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브의 ‘쇼! 음악중심’ 라이브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미니 2집 ‘ASTERUM : 134-1’의 초동 판매량 하프밀리언 달성. 그리고 마침내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의 1위 등극. 더 현대 서울에서 열린 팝업 스토어에서는 총 2만 명의 방문객들이 다녀갔다. 이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 버추얼 보이그룹 플레이브가 1년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록들이다. 멤버 전원이 작사, 작곡 및 프로듀싱은 물론이고 안무 창작까지 가능한 플레이브는 각자 정해진 포지션이 있긴 하나 딱히 구분을 두진 않는다. 바로 이 능력치를 통해 플레이브는 거부감을 살 수도 있는 버추얼 기술을 뛰어넘어 대중의 새로운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 독특한 그룹의 강점은 단연 라이브 영상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여러 가지 한계로 모든 음악 방송에 나올 순 없지만, 그만큼 출연할 때마다 버추얼 아이돌이라는 장점을 십분 살린다. 가령 무대 위와 가상의 배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거나, 공중으로 떠오른다거나, 따로 떨어져 있던 멤버들이 한순간에 모여든다거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버추얼 아이돌이어서 가능한 이 굉장한 연출이 극대화된 영상은 1위를 차지했던 2024년 3월 9일의 MBC TV ‘쇼! 음악중심’의 ‘WAY 4 LUV’ 라이브 영상이다.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중간계 ‘아스테룸’에서 ‘테라(지구)’의 무대로 뛰어드는 모습을 시작으로, 멤버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멤버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지거나 공중에서 떨어지고 순식간에 배경이 전환되는 등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연출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연출은 곡이 주는 분위기와 자연스레 어우러져, 그들만이 줄 수 있는 ‘감성’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낸다. K-팝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 플레이브. 하지만 그들은 이제 겨우 한 발짝만을 내디뎠을 뿐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이 다섯 명은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데려가줄 것이다. 앞으로 이 다섯 명이 이끌어갈 신세계에는 무엇이 있을지, 매우 기대하며 지켜보는 중이다.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오당기)’ (빠더너스 BDNS)
송후령: “대먹방 홍수의 시대에 나는 과감히 먹지 않겠다. 하지만 먹기 전까지의 그 과정을 내가 굉장히 열심히 준비를 해보겠다.” 문상훈이 말한 콘텐츠의 기획 의도처럼,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이하 ‘오당기’)’는 제목 그대로 ‘기다리는’ 시간을 정직하게 담는 데에 집중한다.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으로 시작해,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대개 자각 없이 흘려보내곤 하는, 아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시간 동안 ‘오당기’는 꽤나 많은 것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지리 일타 강사, 군인 등의 ‘부캐’로서 먼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 문상훈은 ‘오당기’ 시즌 1을 시작하며 자신의 오랜 취향을 밝히거나 내밀한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인간 문상훈’의 모습을 꺼내보이는 시도를 했다. 또한 시즌 2부터 그는 인터뷰어가 되어 한정된 시간 내에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시인 이훤이 “자신과 타인에게 상훈은 그동안 지어온 집의 일부를 떼어서 다 내어주는 인터뷰어”라고 ‘오당기’의 추천사에 쓴 표현은 이 토크 쇼의 매력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이를테면 가수 아이유가 게스트로 출연한 시즌 4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문상훈은 ‘아이유의 빵 철학’과 같은 구체적인 취향부터 ‘아이유’와 ‘이지은’을 어떻게 분리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까지 이끌어낸다. 이러한 밀도있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동력은 좋아하는 마음은 거름망 없이 내비치면서도, 정확하게 묻고자 하는 문상훈의 질문 방식일 것이다. 그는 작사를 할 때 대중성을 어떻게 고려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지은 님의 세계가 깊다.’ 근데 말이나 가사로 표현할 때 요거를 그대로 내밀면 물에 빠지는 사람이 많을 수 있으니까 (수위를) 조금 올려서 첨벙첨벙을 할 수 있게 즐길 수 있게 하시는지.”라는 언어로 바꾸어 표현한다. 그렇게 두런두런 이어진 대화 끝에, 이 콘텐츠의 댓글 창에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오글거린다.’는 방패 아래 숨겨뒀던 솔직한 면을 내보이고, 그만큼 다정한 언어로 화답하는.
