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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사진 출처. The White House 유튜브

#에세이

 

 

‘위버스 매거진’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처음이다. 이 주제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껏 쓴 모든 리뷰와 칼럼들은 내 주관이었지만, 이 글은 특히 내 개인적인 생각과 소회임을 밝힌다.

 

나는 한국 태생의 한국인이다.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 한국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실은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최근에 세어보니 이젠 한국에서보다 외국에서 쇤 생일이 더 많았다. ‘한인(해외에 거주하는 한국계 이민자)’으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는 의미다.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소수 인종에 속한다. 나를 둘러싼 사회는 “우리와 다르게 생긴 너는 대체 누구냐? 네 뿌리는 어디에서 왔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미국에서는 ‘한인’, 또는 ‘코리안 아메리칸’이 되는 나는, 말하자면 경계인(Marginal person)이다.

 

경계인이란 두 개의 집단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의 사람을 일컫는 사회학 용어다. 기존의 집단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을 때, 옛날 그곳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을 버릴 수 없으면서도, 새로운 곳에 또 완전히 융화되지는 못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서도, 거의 모든 이민자는 경계인이다. 그럼 이민 2세대부터는 안 그러냐? 그렇지 않다. 이들도 부모가 가져온 고국의 문화와 지금 살아가는 나라의 문화 간 괴리를 온몸으로 겪는다. 더불어 그 나라의 주류 인종이 아닌 이상, 그곳에서 나고 자랐대도 언젠가는 차별을 겪고 만다. 완전히 융화되지 못하는 인종적 소수자. 우리는 경계인이다.

 

경계인으로서 나는, 때로, 차별이 나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한다. 

 

써놓고 보니 대단히 수동적인 문장이다. 자칫하면 차별 가해자를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차별로 각성한 한국인이다. 내가 처음부터 단독자마냥 주변의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오롯이 나로서 존재했다면 좋았겠지만, 나 역시 인간이고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그렇지 않았다. 정체성이 차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의미이다. 가끔은 허탈하다. 자연의 법칙도 아니고 어차피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왜들 그렇게 유연하지 못할까 생각도 든다. 누군가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계층의 사다리를 오르기도 하고, 본인이 주류 사회에 어울리는 인간상이라는 것을 어필하며 눈물겨운 노력을 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럴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차별이 나의 민족 정체성을 자꾸만 환기시킬 때면, 나는 처음으로 돌아와 그들이 배제하고자 하는 한국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해보게 된다.

 
 

백악관에 간 방탄소년단

미국은 지난 5월을 ‘AANHPI(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군도인을 총칭하는 약어)의 달’로 기념했다. 5월 내내 백악관은 많은 AANHPI 명사들을 초청해 아시아인이 겪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5월의 마지막 날에는 방탄소년단이 방문했다. 대담 전 짧은 기자회견에는 평소와 다르게 구름 같은 취재 인원이 몰렸다. 방탄소년단은 일곱 명이 돌아가며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평등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 한 사람 한 사람이 의미 있는 존재로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한 또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메시지는 간명했다. 한국인 기자 한 명이 퇴장하는 그들의 뒤에 벅찬 목소리로 “BTS 파이팅!”을 외쳤다. 그때의 감정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내가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격을 저 사람도 느꼈구나 싶어 동질감이 들었다.

 

온라인 여론 반응은 다양했다. 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그들이 백악관에 섰고, 모국어로 연설을 했고, 미국 대통령과 독대한 모습에 많은 아시안 아메리칸이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동시에 미국 거주자가 아닌 그들이 미국에 사는 아시안 아메리칸의 대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자격이 없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들의 방문은 이슈 자체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곧 이들의 소임이었다. 백악관 라이브 스트리밍 접속자 수가 평소의 세 자리 숫자에서 일곱 자리로 치솟은 것을 보면, 슈가가 이전 UN 연설에 대해 말했듯 “스피커가 돼서 많이 알리기 위해서 간 거다, 많이들 보셨으면 저희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 생각한다.”라던 생각 그대로다. 더불어, 방탄소년단은 2010년대 말부터 미국 주류 미디어에서 활동하면서 인종적 소수자로서 직접 차별을 겪었다. 이들에게 미국에서의 차별은 간접경험이 아니다. 2021년 애틀랜타 아시아인 혐오 총격 사건 이후에는 #StopAAPIHate 해시태그에 성명문을 내기도 했다. 이는 2021년 한 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리트윗된 트윗이었다.

