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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석, 이예진,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디자인. 전유림
사진 출처. 쏘스뮤직

선녀도 악녀도 아닌 쾌녀

강명석: ‘쾌녀’. 인터넷에서 르세라핌을 언급할 때 종종 등장하는 단어다. 좁은 의미로는 ‘쾌남(快男)’의 ‘男’이 ‘女’로 바뀐 단어라 할 수 있겠으나, 르세라핌에게는 걸그룹도 보이그룹도 누구도 쉽게 보여줄 수 없는 그들의 행보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이를테면 르세라핌은 데뷔 활동을 마치자마자 다큐멘터리 ‘LE SSERAFIM - The World Is My Oyster’를 발표했다. 다큐멘터리에는 데뷔 물망에 올랐던 연습생 중 한 명이 탈락하는 과정이 담겼고, 이미 스타인 김채원이 춤에 관해 지적을 받자 자책하는 모습도 있다. 그리고 새 앨범 ‘ANTIFRAGILE’의 수록 곡 ‘No Celestial’에서 김채원은 노래한다. “I’m no f***in’ angel / I’m no f***in’ goddess” 걸그룹이든 보이그룹이든 데뷔 초의 아이돌 그룹이 “f***in’’을 쓰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단어의 대상이 걸그룹에게는 찬사처럼 쓰였던 천사와 여신이라는 점에서 더욱 희귀하다. 그러나 르세라핌에게 ‘쾌녀’가 단지 ‘쾌남’의 반대말이 아니듯, “I’m no f***in’ angel”이란 외침은 그들이 천사 반대편의 악마라는 의미가 아니다. 르세라핌의 ‘COMEBACK SHOW : ANTIFRAGILE’에서 첫 공개한 타이틀 곡 ‘ANTIFRAGILE’의 퍼포먼스는 멤버들이 밝게 웃으며 손으로 하트를 만드는 것으로 끝난다. 팔 근육을 강조하는 머슬 포즈도 진지하게 강함을 어필하는 대신 유쾌(愉快)한 웃음과 함께한다. ‘Impurities’와 ‘No Celestial’ 등 컴백 쇼에서 선보인 다른 퍼포먼스 또한 시종일관 밝고 신나는 분위기다. 

 

그러나 ‘No Celestial’은 멤버들이 웃는 와중에 스탠드 마이크를 눕혔다 일으켜 세우거나 격렬한 헤드뱅잉을 선보이고, 아프로 라틴 스타일의 ‘ANTIFRAGILE’과 올드스쿨 힙합 비트 기반의 R&B 분위기가 물씬 나는 ‘Impurities’는 각각 라틴과 올드스쿨 힙합 비트에 어울리는 바운스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골반을 튕기고, 박자에 맞게 스텝을 바꾸면서 소화한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유쾌한 에너지는 그것을 연출할 수 있는 체력과 연습량, 합쳐서 강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라틴 팝, R&B, 팝 펑크 등 곡마다 바뀌는 장르의 특성을 반영한 퍼포먼스를 하면서도 앨범 전체를 신나고 흥겨운 분위기로 통합할 수 있다. ‘ANTIFRAGILE’의 퍼포먼스는 멤버들이 라틴 리듬에 맞춰 몸을 계속 빠르게 흔들면서도 그 자체가 칼군무가 되도록 동작을 맞추고, 시차를 두고 같은 동작을 하는, 이른바 ‘그림자 안무’를 선보이는 등 골반과 다리를 계속 움직이며 하기엔 고난이도다. 그 결과, ‘ANTIFRAGILE’은 유쾌하게 땀을 흘릴 수 있을 것 같은 라틴 팝의 장르적 분위기를 충실히 담아내면서도 그 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K-팝 퍼포먼스에 필요한 요소들을 정확하게 결합한다. “I’m no f***in’ angel”이나 “불길 속에 다시 날아 rising(‘ANTIFRAGILE’)” 같은 가사들이 태연하게 섞여 있고, 멤버들은 즐겁게 웃고 손으로 하트를 만들면서 코어 근육 만드는 비법이 궁금할 만큼 곡 내내 허리, 골반, 다리로 박자를 맞춰야 하는 춤을 춘다. 르세라핌은 걸그룹과 보이그룹의 어느 전형적인 모습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매력적인 특성들은 한데 섞어 새로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산업적인 언어로는 K-팝의 경계들을 넘어서면서 한계를 확장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줄이면 ‘쾌녀’일 것이다. 

