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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원,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김복숭(작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JTBC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JTBC)
이희원: 시간 여행을 하고, 꿈으로 미래를 보고, 하늘을 나는, 누구나 한 번쯤 꿈꿔왔던 초능력. 여기, 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도 쓰지 못하는 초능력 가족이 있다. 행복한 과거로 타임슬립 할 수 있던 복귀주(장기용)는 우울증으로 더 이상 어떤 순간으로도 돌아갈 수 없고, 예지몽을 꾸던 귀주의 엄마 복만흠(고두심)은 불면증에 걸려 꿈을 꾸지 못하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누나 복동희(수현)는 비만으로 몸이 무거워져 날 수가 없다. 이 수상한 가족의 비밀을 전혀 모른 채, 재산을 노리고 이 집에 발을 들인 도다해(천우희)는 처음 계획과는 다르게 복씨 집안을 구원할 운명이 되어버린다.
누구보다 다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복귀주. 귀주는 다해를 만난 순간부터 초능력을 되찾는다. 단, 도다해에게만 돌아가고, 도다해에게만 닿을 수 있는 기이한 방식으로. 본래 귀주의 초능력에는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고, 그렇기에 과거의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함정이 있었다. 하지만 다해의 곁에 있던 과거로 돌아가면 다해의 손을 잡아줄 수 있고, 자꾸만 과거를 더 나은 순간으로 바꾸게 된다.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에 벌어진 누군가의 불행, 이를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에 초능력을 ‘저주’라고 여기던 귀주에게, 다해는 존재 자체로 희망이자 구원이 된 것이다. “어떡하지, 내가 널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오만한 초능력자라.” 세상을 구하는 대단한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귀주는 도다해만의 히어로가 되기로 선언한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런 초능력도 없는 다해는 존재만으로 매 순간 귀주를 구한다. 네가 있어 내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는 우리가 모르던 순간마저 서로의 구원’이었던 귀주와 다해. 서로가 서로의 히어로가 되는 드라마의 ‘쌍방 구원’ 서사는 새롭지는 않지만 늘 매력적이다.
귀주가 과거로 타임슬립 했을 때, 모든 것이 흑백인 세상에 다해만이 유일하게 색이 입혀져 보인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딱 한 사람만이 빛나는, 어쩌면 초능력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경험해본 순간. 드라마는 타임슬립이라는 초능력의 순간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의 순간을 묘사한다.

‘프렌치 수프’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식탁에서 호사를 누리는 혀의 영화이기보다 점막에 닿기까지의 정성을 예찬하는 부엌의 영화다. 부부였던 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지멜은 이혼 후 20여 년 만에 ‘프렌치 수프’에서 20세기 초, 20년간 협업한 요리사 외제니와 미식가 도댕으로 다시 만난다. 신선한 채소를 수확하면서 아침을 여는 외제니의 볶고 끓이고 굽는 분주한 손과 익숙하게 공간을 누비는 몸. 요리의 사운드와 동선의 리듬감은 음악 없이 적절한 음악이 된다. 엄정한 연구가 도댕은 성실한 노동자이자 직관을 구현하는 예술가 외제니를 동경하고 사랑해왔지만, 일생 “여름의 태양”을, “타는 듯한 느낌”을 사랑한 여자는 중년을 “가을”이라 여기는 남자의 “아내”이기엔 한 김도 식지 않았다. 동시에 둘은 금세 사라질 것에 온 마음을 쏟고 갈고닦은 기술을 발휘하는 파트너다. 만드는 과정, 눈으로 감탄하는 찰나, 먹는 순간의 기쁨이 아로새겨진 음식은 향락일 수 있다.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방식을 공유하는 관계에 이름표가 붙긴 어렵다. 유라시아 왕자에게 포토푀를 대접하겠다는 도댕과 이를 이해하는 외제니의 모습은 ‘라따뚜이(2007)’가 품은 정신과 닮았다. 도댕은 높으신 분이 아닌 외제니를 위해 준비한 만찬으로, 스러지나 저물지 않는 외제니를 기린다. “‘프렌치 수프’는 브누아 마지멜과 나 사이의 화해였다. 우리는 대사를 통해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퀴진은 옛 연인이 마침내 갈무리한 긴 챕터의 종장이기도 하다.


‘放生会’- 시이나 링고(椎名 林檎) 
황선업(대중음악 평론가): 
대중음악의 범주를 넘어선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 편성의 ‘人間として’를 최근 종영한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드라마 ‘Destiny’의 주제가로 접한 그 순간,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과연 시이나 링고가 가진 음악적 역량의 끝은 어디일까. 더불어 제작사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마니악한 스타일의 곡을 타이업으로 선택한 걸까. 그런 의문을 음미할 새도 없이 갑작스레 발표된 그의 새 앨범은, 팝뮤직의 한계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작품으로 자리하고 있다. 팝과 록, 클래식, 재즈, 탱고 등이 뒤섞여 구축되는 혼돈이 7명의 여성 뮤지션에서 비롯되는 아우라와 맞물리는 모습은, 앨범 초반에 감지되는 어색함과 불친절함을 도리어 먹잇감으로 삼는 팝의 신경지를 보는 듯하다.
남성 뮤지션들과의 듀엣 곡이 주를 이뤘던 전작 ‘三毒史’가 비교적 선배 연차의 음악가들을 향해 전력으로 부딪혀본 작품이었다면, 이번은 비교적 자신의 힘을 빼고 후배와 동료의 방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또한 포인트. 커리어의 동반자나 다름없는 우타다 히카루나 최근 세계적인 붐을 이끌어내고 있는 아타라시이 각코와의 태그도 흥미롭지만, 역시 솔로로서는 첫 도전이 되는 놋치(Perfume)의 이펙터 걷힌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初KOI勝ち’에 가장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단단한 리듬 기반의 디스코 뮤직을 테크니컬하게 소화하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여느 미러볼보다 화려한 빛을 내뿜는다. 어느 때보다 프로듀서로서의 자아를 내세우며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작품. 도대체 시이나 링고는 언제까지 성장해 갈 셈인지. 언제까지 이렇게 음악을 잘할 셈인지.

‘야생 조립체에 바치는 찬가’ - 베키 체임버스
김복숭(작가): 때는…. 지금부터 수백 년 후. 장소는? 미지의 행성 궤도를 도는 달, 로봇들이 지성을 얻고 도망쳐 자리 잡은 곳. 작가 베키 체임버스의 수도승과 로봇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소설 ‘야생 조립체에 바치는 찬가’의 배경이다. 이 부분만 듣고 자연스레 사이버펑크의 암울한 미래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한 당신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유토피아를 논한다. 한 가지 반전 아닌 반전이 있다면,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서술하는 수도승 덱스는 그런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완벽한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갈구한다는 것이다.
얼기설기 진행되는 줄거리의 대부분은 덱스가 느끼는 실존에 대한 위기나 불확실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은 공상과학소설에서 보통 기대할 만한 장대한 모험보다는 로봇과 살아가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베키 체임버스 소설에서 슈퍼히어로 이야기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다른 결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책에서 논하고 있는 철학적 탐구는 절대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언제나 쉽게 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 만하다. 작가가 의도한 이야기의 핵심은 아무래도 현대의 광기를 잠시 멈추고 갈등이 완전히 뿌리 뽑힌 미래를 독자들이 잠시나마 느끼며 숨통이 트이기를 바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 혹은 열심히 향해 달려왔던 목표를 달성했을 때 갑자기 느껴지는 그 공허함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당신이 누구이든, 이 책은 그저 당신이 당신 그 자체로 “있음”에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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