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이 미국 시장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한 것은 ‘Perfect Night’다. 물론 이 노래는 K-팝의 100% 영어 노래로 멜론 월간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한국 차트에서도 이례적인 성과를 냈다. 이전에 방탄소년단의 ‘Dynamite’와 ‘Butter’만이 달성한 적이 있는 기록임을 감안하면, ‘Perfect Night’가 얼마나 넓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매력이 미국 시장에서도 게임 ‘오버워치2’와의 연계 등 약간의 실마리가 주어진다면 싱글 자체에 대한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포티파이의 미국 주간 차트 159위를 기록하며 스트리밍 잠재력을 확인하고, 이는 빌보드의 핫 100 진입을 목전에 둔 노래를 대상으로 하는 버블링 언더 핫 100에서 19위에 오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최근 K-팝이 정교한 안무와 강렬한 사운드라는 전통적인 구성에서 이지리스닝 혹은 칠(chill) 분위기로 전환되고, 이 변화 혹은 최소한 다양성의 확대를 여성 그룹이 주도했다는 인식이 있다. 특히 이지리스닝과 미국 시장에서의 성공 사례라는 키워드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요컨대 ‘Perfect Night’는 최근 관찰된 성공의 교집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EASY’는 등장부터 ‘Perfect Night’를 집약하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라틴 팝, 저지 클럽 등 장르적 재료가 이번에는 힙합이라는 인식은 말 그대로 분류 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FEARLESS’, ‘ANTIFRAGILE’,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등으로 동세대 K-팝 여성 그룹 안에서 청각적 자극이 강한 한쪽에 서 있던 팀이 ‘Perfect Night’ 이후 좀 더 듣기 편한 방향을 택한 것이 더 크다. 그렇다고 특정 장르, 특히 그 안에서도 최신 흐름을 적극 채용하는 방법을 버린 것도 아니다. 힙합은 이런 전환과 유지의 교차점에서 나온 결과이지, 원인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덕에 라틴 팝처럼 이국적이라거나, 저지 클럽처럼 댄스로 설득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긴 하다. 하지만 ‘EASY’의 감각적인 편곡과 사운드 구성은 잠재력이 있고, ‘Perfect Night’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좀 걸릴 뿐이다.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변화를 보인다. 데뷔 이후 견지한 두려움 없는 강인함이나 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의 승인까지 필요 없다는 태도가 ‘내가 하는 일이 쉬워 보인다면 내가 그렇게 보이도록 했기 때문’이라는 자기 확신으로 발전했다는 시각도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아티스트의 인터뷰, 소셜 미디어 포스팅 등을 통하여 드러나듯이 세상의 잔인함을 알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기로 결정하는 전환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요컨대 최근 K-팝이 보여주었던 또 하나의 경향이, 전통적인 ‘팬 송’ 정도가 아니라, 아티스트 본인의 정서를 드러내는 메타인지 혹은 제4의 벽을 깨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러한 자기 고백으로 어려움에 대한 공감을 얻기 쉽지 않기도 하다. ‘EASY’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미묘한 균형이다.
이렇듯 ‘EASY’는 쉽지 않다. 팝 음악으로서의 보편성은 생각보다 복잡한 고민을 요구한다. ‘EASY’는 잘 해냈고, 잘 해내는 중으로 보인다. 지난 2월 23일, 금요일에 맞춰 나온 ‘EASY’의 영어 버전 공개 이후 첫 주간 스포티파이 미국 주간 차트 117위다. 그리고 빌보드 싱글 차트 HOT 100에 99위로 차트인했다. 일본에서도 주간 판매량 10만 장을 넘기며 1위에 오르는 등 K-팝 걸그룹의 한국어 앨범으로 기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다음은 4월 코첼라 밸리 뮤직 & 아츠 페스티벌 무대이고,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올해 여름 우리가 미처 몰랐던 르세라핌을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