 

ESPN의 작가이자 방탄소년단 팬 아미이기도 한 준 리(Joon Lee)는 “어린 시절엔 백악관 포디움에서 한국어가 들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기뻐하면서도, 실은 한국인과 아시안 아메리칸(그리고 하와이 원주민과 태평양 군도인까지)을 거칠게 하나로 묶는 것이 다름 아닌 미국의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인과 아시안 아메리칸은 생긴 모습은 닮았지만 뿌리나 준거집단이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뭉개는 차별의 시선 때문에 방탄소년단 자신들이 살지도 않는 나라의 차별 범죄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분석이었다. 그는 “방탄소년단에게 이런 짐을 지워도 되는 것일까?” 하고 물었다. 준존 리의 복잡한 마음은 비단 그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아시안 아메리칸들 사이에서도 이 부분이 아직 사회적으로 합의가 덜 되어 있다고 느낀다. 일단 아시안 아메리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거대한 스펙트럼이다. 서구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자행하는 인종차별에 우리는 본의 아니게 동양인, 혹은 ‘범아시아’로 묶이지만, 사실 ‘범아시아’은 너무나 허술하고 거친 개념이다(아시아 내에서 ‘범아시아’를 말했던 시절은 공교롭게도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서로 다른 이들이 등떠밀려 모여서였을까? 미국의 민권운동 역사 속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의 조직화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아시아인 대상 혐오 범죄의 범람 앞에 우리는 서둘러 아시안 아메리칸 민권의 개념을 재정비하고 발전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는 꽤나 어렵다. 나는 아직까지 우리 담론이 다소 설익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성긴 부분을 빠르게 보완해 나가고 있다고도 느낀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과 코리안 아메리칸 또는 고국에 사는 아시아인과 아시안 아메리칸 역시 각자의 준거집단이 다른 만큼 입장의 차이가 있다. 아시아 국가들 간의 관계가 첨예할 때에도 이곳의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동남아시아계, 인도 아대륙계, 서남아시아계, 하와이계, 태평양 군도계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상대로 일어나는 차별과 맞서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도 한국인인 그들과 코리안 아메리칸 혹은 동양인 이민자들이 경험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슈가와 RM은 아마존 뮤직 재키 초와의 인터뷰에서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언급하며 본인들보다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인터뷰어 재키에게 더 감동이었을 수 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방탄소년단은 자신들의 플랫폼이 유용하다면 아시안 아메리칸을 위해서 기꺼이 썼다. 나는 한인이자 아시아계 이민자로서, 본토 한국인과 한인 이민자의 다름 또 아시아계 이민자들끼리의 다름이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배우고 있다. 어렵지만 계속해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방탄소년단이 경계인인 내게 준 영향

