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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리은
사진 출처. 빌리프랩
ENHYPEN의 곡들에는 그들의 여정이 담겨 있다. ‘Flicker’는 ENHYPEN이 선발된 오디션 프로그램 ‘I-LAND’의 경연곡이었고, 그들의 데뷔 앨범 ‘BORDER : DAY ONE’과 ‘BORDER : CARNIVAL’의 타이틀 곡 ‘Given-Taken’과 ‘Drunk-Dazed’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연상시키는 앨범 속 세계와 ‘I-LAND’ 이후 한 팀으로 등장해 대중음악 산업 안에서 자신들을 증명해야 했던 ENHYPEN의 현실을 연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ENHYPEN의 퍼포먼스는 그들의 세계를 무대 위에서 압축해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그 순간 그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남기는 기록이 된다. 그 점에서 ENHYPEN의 퍼포먼스를 살펴보는 것은 곧 ENHYPEN이 걸어온 여정을 다시 훑어보는 과정과도 같다. ENHYPEN이 새 앨범 ‘DIMENSION : DILEMMA’를 발매한 이 시점에, 그들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다시금 살펴보는 이유다. 숨이 차도록 달려 경계를 넘어, 스스로를 증명하며 ‘Tamed-Dashed’까지 온 ENHYPEN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Flicker’, 모든 것을 연결하는 힘
‘Flicker’는 안무 구성과 장치 그리고 카메라 워킹을 활용해 멤버 개개인에게 각자 집중하는 것을 콘셉트로 삼는다. 멤버 전원이 나와서 군무를 추는 후렴구를 제외하면, 핵심 파트를 소화하는 멤버 외에 다른 멤버들의 모습은 대부분 감춰진다. 희승이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라고 노래할 때 제이크와 선우는 댄서들과 함께 얼굴을 숙인 채 춤을 추면서 희승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제이크가 ‘수없이 많은 밤 건너서’라고 노래할 때에는 희승과 선우가 뒤로 스쳐 지나가는 커튼들 속으로 몸을 숨긴다. 무대 정면을 기준으로 카메라가 한 바퀴를 돌면서 멤버들을 차례로 비추는 2절의 구성은 특히 상징적이다. 정원이 독무를 마친 후 카메라가 돌면서 등장하는 성훈과 니키의 듀오 댄스, 그 뒤를 잇는 희승의 독무, 다시 카메라가 돌면서 정면을 바라보며 시선을 보내는 선우의 제스처까지, 멤버 개개인이 장면별로 조명을 받은 뒤에야 카메라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멤버들이 차례차례 모여 군무를 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Flicker’가 원래 ENHYPEN을 선발한 오디션 프로그램 ‘I-LAND’의 미션 곡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전에 적합한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Flicker’의 퍼포먼스는 멤버들을 하나씩 부각시킨 뒤 다시 하나로 모은다. 커튼 앞에서 다른 멤버들 없이 춤을 추는 정원과 제이의 파트가 끝난 후, 후렴구에서 성훈이 ‘어긋나 있던 세계를 연결하는 거야’라고 노래할 때 멤버들은 좌우로 길게 서서 서로에게 팔을 건다. ‘아득히 머나먼 곳’, ‘수없이 많은 밤’이라는 가사처럼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상태를 연기하듯 흩어져 있던 멤버들이 퍼포먼스에서도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퍼포먼스의 흐름은 멤버 개개인이 받는 조명 뒤로 움직이는 커튼 뒤로 숨거나,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순서에 따라 미리 대기하는 것처럼 치밀하게 짜여진 멤버들의 협력을 통해 가능하다. 그렇게 완성된 무대는 ‘I-LAND’에서뿐만 아니라 ENHYPEN이 데뷔한 후에도 직접 만날 수 없었던 그들의 팬덤 엔진들에게 그들 개개인과 팀 양쪽의 매력을 전할 수 있는 방식이 된다. ‘I-LAND’에서 ENHYPEN은 ‘Flicker’라는 제목의 의미 그대로 순간의 반짝임에 불과한 무대 위에서 자신을 부각시켜야 했다. 당시 코로나19는 그들과 팬이 만날 수 있는 경로마저 막았다. 그러나 ‘Flicker’의 무대는 멤버들이 서로를 빛내주고 연결하는 과정을 통해 멤버들이 무대에서 서로를, 그리고 무대를 통해 엔진들과 자신들을 연결하는 방식 그 자체를 재현한다. ‘서로 닿지 않아도 너와 난 마치 하나인 것만 같아’라는 가사처럼.
