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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예시연,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TBS Eye Love You X(Formerly Twitter)

‘Eye Love You’ (넷플릭스)

예시연: 초콜릿 숍의 CEO 모토미야 유리(니카이도 후미)는 상대방의 마음이 들리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다. 유리는 초능력을 활용해 고객의 니즈를 단번에 파악하는 영업왕이자 마감 기한을 착각한 부하 직원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는 완벽한 상사다. 하지만 초능력에 늘 장점만 있지 않는 법. 악의가 담긴 속마음을 들어 상처받곤 했고, “이런 힘을 가진 채 연애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런 그에게 낯선 언어로 생각하는 한국인 유학생 윤태오(채종협)가 나타난다. 국적도, 직업도, 성향도 다른 두 사람의 매개체는 한식이다. 음식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태오가 남긴 “비밀인데요, 비빔밥은 온돌 식당이라는 가게가 더 맛있어요.”라는 쪽지는 배가 고프면 화가 날 만큼 음식을 사랑하는 유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부침개, 라볶이, 잡채, 순두부찌개 등 군침이 절로 나오는 모습을 한 한식의 등장은 유리가 태오를 음식의 ‘신’으로 생각하는 과장된 연출을 시청자에게 납득시킨다. “마음의 소리를 알 수 없는 이 사람과 함께한다는 게 편하고 즐겁다.” 한국어로 생각하는 태오는 타인의 속마음에 지친 유리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동시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에만 집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상대다. 그리고 마음을 유추하지 않고도 눈치 챌 수 있는 태오의 애정 공세는 자꾸만 유리에게 설렘을 불어넣는다. 초콜릿처럼 달콤하면서도 든든한 한 끼를 먹은 듯 “에너지 충전!”을 돕는, 한식과 초능력으로 빚어내는 로맨스다.

‘두 세계 사이에서’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사건은 ‘두 세계’가 아니라 ‘사이’에서 벌어졌다. 연고 없는 항구도시의 직업 센터에 방문한 작가 마리안(줄리엣 비노쉬)은 이혼과 동시에 23년 ‘주부’ 생활도 끝나버린 구직자 행세를 한다. 직접 비정규직 인력이 되어 노동 취약계층의 실상을 고발하는 신작을 집필하기 위해서다. “제가 전하고 싶은 바가 의심보다 강해요.” ‘유명’ 작가 마리안을 알아보는 상담원에게 태연히 대꾸할 때, 그는 이미 이 르포르타주의 당위를 스스로 납득한 투사다. 최저임금을 받는 고강도 격무에 투입된 마리안은 공중화장실과 여객선을 청소하는 동안 촌각을 다투는 24시를 보냈지만, 우정은 비집고 싹을 텄다. 이는 마리안이 소명의식으로 발 들인 ‘세계’의 당사자, 크리스텔(헬렌 랑베르)과 마릴루(레아 카르네)가 마리안을 동료로 받아들였기에 발생한 변수다. 그러나 마리안의 일은 잠입 취재, 일종의 거짓을 전제해야 했으므로 마리안은 자기 ‘세계’에 반 걸친 채 변기를 닦았다. 그가 타이핑한 크리스텔과의 대화는 ‘현장’의 목소리일까. 창작에 죄책의 그림자가 얼씬거릴 이유는 없다고 여기던 마리안은 자신이 그들 ‘세계’에서 ‘베테랑’에 가까워질수록 가짜가 되는 아이러니를 비로소 감지한다. 취재원과 “친구로 남으면 좋겠”다는 위험한 소망에 앞서 그는 크리스텔과 마릴루와 함께 “사는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리안의 눈물은 참회이기보다, 그의 정체(正體)가 처음 작심한 대로 오로지 작가일 뿐이라면, 그의 글은 ‘두 세계’ 중 어디에도 닿지 못할 피상적인 메아리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깨달은 한 인간의 다른 면이다. 작가로서의 과업 완수 이전에 밀도 높은 유대감의 무게로 고개를 떨군 그는 작가이지만은 않다. ‘진실’은 최선의 자백 대신 최악의 발각처럼 들통났고, 마리안이 출간한 책은 청소 노동자의 여건을 개선하는 데 일조했다. 크리스텔과 마릴루의 “모욕”이 지나간 자리에는 고까움보다 복잡한 낙차의 실감이 남았다. ‘두 세계 사이에서’를 선민사상과 순수의 대결로 요약한다면 계급만이 공고해진다. 영원히 부동자세일 수도 있었던 ‘두 세계’가 포개어지며 불꽃이 튀었다. 스파크를 한쪽에서 측량할 순 없다. 사건은 ‘사이’에서 벌어졌다.

