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을 아이돌로 살았다. 일본과 한국을 거쳐 이제는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르는 아티스트가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것들도, 새로운 희망도 많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 그 사이의 경계에서 흘러가듯 호흡하는 사쿠라의 삶.
‘Perfect Night’로 르세라핌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어떤 기분인가요?
사쿠라: 르세라핌을 알아봐주는 분들이 많아졌다고 느꼈어요. K-팝 팬이 아닌 분들이 르세라핌의 노래로 챌린지를 하시거나, 길거리에서 저희 노래가 들리는 것처럼 일상에 스며든 기분이 들어서 좋았어요. 르세라핌이 앞으로도 더 영향력 있는 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갖게 됐어요.
‘Perfect Night’ 활동으로 르세라핌으로서는 처음 미국에 간 것도 새로운 경험이겠어요.
사쿠라: 초등학생 때 뮤지컬 워크숍을 위해 2주 정도 뉴욕에 갔어요. 그때는 꿈을 꾸는 평범한 소녀였는데, 아티스트가 되어 다시 뉴욕에 와서 타임스퀘어를 보니 신기했어요. 인생은 정말 모른다 싶었어요.(웃음) 아직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데 오히려 그래서 설렜어요. 더 공부하고 경험할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게 저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줘요. 조금 서툴러도 미국 사람들도 제 말을 받아들이고 즐겁게 반응해줘서 말하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결국 언어는 시간이 해결해주더라고요. 처음 한국어를 배울 땐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언젠가는 된다는 걸 알아서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한국 콘텐츠지만 주로 영어로 진행되는 ‘피식쇼’에서도 정재형 씨를 향한 사쿠라 씨의 한마디가 화제가 됐어요. 그 이후 즉석으로 촬영한 ‘정재형과 사쿠라’도 좋은 반응을 얻었고요.
사쿠라: 콘텐츠에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실해서 무의식적으로 흐름을 읽는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조금만 이야기해보면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말하면 실례가 되지 않고 재밌을지, 상대방이 원하고 재밌어 하는지 느껴져요. ‘피식쇼’에서는 재형 씨에게 조금 칼 같은 질문을 해도 ‘갑분싸’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재형과 사쿠라’는 정말 사전 상의 없이 촬영했는데, 뭘 잘하냐고 여쭤본 건 사실 진짜 궁금해서 말한 거라 재밌게 받아들여질 줄 몰랐어요.(웃음) 그때 하이브 사옥에 ‘피식대학’ 세 분이 모두 오셨거든요. 촬영이 끝나고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포인트를 잘 캐치하냐, 어떤 개그맨보다 재밌다.”라고 칭찬해주셔서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웃음)
여러모로 이전보다 여유가 있어 보여요. 르세라핌에서 한국, 일본, 미국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멤버들과 어울리는 경험이 영향을 줬을까요?
사쿠라: 서로 너무 달라서 재밌어요.(웃음) 계속 새로운 점들을 발견해서 알아갈 때마다 설렘이 있어요. 어릴 때 먹은 과자, 들었던 노래도 다 달라요. 미국에 가서도 ‘아, 윤진이가 이래서 그랬구나.’라는 걸 많이 느꼈고, 반대로 일본에 갔을 때는 다른 멤버들이 저와 즈하에게 그렇게 느꼈을 수 있고요. 서로 다른 언어를 하는 친구들이 모여 있어서 어디에 가든 의지가 되고 든든해요.
한국, 일본, 홍콩, 자카르타 등 여러 지역의 투어를 도는 경험은 어땠나요? 다섯 명이 무대를 책임지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쿠라: 르세라핌으로서는 첫 투어이기도 했고, 다섯 명이 무대를 채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어요. 서울 콘서트를 제외하면 댄서분들이 없었고, 개인 무대나 유닛 무대 없이 다섯 명이서 무대를 하니까 르세라핌의 한 명으로서 느끼는 무게감이 달라졌어요. 제가 혹시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다른 친구들에게 영향이 갈까 봐 무섭고. 그런데 평소에는 체력이 부족한 편인데, 이번 투어 기간 동안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요.(웃음) 공연을 시작하면 너무 재밌고 흥분돼서 힘들다는 생각이 잘 안 들어요.
