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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윤희성,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워너브러더스 코리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왜. 한 인간이 3일 동안 황무지를 질주한 이유인 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9년 만에 등장한 프리퀄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퓨리오사(앤야 테일러-조이)로부터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까지 통과한다. 왜. 이 ‘대서사’는 분노(fury)의 용광로 속에서 되새김질한 why를 제련해 동력으로 삼은 전사(戰士) 퓨리오사의 ‘어제’를 온전히 톺는다. 붕괴한 문명의 보고(寶庫) ‘녹색의 땅’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커 군단 일원에 의해 납치돼 우두머리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의 발치에 조달된다. 자신을 구하러 온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순간을 뜬 눈으로 지켜본 어린 퓨리오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당부와 함께 남겨진 열매의 씨앗은 생명을 상징하는 유산이자 응징의 종자다. 임모탄 조(러치 험)가 다스리는 시타델, 디멘투스가 땅따먹기하듯 점령한 가스타운, 임모탄이 보전하고 디멘투스가 차지하려 하는 무기 농장, 지배의 3대 요새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사륜 트럭 및 이륜구동 차량 145대가 동원된다. 조지 밀러 감독은 전작보다 북돋운 엔진음으로 관객의 고동을 적극 고조시키면서도 몇 번의 숨죽인 정적을 빚는다. 고독의 울림. 퓨리오사가 조용히 곱씹는 과거는 자학과 같고, 침묵으로 일관한 채 시타델의 근위대장에서 사령관으로 올라선 그의 업적은 강간을 피하기 위해 택한 쓸모 있는 정예라는 외길이다. 충심을 연기하며 복수의 때를 노린 퓨리오사는 생포한 디멘투스에게 말한다. “Remember Me”. 질문하지만 묻는 것이 아니다. 퓨리오사는 명예가 아니라 존재를 천명한다. ‘나’를 기억하라. ‘내’가 ‘나’를 잊지 못하듯. 풍요로운 대지가 기원인 ‘나’를. ‘네’가 끝내 망칠 수 없는 ‘나’를. 임모탄의 ‘건강’한 2세를 생산해야 할 족쇄에 매인 ‘아내’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의 퓨리오사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와 포개진다. 퓨리오사가 영겁처럼 반복한 시도, 무저갱의 모래바람이 물들이지 못한 희망으로 ‘오늘’을 지탱하는, “오염되지 않은” 퓨리오사의 도돌이표는 올곧은 지도를 그리고 또 그린다. 사막의 폭풍에서 정진하는 여성이 어떻게 상실 너머의 구원(Redemption)을 찾는가. 묻는 것이 아니다.

EBS ‘돈의 얼굴’ (웨이브, 티빙, 왓챠, EBS 홈페이지에서 스트리밍 제공) 
윤희성: 무작정 외우려 하지 말고 원리를 이해해야 내 것이 된다. 거시적 경제 원리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 ‘돈의 얼굴’은 사명감을 각성한 ‘1타강사’ 같은 태도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월급의 몇 분할을 저축해야 하는지, 당장 무슨 계좌를 개설해 어느 종목에 투자해야 하는지, 몇년 뒤에 얼마를 모아야 노후에 살아남을 수 있는지 온갖 숫자를 내세워 채찍질하는 것이 최근 경제 콘텐츠들의 경향이라면, ‘돈의 얼굴’의 목소리는 느긋하게 느껴질 정도로 침착하고 친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그램은 10년 전 방영된 다큐멘터리 ‘자본주의’의 리뉴얼 요구에 부응하는 차원에서 기획된 방송이며, 이것을 주관한 채널은 교육방송공사인 EBS다. 호소하거나 설득하는 방식은 교육에 적절치 않다. 대신 ‘돈의 얼굴’은 돈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엮어내며 ‘들여다보기’를 참을성 있게 안내한다. 약간의 배려라면, 내레이터이자 이해의 도우미로 염혜란을 기용해 먼 나라의 사례, 다른 시간의 정보들을 끊임없이 현실의 이야기로 소환하는 장치를 장만했다는 정도겠다.