토모오(TOMOO) - ‘Present’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일본음악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서, 음악 프로그램 ‘関ジャム 完全燃SHOW(칸잼 완전연SHOW)’의 연간 베스트는 반드시 확인하는 편이다. 얼터너티브 록 밴드 슈퍼카 출신인 이시와타리 준지, 현 시점 가장 바쁜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츠타야 코이치를 포함한 세 명의 패널이 각자 그해 가장 인상 깊은 열 곡의 노래를 소개하는 코너인데, 신인의 등용문으로 작지 않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현지의 트렌드를 확인하기에도 적합한 덕분이다.

 

올 초 어김없이 실시한 2023년 결산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두 번이나 올리며 2024년의 라이징 스타를 예약한 이가 바로 토모오(TOMOO)다. 방송 직후 SNS에서 화제가 됨은 물론, 앨범 스트리밍 순위가 치솟고 뒤늦게 공연 티켓을 구하려는 움직임 또한 분주해졌다. 이에 라이브 일정 추가 및 잇따른 음악 페스티벌 출연 소식은 당연한 수순. 이 갑작스러운 돌풍의 중심에는 그가 오랫동안 가꿔온 단단한 음악적 내실이 자리한다.

 

호시노 겐이 몇 년 전 ‘YELLOW DANCER’(2015)와 ‘POP VIRUS’(2018)를 통해 부단히도 J-팝과 블랙뮤직의 일체화를 꾀했던 것처럼, 그의 첫 정규작 ‘TWO MOON’(2023) 역시 이 리드미컬한 음악적 유산을 자연스럽고도 사뿐히 일본의 정서 위에 덧대어 놓는다. 이와 함께 독특한 발상을 매개로 한 가사 역시 발군. 뾰족한 과시가 아닌 둥글둥글한 수용의 자세가 진정한 강인함이라 이야기하는 어퍼 튠 ‘Super Ball’, 무언가에 갈증이 있을 때야말로 여러 요소를 더욱 강하게 흡수할 수 있음을 흥미로운 비유와 함께 전개하는 ‘Grapefruit Moon’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이처럼 작품을 듣다 보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라는 말에 심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런 기세를 타고 선보인 신곡 ‘Present’ 역시 그만의 장점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노래로 완성되어 있다. 경쾌하고도 대중적인 팝뮤직을 지향하면서도, 악기 구성이나 코러스 활용 등 소절마다 세세하게 변화를 준 복합적인 구성은 2016년부터 구축해온 그만의 아이덴티티가 어느덧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노랫말 또한 흥미롭다. 선물을 고르며 ‘그 사람이 좋아할까? 취향이 아니면 어떡하지’라고 고민했던 기억들은 다들 있을 터. 이 보편적인 경험을 빌어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인연은 어떠한 물건이 아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빚어내는 교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중저음 위주의 단단한 음색은 이 감성적인 편지에 신뢰를 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 관계자들로부터 ‘결점’이라 들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어느덧 ‘장점’으로 체화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지금의 싱어송라이터들이 가야 할 길이 보인다. 2024년, 바야흐로 토모오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패트릭 브링리

김복숭(작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마음이 점점 가라앉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소설 속 환상의 세계에서 나만의 시간을 찾는다. 전 세계적으로 예측 불허였던 근 몇 년간 치유를 찾아 자연스레 새 소설책으로 손을 뻗었다면, 오늘은 다른 방식으로 위로와 삶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한 번 펼쳐보면 어떨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년간 경비원으로 근무한 패트릭 브링리가 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표면적으로는 뉴욕의 유명 미술관과 그곳에 소장된 수많은 예술품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저자가 유명 잡지사 일을 그만두고 공들여 만든 아름다움 속으로 “숨기로” 한 결정을 생각해보면, 이 책은 단순한 예술품과 공간만을 다룬 이야기로만은 볼 수 없다.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서 발견한 깊은 슬픔부터 평범한 일상에서 수백만 명의 관광객과 동료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듣는 기쁨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는 저자가 10년간 견뎌온 고독과 그 안에서 건져 올린 성찰이 있다. 세심하게 묘사된 예술품과 아름다운 공간, 기이하고 재미있는 일화들은 이를 담은 작은 액자에 불과하다. 이 책은 미술관 액자 속의 또 다른 아름다운 치유의 예술처럼, “이상하게 한두 시간 동안이라면 고통스러울 일도 아주 다량으로 겪다보면 견디기가 수월해진다.”며 조용한 깨달음을 독자들에게 조곤조곤 나눈다. 마치 갤러리 안에서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처럼.

 

브링리의 이 회고록은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동시에 좀 더 가벼운 이야기들을 원하는 독자 또 그가 예술을 대하는 인사이트를 엿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저자의 웹사이트를 방문해 그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설명하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직접 찾아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