콘서트에서 채원 씨가 ‘도도독’으로 화제가 됐을 때, 한편으로는 그 상황에서 전혀 웃지 않고 집중해서 ‘Fire in the belly’의 독무를 하는 사쿠라 씨의 모습이 주목받기도 했어요.
사쿠라: 이미 ‘스위치 온’이 된 상태라 웃음이 나오지 않았어요. 아직 피어나분들에게 그 무대를 많이 보여주지 않았을 때라 정말 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퍼포먼스 디렉터님이 제 독무에 대해 “눈빛으로 보여줘야 한다.”라고 말씀하셔서 그 피드백만 머릿속에 꽉 차 있었어요.(웃음) 원래부터 집중력이 좋은 편이긴 해요.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뜨개질만 5시간 동안 계속 집중해서 하고요. 오히려 ‘스위치 오프’를 하고 집중력을 줄이는 게 어려워요. 요즘은 무대에서 저에게만 집중하지 않으려고 해요. 다 같이 맞추려면 멤버들의 호흡을 느끼거나 주변의 소리나 공기를 느껴야 할 때도 있어서요.
쉬운 듯 보여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을 하고 있네요. ‘LE SSERAFIM (르세라핌) EASY TRAILER ‘Good Bones’’에서 사쿠라 씨가 눈에서 레이저를 쏴서 벽을 무너뜨린 뒤 코피를 흘리는 것처럼요.
사쿠라: 코피를 흘리는 장면만 새벽까지 남아서 1시간 이상 찍을 정도로 어려웠어요. 처음에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장면을 촬영한다고 들었을 때 ‘웃기게 보이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했어요.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니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감정을 이해하게 됐어요. 그 트레일러가 제가 살아온 인생 자체라고 느껴져서, 스스로 안타깝기도 했지만 멋있다고도 느꼈어요.(웃음) 누구에게나 인생은 힘들지만 그걸 티내지 않고 마치 쉬운 것처럼 살아가는 거니까요. 그런데 사실 보는 분들이 저희의 고통에 공감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무엇을 전하고 싶었나요?
사쿠라: 위로를 전하고 싶었어요. ‘세상에 타고난 사람들이 많으니까 어차피 나는 열심히 해도 못 이겨.’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타고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노력했고,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노력해서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누구나 못하는 건 없고,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재형과 사쿠라’에서도 “아이돌이라는 일을 잘하지는 않지만 좋아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사쿠라: 아이돌은 기본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보다 잘하는 것들이 따로 있어서 잘하는 걸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만이 할 수 있는 아이돌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런 아이돌을 본 적이 없긴 해요.(웃음) 팬이 아니더라도 제가 어디까지 갈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호기심으로 봐주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스스로도 ‘내가 어디까지 갈까?’ 이러면서 재밌게 하고 있어요.
이번 타이틀 곡 ‘EASY’도 새로운 도전이었죠? K-팝 걸그룹의 대중적인 문법과는 달리 힙합을 기반으로 개개인의 바이브를 살려야 하는 노래와 퍼포먼스라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사쿠라: 정말 쉽지 않았어요. 저희끼리 연습하면서 “전혀 ‘EASY’하지 않은데?”라고 농담할 정도로요.(웃음) 르세라핌 하면 칼군무잖아요. 저희는 연습을 하면 이제 자동으로 각도가 맞춰지고 칼군무가 되는데, 이번 곡에서는 서로 맞추기보다는 각자의 개성을 살려야 했어요. 매 순간이 도전이에요. 그래도 르세라핌에서는 해보지 않은 영역에 매번 도전할 기회가 주어져서, 해내는 만큼 저희에게도 좋은 점이 많다고 느껴요. 이번에도 뭔가를 얻은 게 확실하고요. 특히 이번 앨범은 ‘Swan Song’의 작사 참여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회사와 논의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같이 만들었어요. 회사가 저희를 아티스트로서 존중한다고 느꼈어요.
대중성을 고려해야 하는 K-팝 아티스트로서 이번 앨범의 직설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게 고민되지는 않았나요? 어떤 점에서는 K-팝의 안티테제로 보일 만큼 흥미로운 시도를 하는 앨범이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있을 것 같아요.