그래서 오히려 중요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왜 지금 시점에 다시 ‘돈’에 대해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1부 ‘돈을 믿습니까’는 레바논의 은행 강도 사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탕의 욕망이 아니라 병원비가 필요한 평범한 시민들이 은행의 인출 제한 사태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 강도가 되어야 했던 이 사건은 화폐 유동성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부다. 은행이라는 발명 앞에 인류가 합의한 ‘신뢰’는 기대만큼 견고하지 않고, 그 믿음이 붕괴되었을때 자본주의는 속수무책으로 무용해질 수 있다. ‘믿음’과 ‘약속’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전제다. 합의된 규칙이 없다면 숫자가 가치를 대변하고, 그것이 결국 삶을 지배하는 현대의 방식은 시스템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5부 ‘코인, 타셨습니까’는 결국 이 합의에 생겨난 균열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돈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이유를 톺아낸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하향식 신뢰 구조가, 그 신뢰를 중계함으로써 존재하는 은행이, 그 기관이 장악한 돈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변칙과 편법을 고안해내는 사람들을 통해 징후가 되었다. 거래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해 탄생한 돈이, 다시 사람들에게 리스크를 권하는 시대가 된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면, 교육방송이 할 수 있는 일은 모쪼록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양질의 교과서를 제공하는 일일 터. 절약과 저축의 태평한 환상이 끝난 시절에 어쩌면 생존을 위한 기초 공부를 할 마음이 있다면 편성이 얼마든 지나간 뒤라도 이 시리즈에 시간을 할애할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OTT 서비스에서 EBS ‘다큐프라임’을 먼저 검색해야 ‘돈의 얼굴’ 스트리밍 버튼을 찾아낼 수 있다는 팁은 꼭 기억하기를. 

파란노을 (Parannoul) - ‘황금빛 강 (Gold River)’
나원영(대중음악 비평가): 지난 5월 7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미국의 엔지니어·프로듀서이자 펑크 음악가인 스티브 알비니(Steve Albini)는 음악 산업부터 스틸리 댄까지 많은 걸 열렬히 부정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 녹음 및 편집에 무척 적대적이었다. 후가공을 최소화해 날것의 현장감을 충실히 기록하기를 중시했던 그가 스틱을 내리칠 때마다 키트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드럼부터 날카롭고 사납게 신경질을 부려대는 전기기타까지 1980~90년대 미국 인디 록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시끄러운 음향을 제조해낸 건 당연지사겠지만, 조금 덜 당연한 건 악기로서의 랩톱이 아날로그 시절 스튜디오만큼의 지위로 오른 동시대에도 알비니의 영향력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그 제한에서 신호와 잡음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할지라는 21세기 인디 록의 요점으로 이어질 텐데, ‘After the Magic’ 이후 정규 4집을 준비 중인 파란노을이 다시금 1인 제작으로 발매한 싱글 ‘황금빛 강 (Gold River)’에서 그가 2020년대 상반기 동안 꾸려낸 묘안을 실감할 수 있다. 목소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소리를 가상 악기로 찍고 이를 의도적으로 지저분하게 왜곡해 거칠고 파삭거리게 들리도록 변조하는 작법은 심화해, 각종 소음의 밀도와 강도를 잔뜩 부풀려 곡을 꽉 채운다. 그렇지만 샛노란 노을빛이 폭발하는 화산처럼 보일 만큼 색채가 과포화된 표지 사진과 제법 닮은 이런 음향은 알맞은 균형점에 도달한다. 부서지듯이 박력 있게 두드리는 드럼과 두터운 노이즈부터 찰랑이는 리프까지 오가는 전기기타에 뒤덮이더라도, 사운드의 저변에서 반짝이는 건반과 낮은 음질로 내지르는 가창에 담기더라도 자신 있게 뻗어나가는 보컬에 담긴 멜로디의 힘 덕이다. 온갖 잡음을 두르고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전송된 신호처럼 망각에 저항하며 “기억의 기억을 기억해” 나가려는 노랫말의 정서가 선율의 급류를 따라 고조될수록, 두세 해 전의 웹을 파란빛으로 드리웠던 노을은 차차 황금빛으로 짙게 물든다. 강변의 풀벌레 울음을 뒤로한 마무리에서 모든 소리가 찬란한 소음으로 터져 나가며 발하는 선명한 광채는, “눈에 남긴 그 일출의 감각을 되새겨” 마법 같은 밤과 디지털 새벽을 지나 찾아올 아침놀을 기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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