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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성,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김복숭(작가)
디자인MHTL
사진 출처FX Networks

‘더 베어’ 시즌 3 (디즈니+)
윤희성: 우리는 왜 실패하는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샌드위치 가게를 운영하던 형의 죽음 이후 가업을 이어받으려 귀향한 젊은 셰프의 ‘고생담’인 ‘더 베어’는 이 뼈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이야기다. 첫 번째 시즌에서 주인공 카르멘은 실패의 원인을 통제에서 찾으려 한다. 부족한 설비와 자본을 고민하고 마음에 차지 않는 직원들을 다그치고 설득하는 그는 아마도 실패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극도의 훈련과 인내를 통해 고도화된 주방의 규칙에 자신을 맞춰냈던 셰프로서의 경험은 희망이 되어 그를 고문했고, 성공해야만 하는 사람의 매일은 전투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즌에서 카르멘은 운명의 탓을 해보기도 한다.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그는 고약한 우연 때문에 사랑을 잃음으로서 존재의 무력함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일도 삶도 사랑도 예정된 실패의 덫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이 작품의 가장 첫 장면이 카르멘의 패밀리 네임인 베르제토에서 기인한 그의 별명 ‘베어’가 곰의 모습이 되어 자신을 덮치는 악몽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그의 닻이 어디에 내려져 있는가를 말해주는 설정이다. 고향을 떠나도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가족의 이름이란 정해진 운명에 대한 예언서이고, 애를 써도 손에 쥐어지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로 돌아오는 다양한 궤적일 뿐이다. 

리얼리즘 이상이라 평가받는 주방에 대한 묘사, 음악과 편집이 인물의 심리와 동기화되어 휘몰아치는 독특한 연출, 영웅도 악당도 아닌, 그렇다고 평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고약한 인물들을 미워할 수 없게 그려내는 배우들의 재능까지 ‘더 베어’를 칭찬할 수 있는 방식은 너무나 뚜렷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가치는 선명한 장점들보다도 투쟁하듯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고민에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실패하는가.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타협 불가능한 원칙을 써 내려가고, 여기저기 엄수할 규칙을 써 붙여 놓지만 왜 어떤 음식은 부족하고, 어떤 접시는 깨지는가. 그리고 세 번째 시즌에 이르러 작품은 조금 새로운 실마리를 풀어 놓는다. 낡은 샌드위치 가게를 파인다이닝으로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를 불사하는 카르멘에게 실패는, 그렇게 하기로 한 결정에서 시작된다. 불안에 중독된 사람에게 결정의 조건은 성공의 확률이 아니라 움직임의 감각으로 계산된다. 주방을 떠나는 사람, 아이를 낳는 사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으로 레스토랑에 투자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인생의 최종장에서야 확인할 수 있을 실패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 어떤 실패는 완결되지 않음으로서 패배로 기록되지 않는다.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지만 추락하지 않는 인물이 승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행운을 빌어주는 대신에 꼭꼭 숨겨두었던 못난 비밀을 슬쩍 보여주는 친구처럼, ‘더 베어’는 돌아서면 마음에 끈적하게 남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위로의 앙금일 테다. 

‘플라이 미 투 더 문’
정서희(영화 저널리스트):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 인류 최초 달 착륙 성공. 1969년 미국은 그토록 원했던 한 줄의 헤드라인을 역사에 새긴다. 소련을 ‘이긴’ 우주 전쟁의 승자는 전 세계와 대승적 차원의 성취를 나누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플라이 미 투 더 문’은 당연히 자축과 상찬의 영화다. 그러나 느끼한 감읍 대신 해묵은 조작설과 음모론을 전면에 세워 과학, 마케팅, 정치를 절묘하게 배합해 달까지 주파한다. 유능한 마케터 켈리(스칼렛 요한슨)는 미 행정부 고위 관계자 모(우디 해럴슨)에 의해 NASA에 스카우트된다. 후킹의 대가인 그는 실익을 위해 달 탐사 프로젝트의 낭만성을 판다. 국민을 고취하고, 광고를 따내고, 연구 및 개발을 지원할 의원을 설득하는 임무를 막힘없이 완수한다. 연기력을 발휘하며. NASA의 발사 책임자 콜(채닝 테이텀)의 임무는 아폴로 11호를 섬광이 아닌, 달에 발 디딘 첫 번째 인간을 실은 선체의 이름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직한 원칙주의자인 그는 켈리가 미션의 가치를 오염시킨다고 여기다가 켈리 역시 켈리의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목표에 투신하는 중임을 깨닫는다. 윗선은 켈리를 압박해 실패를 대비한 백업 영상 제작을 지시하나, 달 표면 입자마저 흉내 낸 스튜디오에서 와이어에 매달린 사람이 둥둥 떠다니는 장면은 송출할 필요가 없어진다.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가 달에 도착했으므로. 거짓을 파기하는 과정에 동원되는 거짓의 공모를 거쳐, 진실 자체보다 진실을 추구하는 신념에 서로 감화하는 켈리와 콜은 대적하면서 로맨스에 이른다. 가짜 달에서의 키스는 운치 있다. 곧 사라질 비싼 세트장의 처음이자 마지막 쓸모로 제법 훌륭하다. 

