나가야 한다면. 그러한 불안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1993년에 출간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당시 ‘뉴욕타임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현재의 책’으로 다시금 소환되고 있다. 근미래의 미국, 정부는 무너지고 거리에는 절박한 빈민과 불 지르기를 즐기는 마약중독자들이 넘쳐나며 굶은 사람은 시체를 털어 옷과 물건을 훔쳐가고 동물들은 사람 고기를 뜯어 먹는다. 커다란 장벽 안에 위치한 마을에 사는 주인공 로런은 아직은 가족들과 그런대로 잘살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모른다. 희망 없는 세계에서 ‘초공감증후군’을 앓고 있는 로런은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로런은 어디로 가게 될까? 누가 살고 누가 죽게 될까? 소설의 재미와 우리의 현실 때문에 한 번 펼치면 손에서 놓기 힘든 책이다. 

‘Flowers’ - Miley Cyrus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2023년 1월 팝 씬 최고의 화제는 마일리 사이러스의 ‘Flowers’ 핫 샷 데뷔였다. 여름의 환상을 쌉쌀하게 불러일으키는 디스코 곡이다. 그는 디즈니 채널 스타 출신이면서도 짜여졌다기보다는 어딘가 날것의 이미지가 있다. ‘올 누드’라는 파격을 감행한 2014년 히트 곡 ‘Wrecking Ball’의 영향도 있겠지만, 목소리 자체에서 컨트리 기타의 트왱(twang)이 들리는 것만 같은 그 특유의 허스키한 보컬 때문 같다. ‘Flowers’에서 그는 예의 목소리로 결혼과 이별을 겪은 자기 삶을 툭 털어내듯 풀어놓는다. 브루노 마스의 ‘When I Was Your Man’과 가사가 거의 대구를 이루는 점이 특이하다. 전남편 리암 헴스워스와의 추억이 담긴 곡이었다고 한다. 털털한 남부 악센트로 ‘Party in the U.S.A’를 부르던 아역 스타는 격정의 ‘Wrecking Ball’을 거쳐 이제는 삶의 달고 쓴맛을 노래하는 어른이 되었다. 2000년대 말 한 세대의 여성 청소년들을 대표했던 그는 이제 이들을 이끌고 인생을 좀 더 알아가는 30대로 유유히 진입한다. 그의 뒤를 춤추며 따라가고 싶어지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