‘Given-Taken’, 퍼포먼스로 그린 시놉시스
‘Given-Taken’의 안무에는 노래의 이야기가 담긴다. 제이가 ‘수많은 stars 수많은 달’이라 노래할 때 멤버들의 팔은 뒤에서 별과 달을 그린다. 성훈이 ‘가는 선 너머의 날 부르는 너’라고 노래할 때에는 그의 뒤에서 나머지 멤버들이 어깨동무를 하며 움직이는 지평선을 만들기도 한다. ‘Flicker’에서 커튼 뒤에 또는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던 멤버들은 이제 모습을 드러낸 채 서로의 미장센이 되어준다. 가사의 내용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배경 묘사는 직관적인 메시지의 전달로 이어진다. 희승이 ‘난 이제 세상을 뒤집어’라고 노래하면 멤버들은 일제히 거꾸로 돌고, ‘하늘에 내 발을 내디뎌’라고 노래하면 멤버들은 한 발씩 발을 내딛는다. 가사 속 서사에 따라 멤버들이 그리는 배경도, 그들이 겪는 일들도 달라진다. 희승이 ‘널 향한 내 손끝은 붉은빛에 물들어만 가’라고 노래하며 온몸에 힘을 다해 춤을 춘 후 멤버들과 함께 하늘로 화살을 쏘아올리는 장면이 퍼포먼스의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난 뒤, ‘하늘에 내 발을 내디뎌'라는 가사에서의 군무는 발을 차례로 내딛는 것에서 공중을 향해 높게 발차기를 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런 기승전결을 통해 ENHYPEN이 가사 속에서 겪는 사건과 그들의 변화가 안무에 반영된다. 후렴구에서 ‘난 너에게 걸어가지’라는 가사가 등장하기 전 멤버들은 아주 천천히 음악에 맞춰서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슬렁거리듯 움직인다. ‘Given-Taken’의 뮤직비디오에서 송곳니를 가진 미지의 존재로 변화하던 ENHYPEN은 퍼포먼스를 통해서도 판타지적인 혹은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자신들을 표현한다.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이 손가락 사이로 눈 뜨는 동작으로 시작해 같은 동작으로 마무리되기까지, ENHYPEN의 세계는 그렇게 성장하고 변화한다. 가사 속 스토리텔링을 마치 영화처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그 안의 기승전결을 통해 보는 이를 몰입시키는 퍼포먼스. 현실과 판타지를 연결하는 ENHYPEN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다.
‘Drunk-Dazed’, 무대를 완성하는 청춘의 에너지
‘Drunk-Dazed’의 도입부에서 ENHYPEN 멤버들은 마치 죽어가는 존재들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은 후렴구에서 타이밍을 맞춰 정확하게 동시에 뛰어오르며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주고, 제이가 ‘원함 원하는 대로’라고 노래할 때에는 팔과 다리를 아래로 뻗으며 달리다가 동시에 점프한다. 팔과 다리를 직선으로 사용하거나 손목을 꺾는, 뱀파이어나 좀비처럼 죽음과 관련된 존재들을 연상시키는 특유의 동작들은 EDM풍의 빠르고 격렬한 비트 속에서 그들의 에너지를 전력으로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리고 이 빠르고 격렬한 동작들 속에서, ENHYPEN 멤버들은 그들의 내면을 담는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무서워 난 / 출렁이는 잔속 이 취한 세계 / 그 끝엔 목이 타는 내 맘’에서 제이크와 희승이 차례로 머리를 감싸쥐며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불완전한 에너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렴구의 ‘Daze Daze Daze’에 맞추어 멤버들이 눈앞에서 손을 천천히 흔들거나, 바닥에 누워서 마치 시계처럼 도는 동작은 도취된 상태인 동시에 혼란의 메타포로도 읽힐 수 있다. 그래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듯한 ‘Drunk-Dazed’의 에너지는 축제의 흥겨움보다는 차라리 절박함에 가깝다. 비틀거리는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했음에도 팔과 다리의 각도를 맞추며 춤추고, 바닥에서 도는 동작으로 표현되는 어지러움 속에서도 기어코 일어나 춤을 추고야 마는. 모두가 지켜보는 축제를 만드는 것은, 결국 모든 혼란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리는 청춘의 어떤 에너지임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나를 가둔 Carnival’, ‘즐겨봐, 이 Carnival’. 이 모순된 가사처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축제 속에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ENHYPEN 멤버들의 모습은 두 번째 앨범을 막 발표한 그들의 현실이기도 했다.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서 본격적으로 춤추게 되었지만, 아직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전력으로 달려야 하는 신인의 위치. 니키가 ‘나에게 주어진 그 빛 성화의 불길’을 노래할 때 멤버들이 그가 올라선 왕좌를 만든 후 등장하는 가사가 ‘주인이 될 때까지 Imma ride’인 것은 그런 현실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느껴져, 내 머린 Daze Daze Daze’라며 전력으로 춤출 수밖에.