방탄소년단의 성공과 인기가 나 같은 한인, 나아가 아시아를 떠나 사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이건 팬이 아니더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인의 얼굴을 한 그들이 미국 메인스트림 무대에 서고, 큰 사랑을 받고, 영향력을 끼치는 모습은 살아생전 이런 광경을 보리라곤 상상 못한 아시안 아메리칸들에게는 특별한 감동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시안 아메리칸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 부재했던 그 경험이 채워지고 있을 것 같아서 어른으로서 더욱 뭉클하다. 나는 더 이상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는 물론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명사들이 각계에서 노력한 때문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중 방탄소년단의 지분이 아주 크다. 대중음악은 전 세계 사람들이 비교적 고루 소구하는 문화니까 말이다. 이제 방탄소년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이들이 한국인이고 춤과 노래와 랩에 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정체성 정치가 대두되며 다양성과 매체 속의 소수자 포함(Representation)이 중요시되기 시작한 2010년대, 주류 미디어에서 드디어 너드나 신비한 무술인 같은 아시아계 스테레오타입으로부터 벗어난, 쿨하고 깊이 있는 캐릭터들을 조금씩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이 기억 난다. 방탄소년단은 그런 캐릭터들의 현신과 같았다. 나와 같은 한인, 혹은 동양계 미국인에게 방탄소년단은 그저 유명 보이 밴드 정도가 아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벽이 그들의 등장으로 조금이나마 녹아내리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자면,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하게 부상한 방탄소년단 역시 인종차별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산업계의 게이트키핑은 물론이고,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며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이민자를 향한 혐오가 들끓을 때 방탄소년단은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더 자주 차별주의자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내가 힘을 얻은 지점은,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이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싸워주었다는 것이다. 이중에는 방탄소년단과 같은 아시아인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적으로 방탄소년단이 받는 차별에 당사자처럼 슬퍼하고 분노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느꼈을 공감은 내 목소리로 하는 발화 혹은 앨라이로서의 연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록 집단 지성으로 적절한 언어가 등장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몰랐던 언어와 개념을 배운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전 세계 아미가 함께 이어간 랠리는 때로 혐오자의 정식 사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인종 혐오에 임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방탄소년단과 아미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그 자체만으로 큰 위로를 얻었다.

 

대중음악 측면에서, 방탄소년단의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들이 미국 시장에 진입하고서도 꽤 긴 시간 한국어 노래를 고집했다는 점이었다. 방탄소년단 전까지, 일반적으로 한국 아이돌이 미국 시장을 노릴 때에는 영어 노래 발매를 고려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그게 나쁘다는 건 전혀 아니다. 그런 시도가 때로는 색다른 시도의 장이 되기도 할 것이다. 다만 2010년대 말, 팬데믹 이전의 방탄소년단은 일반과는 다른 길을 굳이 가보려 했다. 왜였을까. 추측해보면, 방탄소년단은 가사와 메시지 전달이 중요한 음악을 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들이 더 편한 언어, 작사의 조형미나 불러내는 수행력에 있어 좀 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한국어가 소중했을 것이다. 특히 RM의 경우는 이미 과거 다수의 작업을 통해 영어로 긴 벌스를 쓰고 퍼포먼스까지 할 수 있음을 증명했지만, 그는 한국어 리릭시스트로서 깊이 뿌리내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2020년 말에 올라온 ‘위버스 매거진’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숨을 거둔 화가 김환기를 인용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왜냐면 나는 변방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을 계속 생각한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은 애초의 기획 의도와는 다르게 한국어 음악이 먼저 전 세계에서 반응을 얻으며 세계 무대에 타의로 불려나온 가수다.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링구아 프랑카(세계 무대에서 서로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소통을 위해 쓰는 공용어. 현대에는 영어의 영향력이 크다. 과거 영국의 광범위한 식민 지배와 현재 미국의 세계 패권 주도도 이유이겠다.)인 영어 음악에 매진하는 길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깊이 끌리고 탐구한 음악은 그들이 나고 자란 나라의 언어를 담은 한국어 음악이었다.

 

언어는 민족 정체성과 강하게 결부돼 있다. 특히 한국어처럼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인구가 한국인인 언어는 더욱 그렇다. 사람에게 민족 정체성이 공고하면 무엇이 좋을까? 실질적인 것은 없다. 단지 존재론적인 위협을 덜 느낄 수 있다. 이미 자신의 존재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주제일 것이다. 그러나 외국 생활이 길어지며 제1의 언어도 제2의 언어도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는 나 같은 경계인에게는 언어의 망각이란 곧 존재의 사라짐 같은 위기감으로 다가온다. 방탄소년단은 나처럼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국 국적의 한국인이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 불려나온 이상, 이들은 경계인의 경험을 했을 것이다. 곳곳에서 한국인인 그들을 밀어내는 사회를 마주했을 것이고, 이들이 한국인임을 지워 자국의 서브컬처에 통합하고자 하는 압력도 만났을 것이다(미국식 멜팅포트(Melting Pot)의 허점은, 일견 경계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계인이 이전의 정체성을 놓지 않을 때는 혹독하게 차별한다는 것이다.). 차별이 나를 만들었던 그 감각을 그들 역시 조금은 느껴보지 않았을까. 그들도 종종 경계인의 딜레마를 생각하며 살지는 않을까 상상한다.

