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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리(영화평론가)
사진 출처.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유니버설 픽쳐스

‘바비와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다를 수 없는 두 편의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가 북미 개봉일을 같은 날로 결정해 ‘바벤하이머’라는 신조어로 묶여 붐을 조성하더니 결과적으로도 박스오피스에 불을 지피고 영화 산업 바깥까지 여파를 미쳤다는 소식이다. 심지어 바비의 핑크 의상과 오펜하이머의 ‘이과 패션’을 갈아입어 가며 두 편의 영화를 하루 동안 파티처럼 즐기는 관객도 있다고 한다. 두 영화의 개봉일이 다른 나라의 관객으로서 먼저 드는 생각은 “재밌겠다.”이다. 이제 극장 영화는 이만한 패키지는 꾸려야 사람을 모으는 모종의 ‘이벤트’가 되어버린 건가 하는 기우다. 이 생각은, ‘탑건 : 매버릭’과 ‘미션 임파서블 :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사실적 액션에 갈채를 보내다가 동료 영화 기자와 나눴던 ‘현타’의 순간과도 맞닿아 있다. 이제는 아날로그 액션의 아름다움을 입증하려면 이 정도 규모의 자본과 스타가 들어가야만 하는 시대가 된 걸까? 그렇다면 할리우드 외에 극장에서 지속 가능한 수의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액션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국내에서 ‘오펜하이머’를 앞질러 7월에 개봉한 ‘바비’는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로 감독으로서 견고한 입지를 다진 그레타 거윅이 연출하고 배우 마고 로비가 제작, 주연을 맡은 여름 영화다. 각본은 그레타 거윅과 그의 파트너 노아 바움백이 함께 썼다. 바비 인형의 저작권자 마텔사가 영화 제작을 통해 얻는 이득은 자명하다. 성공한 페미니스트 예술가 그레타 거윅의 손으로 64년 된 지적 재산의 생명을 연장하고, 비현실적 외모의 기준을 여성들에게 강제했다는 혐의에 시달려온 바비의 어둑한 아우라를 클렌징할 수 있다(마텔 경영진이 극중 악당인 것쯤이야 마케팅 견지에서 치를 만한 비용이다.). 물론 바비가 여성을 억압하기만 해온 ‘사탄의 인형’은 아니다. 상업적 동기로 만들어진 연계 상품이긴 하지만 바비는 미국 여성에게 신용카드도 발급되지 않았던 1962년부터 드림하우스를 ‘자가 주택’으로 당당히 소유했으며 현실의 여성보다 먼저 달에 가고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레타 거윅의 어머니는 백인 딸에게 당시 마텔이 출시한 흑인 바비를 사주었다고 하니, 당대 진보적 엄마들의 심사숙고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 감독의 길을 걷는 걸로 보였던 그레타 거윅은 ‘바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여러 의의와 명분을 차치하고 무엇보다 거대 예산 프로덕션의 운용 경험이 큰 수확으로 보인다. 과연 ‘바비’의 분홍색 플라스틱 포장 아래에서 그레타 거윅은 도입부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쉘부르의 우산’, ‘플레이타임’ 등 영화사 고전의 장면들을 마음껏 인용한다. 바비(마고 로비)와 켄(라이언 고슬링)이 바비랜드에서 인간계로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진짜로 가짜인”, “진정성 있게 작위적인(authentically artificial)” 세계를 찍기 위해 연극 무대장치를 방불케 하는 특수효과를 연출하기도 한다. 개봉 주말 3일 기준 3억 3,600만 달러 흥행으로 여성 감독 사상 최고 기록을 세운 그레타 거윅은 이로써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거물 영화인 클럽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인디 감독의 ‘훼절(selling out)’을 거론하고자 한다면 그레타 거윅은 지금까지도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의 관점에서 스타 배우들을 캐스팅해 충분히 상업적인-그리고 본인의 관점에서 정직하고 개성적인-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레타 거윅이 바비 인형의 모순된 사회적 기능과 현대 여성의 딜레마를 예술적으로 절묘하게 해결해줄 거라 기대한 관객은 ‘바비’에 실망할 것이다. ‘바비’는 주인공 바비를, 결말에 이르러 답을 찾아내는 영웅적 롤모델이 아니라 현실 여자의 거울로 설정했다. 극중 바비는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가모장제 이상향 너머에 매일 싸워야 생존이 가능한 여자들의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덜 완벽하더라도 온전히 자신이 주관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 판타지 영화에서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는 엄밀한 법칙 없이 상호 영향을 미친다. 완벽하게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던 바비는 어느 날 파티 도중 별안간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이는 현실에서 그를 소유한 인간이 삶에 회의를 느끼고 어두운 생각에 잠겼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해당 소유자는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 마텔사에서 일하는 소녀의 어머니 글로리아(아메리카 페레라)다. 인형을 창조하고 다시 그 인형에게 영향을 받는 인간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셈이다. 