‘FEVER’, 무력한 열정의 판타지
‘FEVER’는 요컨대 무력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다. 안무의 첫 부분은 눈이 가려진 채 누운 제이크 주위를 둘러싸던 멤버들이 마치 해체되듯 흩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왕좌에 앉은’ 청자 앞에서 멤버들은 ‘내 안에 타는 불길’을 느끼며 팔을 강하게 휘젓고, 이들은 ‘너 때문에 온몸이 타올라 너 때문에 심장이 목말라’라고 노래하면서도 ‘널 안고 싶어’라며 두 팔을 감싸고 혼자만의 포옹을 한다. ‘난 아플수록 널 원해’라고 노래할 때 목에 손을 대는 제이의 동작이나 후렴구의 ‘Like a fever, fever, fever, fever’에서 멤버들이 박자에 맞춰 몸을 쓸어올리는 모습은 몸에 열이 점차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 ‘FEVER’가 나를 알아봐줄 존재를 찾고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을 인간보다 체온이 낮은 뱀파이어에 비유한 곡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의 체온을 견디지 못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을 시각화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력함을 보여주는 동작들은 이 미지의 존재가 주는 위협감을 제거한다. 1절이 끝난 뒤 멤버들이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다함께 숨을 몰아쉬는 짧은 구간이나, 간주에 맞춰서 뒤로 힘없이 쓰러지는 희승의 동작은 뱀파이어나 미지의 존재가 품을 법한 위험성을 없앤다. 그사이에는 니키와 성훈이 ‘너에게 손대선 안 돼, 절대 하지만 이끌리지’라며 서로에게 손을 대려는 춤을 선보이거나, 니키와 희승이 ‘나의 태양이여 그만’, ‘이런 날 어떻게 좀 해줘’라는 수동적인 가사에 상대에 대한 간절함을 표현하듯 빠른 박자의 독무를 추는 것처럼 에너지를 담은 동작들이 섞인다. 그 결과 ‘FEVER’의 퍼포먼스는 누군가에 대한 욕망을 발산하되 그에 대한 선택권을 상대에게 유예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상대방을 원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병을 비유하는 동작들과 합쳐지면서 상쇄된다. 그래서 이 판타지는 무력한 동시에 열정적이며, ‘왕좌’에 올라선 상대방, 즉 보는 이의 시선을 통해 완성될 여지를 남긴다. ‘Given-Taken’이나 ‘Drunk-Dazed’에서 ENHYPEN은 판타지를 빌려 스스로의 존재론적 고뇌를 주로 표현해왔다. 반면 ‘FEVER’에서는 판타지적 요소를 빌리면서도, 그들 자신보다 보는 이를 향한 메시지를 전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I-LAND’부터 ‘Drunk-Dazed’까지 쉼 없이 달려오던 ENHYPEN이 판타지의 틀 속에서 그들의 욕망이 아닌 상대에 대한 감정을 새롭게 드러낸 순간이다.
‘Tamed-Dashed’, ENHYPEN이 달리는 법
‘Tamed-Dashed’의 퍼포먼스는 운동 시합이 펼쳐진 경기장을 무대 위로 소환한다. 안무의 도입에서 ENHYPEN 멤버들은 마치 경기를 시작하듯 스크럼을 짜고, 1절과 2절에 반복되는 ‘Like hot summer / 일단 뛰어’에서는 양편으로 갈라지듯 대칭으로 서서 서로를 향해 달린다. 2절에서 제이크가 ‘탁한 시야 꿈에 중독된 나'라고 노래할 때 멤버들은 미식축구 경기처럼 서로에게 몸을 부딪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브리지 파트에서는 서로 럭비공을 주고받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1980년대 미국 청춘 영화를 연상시키는 경쾌한 록 사운드와 함께, 끊임없이 달리고 부딪치며 경기를 펼치는 멤버들의 움직임은 거칠 것 없는 청량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정작 후렴구에서 그들은 천천히 부채질을 하고, 슬로모션 화면을 보여주듯 천천히 달리면서 ‘일단 뛰어’, ‘그냥 뛰어'라고 말한다. 가장 힘을 다해 달려야 할 것 같은 때에 ENHYPEN은 박자에 맞춰 네 개의 작은 동작으로 어깨와 다리를 움직이면서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Drunk-Dazed’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높이 뛰어올랐던 그들은 이제 목표를 위해 전력으로 뛰지 않는다. 그때의 절박함을 대체하는 것은 오히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달리겠다는 패기다.

성훈이 ‘선택의 딜레마’를 노래할 때 그를 둘러싸고 멤버들이 두 줄로 서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멤버들이 ‘나의 나침반’을 손으로 그리면서 ‘Please don’t leave me now’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불안은 항상 잠재되어 있다. 새롭게 맞이한 욕망에 길들여질지(Tamed), 욕망에 의해 내동댕이쳐질 것인지(Dashed), 그 성패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희승이 ‘정답이 아니라 해도’라고 노래할 때 멤버들은 일제히 그를 둘러싸고 경기를 시작하기 전의 준비 자세를 취한다. ENHYPEN은 ‘I-LAND’를 통해 세상에 나왔고, ‘BORDER’ 시리즈를 통해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다. 두 장의 앨범에서 그들의 역량을 보여준 뒤, 그들은 새로운 차원(DIMENSION)으로 왔고, 그들 앞에는 무한하게 넓어 보이는 바다가 있다. 그러니까 ‘일단 뛰어’. ‘정답이 아니라 해도’ 달릴 준비가 되어 있는 ENHYPEN의 달리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