‘키메라’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그에게 이승은 연옥과도 같다. 아르투(조쉬 오코너)는 죽은 연인 베니아미나(일 비아넬로)에게, “여기 없는 여자”에게 닿을 통로를 찾는다. “키메라 상태”의 아르투가 밭은 숨을 쉬다 쓰러진 땅 밑에는 유물이 있다. 수맥 탐사가, 도굴꾼인 남자는 남루하고 고독하다. 갱단은 돈이 되거나 돈으로 환산조차 불가한 부장품을 감각하는 아르투를 리더이자 화수분으로 삼지만, 그는 더울 때 수감되어 추울 때 출소한 단벌의 전과자, “내 잃어버린 여자”가 있는 지하의 문을 뒤지느라 부랑하고 “좀도둑인 척”하는, 다른 골몰을 하는 이방인이다. 베니아미나의 자리는 베니아미나로만 벌충할 수 있다. 아르투는 에우리디케를 만나려는 오르페우스이되 신화처럼 고상하기까지 하려는 욕망은 없다. 묘지를 일터로 삼고 터부에 개의치 않는 그는 천박하게 사랑한다. 2000년간 봉인되어 있던 에트루리아의 신전으로 이끄는 아르투의 영적 능력은, 그를 드디어 여신상 앞에 세우고 비탄에 잠기게 한다. 오직 용이한 운반 목적으로 주저 없이 석상의 목을 부수는 아르투의 “친구들”, 장물아비의 분부대로 경찰을 사칭해 석상을 가로채는 꼭두각시들, 몸뿐인 석상이기에 “우리 중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화술로 파손마저 승격시키는 경매사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 틈에서, 아르투는 여신상의 얼굴을 애틋하게 매만진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이 첨예한 이권 다툼을 이탈리아의 유구한 “고대 미술품 시장과 고고학적 보물의 불법 거래” 문제로 다룬다. 스스로를 결정권을 쥔 포식자로 착각하는 도굴꾼들은 사실 “더 넓은 예술 시장의 먹잇감”이다. “거대한 시스템의 졸, 수레바퀴의 톱니 하나에 불과”한 그들은 그들이 “배제된 미술 시장의 이익”에 봉사한다. 그리하여 비공개 경매가 열리는 호수 위 황금빛 배에서 ‘완제품’ 여신상을 손에 넣고자 저마다 으르렁대는 촌극을 관망하던 아르투가 여신상의 얼굴을 수장하는 순간, 그는 “문명의 요람”을 해친 오랜 병폐의 역사를 거스르는 예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이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 유산이란 인간에 의해 비싸질 수도 값싸질 수도 없음을 깨닫는 유일한 아르투는 키메라. 인간이 아니다. 험준한 추적을 하는 동안, 그의 감식안은 진귀한 여신상을 감지한다는 이유로 진귀했으나, 그의 눈은 진귀한 여신상을 가격표가 붙는 세계에서 이탈하게 돕도록 거듭난다. 애도로 멎지 않는 사랑의 주인은 세속을 등진다. 이제 아르투는 여태껏 침입했던 무덤의 망자들, 소유 대신 공유하는 여자들이 보인다. 그는 차가운 여신상의 얼굴을 갖지 않는 소임을 마치며, 들렀던 모든 곳을 두고 돌아서야 열리는 입구를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갱도는 영영 닫히고, ‘베니아미나의 실’을 따라간 아르투는 따뜻한 베니아미나와 포옹한다. 자책 없이 불의하고 현시욕 없이 청신한 그는 이질적으로 뒤섞인, 중간에 정착할 수 없는 운명이다. 초월한 키메라는 “여기”에서 말소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
김복숭(작가): 그림 같은 겨울 풍경을 담은 표지와는 달리,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첫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표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짧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소설이지만, 이야기는 여성들이 노예와 같은 삶으로 내몰리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던 1980년대 뉴로스라는 아일랜드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망인이 데려온 싱글맘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남편 그리고 다섯 딸을 둔 아버지인 빌 펄롱이다. 이렇듯 등장하는 이들이 여성이 대부분인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남성이어야 하는가 하는 지점은 꽤 흥미로운데, 작가는 그 이유를 직접 이 이야기의 핵심이 남주인공의 선택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사실 결국 핵심은, 목격한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인가 혹은 침묵할 것인가 중 무엇을 선택했느냐가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막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니까.
조금 덜 무거운 시선으로 읽어본다면,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였는지를 알고 세상에 선행을 베풀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이 책을 세대의 트라우마를 해독하는 약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이 소설은 시작, 중간, 끝이 명확한 서사보다는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에 가까우니, 명확한 엔딩을 기대하고 읽기보다는 그 그림의 디테일을 온전히 받아들여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