사쿠라: 음, 그래도 르세라핌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꾸준히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랑 이야기도 좋고 듣기 편한 곡들도 물론 필요하지만, 르세라핌만의 노래는 지금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이후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언제까지고 저희는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 데뷔하고 2년 차쯤 됐으니 저희의 인간적인 모습이나 내면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멤버들도, 회사도 생각이 같았어요. 그리고 저희는 앨범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요. 피어나분들도 그럴 거고요. 데뷔할 때의 저희는 정말 ‘FEARLESS’해서 그 노래를 들으면 당시 저희의 심정이 생각나요. 르세라핌의 노래가 과거의 저희를 짚어볼 수 있는 책갈피가 되었으면 해요.
작사에 참여한 ‘Swan Song’도 무대 뒤에서 아티스트가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해요.
사쿠라: 투어 때 그 노래의 가사를 썼는데,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원하는 길이니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해요. 사실 저는 아이돌로서의 저와 평소의 제가 같아서 이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의 반을 아이돌로 살았고, 앞으로도 그 기간이 점점 길어질 것 같고, 그런데 저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계속 춤을 춰야 하죠. “살기 위한 dancing”이라는 가사 그대로요. 저에게 이 일은 삶의 의미예요. 하고 싶고, 해야 하는 것. 이제 이 일은 저의 일부분이거든요. 없으면 못 살 정도로.
한편으로는 아티스트로서 매번 원래의 나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가 자신에게 맞는 백조 역할과는 상반된 흑조를 연기하는 데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요.
사쿠라: ‘EASY’를 연습할 때 그런 고민이 있었어요. 사람의 타고난 모습은 한정적이고,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도 누군가에게는 아쉬울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시선에 저를 다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가 소모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젠 세상의 시선에 저를 맞추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주려고 해요. 매번 변화를 마주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저답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억지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새로운 걸 하는 자체로 이미 변화니까.
“それでこの全てに何の意味があるんだろう?(그래서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지?)” ‘Good Bones’에서 사쿠라 씨가 던지던 그 질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려가고 있네요.
사쿠라: 그 내레이션은 제가 실제로 한 말이었어요. ‘10년 후, 20년 후에도 몇 년 몇 월 며칠에 르세라핌이 1위를 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왜 이렇게까지 기뻐해야 하고 슬퍼해야 할까? 정말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어요. 사실 저는 잘하는 게 무서워요. 한번 잘하면 그 다음에는 더 잘해야 하니까 미래의 제가 힘들 게 보여요. 요즘은 과거의 제가 저를 괴롭히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과거의 제가 달리고 있어서 거기에 등 떠밀려서 달리고 있어요. 무엇보다 멤버들이 있어서 멈출 수 없어요. 혼자라면 ‘여기까지면 충분하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5명이 함께라면 정말 더 높은 곳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희망을 갖게 돼요. 르세라핌이 코첼라(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트 페스티벌)에 가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벌써?’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황하기도 했어요. 가고 싶었지만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해서요.(웃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행운 같은 기회가 왔을 때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작년 10월 홍콩 콘서트가 끝나고 진행한 위버스 라이브에서 말했죠.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다.”고.
사쿠라: 작년부터 너무 일에만 집중하기보다 사람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렇게 흘러가듯 살다 보면 당시의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잊을 것 같아서요. 스케줄을 하다 보면 대기 시간이 많은데, 그때 핸드폰에 있는 숏폼 콘텐츠만 보면 인풋이 줄어들고 저에게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대기 시간을 보내요. 뜨개질도 하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기도 하고요. 아이돌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보니, 그 삶은 잘 알지만 다른 20대들의 고민과 행복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게 저에게도 위로가 돼요.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팬분들의 인생을 알아가는 것도,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즐거워요.
가고시마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성장하던 소녀 사쿠라는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가 끝없이 넓어지고 있네요.
사쿠라: 어릴 때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너무 내향적이라 가족들이 뮤지컬을 해보라고 했던 건데, 지금은 저의 본질과는 먼 일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승부욕이 강해서 더 올라가고 싶었는데, 점점 올라갈수록 세상을 알아가는 게 재밌어요. 그리고 세상이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이 저에겐 설렘이에요.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서요. 그 다음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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