  • ©️ Warner Bros.

‘바비’의 화법은 직설적이고 메시지의 수위는 상식적이다. 영화의 서사적 절정은 가부장제를 학습한 켄들이 획책하는 헌법의 퇴행을 막는 작전인데, 최근 미국 대법원이 임신중단권을 부정한 사건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직유법을 알아차릴 것이다. 연출작이 세 편이 된 지금, 그레타 거윅 작품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패턴은 영화의 혼을 담은 긴 대사(*speech)다. ‘레이디 버드’ 마지막에 주인공이 엄마에게 보내는 보이스 메일, ‘작은 아씨들’에서 조와 에이미가 쏟아낸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현실에 관한 일갈에 이어 ‘바비’는 글로리아에게 ‘기조 연설’을 맡긴다. 여러 매체에서 전문을 인용하기도 한 이 긴 발언에 의하면 오늘날 여성은 마른 몸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마르면 안 되고 마르고 싶다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원한다고 말하면 안 되고, 주도적이어야 하지만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안 되며 엄마 노릇을 사랑해야 하면서도 자식 이야기를 자주 하면 안 된다. 글로리아의 대사를 들으며 ‘바비’에 걸린 기대 역시 이만큼 불가능한 줄타기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바비’가 영미권에서 거두고 있는 성공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캐릭터화하고 인형처럼 꾸미는 인스타그램 전성시대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기억이 맞다면 마론, 미미, 쥬쥬, 바비, 이름이 무엇이었든 나를 포함한 여자아이들은 예쁜 인형을 곱게 두지만은 않았다. 옷을 갈아입히기에 싫증이 나면 우리는 인형의 머리칼을 자르고 눈물을 그리고 관절이 허용하는 이상 팔다리를 움직여 험한 모험도 시켰다. 당연하게도 소녀들의 머릿속은 꽃밭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행동의 결과물인 ‘괴상한 바비(케이트 맥키넌)’는 바비랜드의 특이점(singularity)으로서 그들의 세계가 예정에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돌파구가 된다. 장차 인생에서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궁극적으로 바비의 여정은 그레타 거윅이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와 연출작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이 걸어간 궤적과 유사하다. ‘작은 아씨들’까지 포함해 거윅이 주연, 연출한 세 편의 성장 영화에서 여자들은 이상주의를 뒤로하고, 현실이 허락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모조 도조 카사 하우스(‘바비’에서 켄이 자기 뜻대로 꾸민 집을 일컫는 말)’를 찾아간다. 그리고 거윅의 영화는 가장 냉혹하고 실망스러울지도 모르는 다음 장이 시작되기 전에 끝난다. 인간 바바라가 된 바비는 어떤 나날을 살아갈까? 진짜 드라마는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감독 그레타 거윅 이야기만 잔뜩 했지만, 제작자 겸 주연 마고 로비는 영화 ‘바비’를 물심양면으로 가능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바비’에는 10대 소녀가 바비를 성애화된 자본주의의 표상이라고 면전에서 비난하는 장면이 있는데 마고 로비의 상처받은 리액션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서적 후크다. ‘바비’의 모든 신에 나오다시피 하는 마고 로비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단 한 장면에 등장해 영화의 심장 역할을 한다. 극중 연극배우인 마고 로비는 제작 과정에서 잘린 자기 배역의 대사를, 상대역이 될 뻔한 배우(제이슨 슈왈츠먼) 앞에서 암송한다. 내용은 죽은 아내가 비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에게 전하는 위로다. 