 
 

다르지만 연결된 사이

좋아해서 자주 다시 보는 인터뷰가 있다. 봉준호 감독의 통역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인 샤론 최가 한국계 캐나다인이자 미국인 배우인 샌드라 오와 진행한 인터뷰다. 봉준호가 영화 ‘기생충’으로 다수의 상을 받던 당시, 샌드라 오는 수상 소감을 하는 봉준호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인의 얼굴을 한 사람이, 아시아인 남자가, 높은 단상에 올라가 소감을 전하며 조금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인 것이 너무나 생경했다는 것이다(샌드라 오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은 이렇구나.” 하고 말하자 샤론 최는 “(봉준호 감독님은) 사회에서 소수 인종인 적이 없죠.”로 정정해준 것까지 빼놓을 수 없이 좋았다.). 샌드라 오는 동시대 아시아계 배우 중에도 손에 꼽힐 만한 큰 성취를 해온 훌륭한 배우다. 그러나 그 같은 사람도 ‘평생을 차별 속에 살지 않은 아시아인은 이렇게 자유롭고 당당한 모습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느꼈다는 데에서 나는 안타까움과 동질감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샌드라 오처럼 활발하게 활동한 유명인은 더 많은 차별을 최일선에서 겪었을 것이다. 나는 방탄소년단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샌드라 오가 봉준호에 느꼈을 감탄 그리고 내가 샌드라 오를 보며 느끼는 동질감 둘 다 말이다.

 

그러면서 방탄소년단에게도 우리처럼 다른 대륙에 건너와 먼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움과 영향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해본다. 인간은 미지를 두려워하는 존재다. 서로 섞여 살지 않으면 남을 끝없이 타자화하고 두려워하며, 결국은 미워하거나 지워버리려 든다. 미국에서 혹은 서구의 다른 나라에서 아시아인의 얼굴로 분투하며 살아온 사람들 덕분에 여기에도 아시아인의 자리가 생긴 건 아닐까, 여기 사람들도 조금이나마 아시아인을 포함하는 다양성을 생각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게 한국의 방탄소년단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 샌드라 오가 ‘오징어 게임’의 배우 정호연과 만나 나눈 버라이어티지의 ‘Actors on Actors’ 대화는 ‘그 길’을 먼저 가본 아시아계 여성의 통찰력과 포용력을 보여준다. 정호연 역시 위에 열거한 것과 비슷한, “한국에서만 살아온 내가 아시안 아메리칸을 대표할 수 있는 걸까?” 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샌드라 오는 이런 책임감에 공감하며 적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인의 얼굴로 먼저 이곳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이후에 온 사람들을 환대해주는 모습이었다. 하나가 되기 위해 한국인과 한인,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이민자의 차이를 굳이 뭉퉁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 좀 더 가까운 혹은 이민 국가에 좀 더 가까운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면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정체성일 수도 있지만, 각자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서로를 돕기도 하는 관계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연결돼 있다. 이것 역시 연대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실은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도 이 에세이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영역 밖의 정체성 스펙트럼을 상상하기 어려워해서 나의 호소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AANHPI처럼 집단으로 호명되는 정체성들은 정치나 사회의 담론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하기에, 지금으로부터 5년, 10년이 지나면 이 글은 지금은 겨우 맞고 그때는 아주 틀린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나는 경계인과 연결돼 있는 방탄소년단을 계속해서 생각할 것 같다. 내 방식의 연대로서 말이다.
 

 

* 리서치를 도와준 나의 친구 Alice에게 큰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