‘집이 없어’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집’이란 무엇일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검색하면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뜻이 나오지만 우리에게 집은 건물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무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에 ‘주(住)’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니. 비록 지금은 대부분의 집이 부동산적 가치로만 소구되고 있지만, 부동산으로서의 집을 소유할 수 없는 우리는 언제나 간절하게 ‘내 몸 하나 누일 곳’을 찾아 헤맨다. 여기, 그 내 몸 하나 누일 집이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이 있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약 6년간 연재된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가 곧 완결을 앞두고 있다. ‘집이 없어’의 작가 와난은 2008년 ‘어서 오세요, 305호에!’로 데뷔한 뒤 2013년에 두 번째 장편 웹툰인 ‘HANA’를 4년 동안 연재했다. ‘집이 없어’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어서 오세요, 305호에!’에서는 성소수자들을, ‘HANA’에서는 실험체로 쓰이고 버려진 아이들을 다루며 사회적 의미에서의 ‘집’에 대해 다루었던 와난은 ‘집이 없어’를 통해 조금 더 작은 규모의 집, 그러니까 가정 내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 갈 곳이 없어진 고해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가출을 일삼는 백은영, 어머니의 간섭 때문에 집에서도 맘 편히 쉴 수 없는 박주완,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만 하는 김마리, 어머니의 끊임없는 가스라이팅에 시달리면서도 본인이 가고픈 길을 묵묵히 걸어온 강하라, 이상적인 가정(집)을 꿈꾸던 어머니 밑에 부족함 없이 자라왔던 공민주 등. 이 여섯 명의 아이들은 관계를 맺는 데 서툴어 가끔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그 도움을 또 받으며 그들만의 집을 만들어 나간다. 
‘집이 없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불행을 지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 웹툰을 보는 사람들은 기필코 울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 중에서 이입할 수 있는 가정 문제가 하나는 꼭 나오기 때문이다. 가족들로 이루어진 집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때. 그 시절 우리에게 과연 집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존재했을까? 우리가 집이라고 부를 곳은 어디인가. 와난은 언제나 이 물음에 답해줄 수 있는 만화를 그리고 있다. 

‘마녀들’ - 브렌다 로사노
김복숭(작가): 멕시코 작가 브렌다 로사노의 소설 ‘마녀들’은 두 명의 관점에서 회고록다운 이야기를 풀어간다. 첫 번째는 도시의 현대인 조에의 관점. 저널리스트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친숙하고 사실적인 스타일로 전달한다. 두 번째는 독자들에게는 덜 친숙할 만한 오랜 전통의 산 펠리페 마을에 사는 펠리시아나의 관점. 보다 길고 어찌 보면 두서없을 문장을 통해 시적인 스타일로 풀어가는 스타일이다. 이 둘은 언뜻 보면 공통점이 거의 없는 것 같지만, 이야기의 근간은 아주 가깝게 얽혀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장에서는 누구의 내레이션을 읽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다. 이는 아무래도 저자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독자들은 멕시코 전통 생활에 대한 펠리시아나의 신선하고 새로운 서사(이 책은 원래 스페인어로 되어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마을의 현지 언어로 말하기도 한다.)에 더 끌리게 되며, 그의 멘토 팔로마로부터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책의 많은 부분을 도시 사람 조에의 특권적인 시각에서 공감하며 읽게 된다. 펠리시아나의 이야기는 20세기 중반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아야 했던 실제 멕시코 치유자의 이야기와 궤를 같이하여, 아무래도 조금 더 파격적으로 다가올 만하다. 하지만 두 인물 모두, 이야기 속의 많은 여성들이나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두 적대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다. 느슨하게 짜인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이 소설을 읽어보자. 역경에 직면한 사회에서 개인 그리고 나아가 공동체의 이야기가 가진 힘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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