 

이야기의 무대는 1955년 냉전기의 미국 서부. 수천 년 전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 조성된 모텔 파크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과학 영재 컨벤션을 맞아 북적인다. 아내를 여읜 종군 사진작가 오기 스틴백(제이슨 슈왈츠먼)과 고독한 배우 밋지 캠벨(스칼릿 조핸슨)을 포함해 상처받은 어른들과 상처를 예감하는 아이들이 모여든 자리에 느닷없이 외계인이 강림하고 모두는 정부의 격리 조치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일시적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 군중의 가운데 감정의 중심에 있는 오기와 밋지는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티내지 않는 전형적인 웨스 앤더슨식 인물이다. 다른 영화에서 앤더슨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작은 ‘클럽’을 만들어 상처를 달래지만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기와 밋지는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마주 보는 방갈로에 투숙한 둘은 창문을 통해 서로의 사진과 연기에 대해 대화한다. 마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처럼.   
   

웨스 앤더슨식 인물들은 종종 억양과 몸짓을 절제하고 태엽 감은 인형처럼 말한다. 그래서 협업하는 많은 대배우들에게 웨스 앤더슨이 어떻게 연기를 지시할지, 갈등은 없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앤더슨의 11번째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인형극의 인상을 준다. 여느 때보다 많은 인물이 등장한데다 대사의 양도 많고 속도도 빨라, 대사를 이해하려 들지 말고 색채와 움직임에 집중하라고 관객을 등 떠미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상대적으로 세트보다 연기와 감정이 중요하고 자기고백적인 작품이다. 사막의 모텔 파크로 공간을 한정한 덕분에 웨스 앤더슨은 다채로운 배경을 구도로 일관되게 정돈하는 부담에서 오히려 자유로워 보인다.
 

전작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잡지의 목차를 빌어 옴니버스 구성을 취했던 웨스 앤더슨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식의 중첩된 액자 구조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연극의 제작 과정을 소개하는 흑백 TV 프로그램(이하 A)이 제일 바깥 액자이고, 그 안에 연극 메이킹 필름(흑백)이 들어 있고(이하 B), 이 과정을 거쳐 완성된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이하 C)가 (컬러 영화 형식으로) 노른자 자리에 들어 있다. 이를테면 프로시니엄 아치 안에 프로시니엄 아치가 계속 열리는 셈인데, A의 인물이 B에 들어갈 수는 있고 B의 배우들은 C의 캐릭터로 진입할 수 있지만 C와 A 사이엔 연결 통로가 없다. 이 법칙의 엄격함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A의 진행자(브라이언 크랜스턴)를 C에 슬쩍 집어넣었다가 황급히 빠져나오게도 한다. 

  • ©️ Universal Pictures

‘프렌치 디스패치’가 글쓰기에 관한 영화였다면 연극 제작을 둘러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연극에 관한 영화이며, 그중에서도 배우의 예술에 집중한다. B에 속한 배우 존스 홀(제이슨 슈왈츠먼)은 C의 사진작가 오기 스틴백으로서 배우 밋지의 대사 연습을 도와주다가 “아내를 잃은 당신의 비탄을 연기에 이용하라.”는 밋지의 말에 무너진다. 존스 홀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쓴 극작가 콘래드 어프(에드워드 노튼)의 연인이었고 콘래드 어프는 연극을 올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말하자면 이 배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태에서, 전쟁에서 살아 돌아와 아내와 사별한 남자로 분하고 있는 처지다. 그리하여 해당 장면에서 “연기를 시도하는 배우 아닌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로서 세 겹의 리얼리티가 주는 억압과 혼돈을 견디지 못한 존스 홀은 신성한 제4의 벽을 찢고 무대에서 뛰쳐나와, 연출자 슈버트 그린(애드리언 브로디)에게 호소한다. 그리고 뛰쳐나간 극장 발코니에서 마침 옆 극장에서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이던 죽은 아내 역(마고 로비) 배우와 마주친다. 저승과 이승처럼 공중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두 발코니는 상실감을 강화하지만, 여배우가 읊어주는 (연극에서 지워진) 죽은 아내의 메시지는 신기하게도 피안에서 들려오는 연인의 목소리처럼 존스의 혼란을 가라앉힌다. 
 

요컨대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세계에서 더 이상 가짜는 진짜의 외부에 있지 않다. 거꾸로 어떤 사람들은 가짜를 통해서만 진짜에 다다를 수 있다. 극중에서 반복되는 “잠들지 않고는 깨어날 수 없다.”는 구호도 같은 뜻의 주문이다. 웨스 앤더슨은, 세상에는 ‘가짜’를,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과 친애하는 동료들의 작업도 결국은 그런 생존을 위한 작업이라고 고백하는 듯하다. 물론 그 고백은 쉽사리 뜯어볼 수 없도록 여러 겹의 예쁜 봉투에 담겨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