 

‘ANTIFRAGILE’에서 르세라핌은 그들이 무엇이 되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시밭길이라도 “riding”하거나 불길 속에서도 다시 “rising”하겠다는 의지만을 보여준다. 더 빨리 달려, 더 높이 날아오르겠다는 이 상승의 욕구는 ‘The Hydra’에서 “私を黒い海に投げてみて(나를 검은 바다에 던져 봐)”라는 하강의 이미지와 대비를 이룬다. 저음의 내레이션과 EDM 비트가 분위기를 무겁게 내리깔았던 ‘The Hydra’와 달리 ‘ANTIFRAGILE’은 도입부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부터 약간 쏘는 듯한 멤버들의 고음으로 시작하고, 저음을 많이 내지 않는 멤버들의 목소리에 전개가 진행될수록 베이스와 드럼 등으로 점차 저음을 추가해 보컬과 대비를 이루며 곡에 적당한 무게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승해야 할 위와 하강한 아래의 차이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건 위와 아래의 차이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겠다는 의지 자체다(공교롭게도 이 곡에서 묵직하게 퍼지는 베이스의 비트가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이 있는데, 카즈하, 사쿠라, 김채원이 다른 파트보다 저음을 쓰며 각자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라며 자신들의 실제 과거를 발언할 때다.). 히드라의 머리가 검은 바다로부터 솟아올랐다면, 히드라는 과연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세상에 올라온 그 자체를 즐겼을까. 르세라핌은 새 앨범에서 스스로를 천사, 여신, 악마 등 어떤 모습으로도 규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목이 잘린 채 검은 바다로 내려갔던 히드라의 머리가 다시 세상으로 솟아오를 만큼 강력한 에너지 그 자체다. 

 

무엇이든 되도 좋고, 그걸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강함은 어떤 식으로든 증명의 과정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는 ‘독기 충전 영상’으로 소개될 만큼 아이돌로 데뷔하는 것이 얼마나 격한 과정을 겪는 것인지 보여줬고, 데뷔 초의 아이돌 그룹에게 주문한 대본 없는 상황극 ‘르세라핌 컴퍼니’는 멤버들이 팀워크로 분량을 만들어내면서 좋은 반응을 얻어 컴백 쇼 VCR의 중요한 소재가 됐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평소와 음향 상황이 달랐던 KBS ‘뮤직뱅크’에서 ‘FEARLESS’를 숨소리까지 전부 들리는 라이브로 소화하며 인상을 남겼고, 대학 축제에서는 관객의 함성을 뚫고 목소리가 전달되는 역량을 입증했다. ‘ANTIFRAGILE’은 앨범의 메시지인 동시에 르세라핌이 지난 5개월 동안 보여준 그들의 팀과 일에 대한 의지이자 태도고, 이것이야말로 지금 르세라핌만이 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길이다. 무엇이 되겠다거나, 되기를 기대받는 대신 단지 더 강하게, 더 높이 올라가길 원한다. 그래서 더 크고 강한 에너지를 원하고, 계속 이어지는 스케줄에서 스스로를 입증한다. 하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순간 얼마든지 즐거운 모습도 될 수 있다. ‘쾌녀’의 사전적 의미가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쾌남’의 반대말이 아닌 그 자체의 언어로. 


‘FEARLESS’에서 ‘ANTIFRAGILE’로

이예진: 르세라핌의 데뷔 곡 ‘FEARLESS’는 “제일 높은 곳에 난 닿길 원해”로 시작한다. 그들의 새 앨범 동명의 타이틀 곡 ‘ANTIFRAGILE’의 후렴구에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문장이 등장한다.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라던 세계 젤 위에”.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떨어져도 돼”다. ‘FEARLESS’와 ‘ANTIFRAGILE’ 사이 르세라핌은 “제일 높은 곳”에 “더 높이” 가기 위한 데뷔를 했고, 데뷔 전 “내 흉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What you lookin’ at”)에 대해 “I’m fearless”하겠다는 태도는 올라간 만큼 떨어지는 충격이 있어도, 심지어 누군가 추락을 원하고 있어도 (“모두 기도해 내 falling”) 깨지지 않겠다는 “I’m Antifragile”로 바뀌었다. 데뷔 이후 다가오는 반응은 단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때론 깨지지 않는 단단한 태도가 필요할 만큼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가시밭길 위로 riding / You made me boost up”. “Antifragile”을 반복하는 도입부 뒤에 곧바로 등장하는 이 가사는 르세라핌이 과거의 충격과 미래의 위협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앨범 전체의 메시지이기도 한 ‘Antifragile’을 훅에서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로 말장난하듯 해체하고, 이 부분의 안무는 팔 근육을 강조하는 포즈를 취하며 강인함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이내 그 팔로 사자와 고양이를 흉내내며 “Antifragile”이라는 단어의 분위기를 유쾌하게 바꾼다. ‘FEARLESS’가 가사와 사운드, 퍼포먼스 모두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세상에 “I’m fearless”를 선언했다면, ‘ANTIFRAGILE’에서는 어떤 충격이든 웃어 넘기면서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다. 외부의 충격을 싸워서 튕겨내는 게 아니라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여유. ‘ANTIFRAGILE’은 ‘FEARLESS’와 달라진 르세라핌의 현실과 메시지뿐만 아니라, 달라진 태도를 함께 보여준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충격이 더 강해진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르세라핌의 방식도 달라진다. 그들은 앨범과 앨범 사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 ‘LE SSERAFIM - The World Is My Oyster’에서 그들은 각자의 과거부터 르세라핌의 결성과 준비, 데뷔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팀의 퍼포먼스 실력이 점점 더 좋아지듯 멤버들의 관계와 성공을 향한 열망 그리고 자신을 향한 평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려는 의지도 점점 커졌다. ‘FEARLESS’가 그들의 데뷔 전 변화와 결기를 담았다면, ‘ANTIFRAGILE’은 그사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팀의 각오와 웃음이다. “I’m no f***in’ angel / I’m no f***in’ goddess”처럼 아이돌 그룹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가사와 더불어 “솔직한 내 목소리를 들어줘”라고 노래하는 ‘No Celestial’의 작사에 허윤진이 참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멤버와 스태프들의 대화를 통해 가사를 만들어가는 이 팀의 노래들은 멤버들의 바로 지금을 담는다. 새롭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팀의 등장이다. 그것도 격렬한 동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하는. 

