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카겔이라는 밴드의 역사는 그 분절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이들은 2015년 데뷔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가지 시각’부터 2016년 10월 데뷔 앨범 ‘실리카겔’에 이르기까지, 당대 가장 큰 주목을 받고 그에 걸맞은 완성도를 갖춘 신인 밴드였다. 2016년 11월 ‘EBS 스페이스 공감’ 올해의 헬로루키 대상, 2017년 1월 한국콘텐츠진흥원 K-루키즈 대상, 2017년 2월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 수상으로 이어진 압도적 행보는 당시에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밝은 눈을 가지고 있던 덕분일까? 그보다는 외면할 수 없는 규모의 재능과 성실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 이 명백함은 수년이 지난 후에 도래한 경력의 두 번째 분절에서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따라서 한때의 몇몇 열풍이 그랬던 것처럼, 수년이 지난 후에 부끄럽거나, 최선의 경우 추억 정도로 남는 헛헛함은 없다.
이들은 2018년 군복무로 인해 자연스러운 공백기를 가졌다. 애초 영상과 무대를 통해 시각 작업을 병행하던 3명의 VJ가 포함된 7인조는 군복무를 전후로 밴드 멤버 일부의 변경을 거쳐 음악 중심의 4인조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2020년 8월 ‘Kyo181’로 복귀하며, ‘새롭고 용감’했던 밴드의 ‘새로운 데뷔’를 선언한다. 이후 2021년의 ‘Desert Eagle’, 2022년 ‘No Pain’에 이른다. 두 노래는 2022~2023년 연이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노래 부문을 수상한다. 새로운 데뷔와 두 번째 분절은 이전과 무엇이 다르고 또 같을까?
실리카겔은 자신들을 창작 집단으로 인식하고, 각 멤버가 개별 아티스트로 충분히 기능하면서 밴드로서의 총합에 기여한다. 이는 시각을 포함한 공감각적 작업을 목표로 출발한 팀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기도 하다. 스스로 “팀워크(Teamwork)보다 팀플레이(Teamplay)를 지향한다.”는 언급은 명쾌한 요약이다. 결과적으로 각 노래가 팀에게 제안되고 개발되는 단계를 거치며, 장르와 스타일, 심지어 각 멤버의 포지션까지 유연하게 변동한다. 여기에 의미보다 발화의 맛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가사가 합쳐지면서, ‘새롭고 용감(Brave New)’ 또는 실험적이라는 묘사에 이른다.
여기서 한 발 내딛는 변화는 가사에서 시작했다. ‘No Pain’에서 뚜렷해진 바와 같이 밴드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고, 청자에게도 그것을 전달하는 목적의식이 생겨났다. 물론 말의 소리 자체를 따지던 작법을 버릴 이유가 없으니, 전환보다 수용과 배합에 가깝다. 노래가 의미를 구체화하니, 앨범 단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이 꼭 일종의 콘셉트 앨범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와 표현이 있을 때 피할 이유도 없다. ‘No Pain’ 이후 2023년 내내 우리는 싱글 ‘Mercurial’, ‘Tik Tak Tok’, EP ‘Machine Boy’를 만났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는 ‘No Pain’, ‘Realize’, ‘Tik Tak Tok’ 등으로 이어지는 2023년을 정의할 만한 앤섬 무더기를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기타 리프가 이끄는 익숙한 구조만으로 이 팀을 정의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흐름이 두 번째 앨범 ‘POWER ANDRE 99’으로 모인다. 시작부터 드림팝 노이즈에서 출발하여 얼터너티브로 넘어가는 ‘On Black’이 청자로서의 취향이라면, 배틀스(Battles)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구조와 연주를 선보이는 ‘Eres Tu’는 창작자로서의 지향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맛보아도, 앨범이라는 흐름 안에서 드럼머신으로 출발하는 ‘Juxtaposition’이나 가벼운 코러스로 시작하는 ‘Andre99’도 넓은 취향과 높은 지향 사이의 여유로운 유동임을 알게 된다. 이 팀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밴드로서 이례적인 대중적 입지를 얻고, 동시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결국 한다. 이들이 최근의 실리카겔이 ‘친절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으며, 차라리 ‘적극적’이라는 표현을 찾아내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POWER ANDRE 99’을 기계적이라고 말하며, 앨범을 계기로 이 성향을 극대화하고 졸업한다는 의도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두 번째 분절의 마무리가 된다. 앨범이란 창작 단위는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연대기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넓은 팔레트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의 그림을 완성하는 선택과 조합의 결과일 수도 있다. 두 번의 분절을 거치면서, 실리카겔은 자신들이 어떤 앨범을 만드는 밴드인지 확실히 선언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당겨지지 않은, 미래 어느 순간의 실리카겔이라는 창작적 스파크를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앨범과 트랙, 각 멤버의 개인 작업 안에 숨어 있는, 아직 쓰이지 않은 색이 캔버스를 뒤덮기를 기다린다. 요컨대 미래에 관해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각자의 희망을 말할 수 밴드가 생겼다. 내가 먼저 시작한다. 당신들 안에 핫 칩(Hot Chip)이 있는 걸 알고 있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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