균형과 화려함을 동시에 갖춘 베리에이션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벌써 두 번째 미니 앨범이다. 5월에 발매된 데뷔 앨범 ‘FEARLESS’를 지금까지 꾸준히 듣고 있는데, 음반의 흐름이 안정적이라서 좀처럼 질리지 않는다. 두 번째 미니 앨범 ‘ANTIFRAGILE’은 음반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두 음반 모두 다섯 트랙씩 수록되어 있고,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첫 트랙은 첫 트랙끼리, 타이틀 곡 두 번째 트랙은 두 번째 트랙끼리, 이하 트랙들 역시 전작과 후속작이라는 이름으로 호응한다. 규칙과 패턴은 견고한 느낌을 준다. 좌우 평형이 잘 맞는 공간 디자인 같다. 반면, 이런 패턴을 생각하면서 곡의 면면을 파고들어보면 또 ‘ANTIFRAGILE’의 곡들이 전작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에너지를 낮게 깔아 단호하면서 심플하게 풀어냈던 ‘FEARLESS’와 비교했을 때 ‘ANTIFRAGILE’에는 ‘쿵-치딱치’ 하는 뎀보 리듬의 불균형감이 먼저 들린다. 그러나 비슷한 리듬의 라틴 팝 곡들처럼 뜨거운 온도감은 아니다. 울림이 적고 차가운 드럼과 퍼커션 소리 탓에 예의 인더스트리얼한 느낌이 계속되고 있다. 프리지안 모드 리프(초반의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 뒤에 반복되는 ‘고대 문명 발상지 음악 같은 신비한’ 선율), 크레딧에 보이는 빅히트 뮤직 프로듀서 슈프림 보이, 가창자의 실제 서사와 밀착된 가사 등에서는 방탄소년단의 ‘Mic Drop’도 연상된다.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 같은 펀치라인은 이제껏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 서사를 드러내며 큰 임팩트를 준다.

 

‘Impurities’는 전작의 ‘Blue Flame’과 상응하는 가벼우면서 세련된 R&B 트랙이다. 음반의 정중앙에 위치해 자칫 딱딱해질 흐름을 한 번 부드럽게 바꾸어준다. 미국의 1990~2000년대 걸그룹 R&B 같은 리듬감과 화성, 신비하면서도 경쾌한 분위기가 발군이다.

 

‘No Celestial’은 르세라핌 팀명의 ‘천사’ 비유를 뒤트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팝 록이지만 디즈니 스타일의 화사함보다는 20세기 일본 아니메 주제곡의 세기말 감성이 느껴진다(원체 ‘천사’라는 단어와 이미지가 세기말 미디어에서 큰 사랑을 받기도 했고.). 제목 때문에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초기 작 ‘천사가 아니야’ 혹은 니시모리 히로유키의 ‘건방진 천사’ 등도 연상된다. ‘FEARLESS’ 미니 앨범의 ‘The Great Mermaid’가 그랬듯 타이틀 곡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야망을 드러낸다.

 

전작과 가장 큰 차이가 느껴지는 트랙은 마지막 곡 ‘Good Parts (when the quality is bad but I am)’다. ‘Sour Grapes’와 이 곡 둘 다 틱톡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 사랑 받을 법한, 너무 무겁지 않은 노래다. 그러나 이 곡은 프로덕션과 멤버들의 참여 비중이 큰 가사 모두 좀 더 진솔하고 소탈한 무드에 포커스를 맞췄다. 8월에 르세라핌의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공개된 허윤진의 자작곡 ‘Raise y_our glass’의 연장선상에 놓아도 될 것 같다.

 

베리에이션은 분명한 규칙이 선행할 때 빛난다. 두 음반 간의 연속성, 또 새 음반이 변주하는 규칙을 염두에 두면 더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