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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원
디자인MHTL
사진 출처쏘스뮤직

“날씨를 바꿀 수는 없는걸 그렇다면 번개를 쫓는 거야”. 르세라핌의 새 앨범 ‘CRAZY’의 첫 곡 ‘Chasing Lighting’의 내레이션이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내가 아닌 것, 내 바깥의 상황은 바꿀 수 없다. 대신 그중 내가 원하는 것을 “쫓는” 것은 가능하다. 이 결심은 르세라핌 멤버들의 생각을 바꾼다. 곡 시작과 함께 “우리 강아지가 너무 보고 싶어”도 “그냥 참아 시간 날 때 보면 되지 더 중요한 게 있잖아”라고 참던 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보고 싶으면 봐야지, 뭐 어떡해?”라며 “망설이지 말고 설렘을 따르”려 한다. 이것이 르세라핌의 ‘CRAZY’다. “미친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걸 믿는 거”.

“갈릴레오 스스로 심판해 매일” 사람들은 번개를 쫓는 사람들을 미치광이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이 진리라 믿던 지식과 반대되는 진실을 외쳤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앨범의 타이틀 곡 ‘CRAZY’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자신의 선택을 믿는 르세라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뇌속에선 적당히 미치”라 하지만 결국 “몰라 육하원칙 따윈 제길”이라며 “내 답은 make me super CRAZY”라며 미치는 것을 선택한 그들은 “무슨 의미 또 무슨 가치 가능과 불가능”을 모두 “이젠 다 쉿”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Pierrot’에서 “Psycho처럼 장마 속을 run”하고, ‘1-800-hot-n-fun’에서 “I’m not tryna leave until they kick us to the road(쫓겨날 때까지 떠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이든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미친다는 건 결과적으로 마음먹은 대로 사는 것 같지만, 그건 날씨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환경들,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남들과 다른 곳에 서 있을 때 쏟아지는 시선을 “다 쉿” 하는 마음으로 넘어선 의지이기도 하다. 날씨를 바꿀 수 없다면, 나를 바꾼다. 그리고 번개를 쫓는다. ‘hot-n-fun’하게.

‘CRAZY’의 퍼포먼스는 보깅 댄스를 활용해 르세라핌의 ‘CRAZY’가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르세라핌이 지난 앨범 타이틀 곡 ‘EASY’의 퍼포먼스가 결코 쉽지 않은 안무를 쉬워 보이는 것처럼 소화했다면, ‘CRAZY’의 퍼포먼스는 유쾌하고 여유롭다. 멤버들은 퍼포먼스 내내 웃고 있고, “Da da da da” 리듬에 맞춰 마치 몸에 묻은 먼지를 털 듯 상체를 털고,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 올려 손으로 툭툭 쳐내는 동작을 반복하기도 한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쯤이야 손짓 몇 번으로 털어버리고 가던 길 가는 여유다. 비 오는 날처럼 때론 궂은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들을 살아가는 나는 무슨 일이든 여유롭게 웃고 툭툭 털고 지나간다. ‘CRAZY’의 퍼포먼스에서 보여주는 르세라핌의 퍼포먼스는 싸우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한 걸음으로 산책하는 ‘CRAZY TRAILER ‘Chasing Lightning’ 속 르세라핌의 모습과도 겹친다. 쉽지 않은 걸 쉬워 보이게 하는 것을 넘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쾌하게 웃으며 먼지 따위 툭툭 털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 ‘Pierrot’는 한국 댄스 음악의 레전드 김완선의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샘플링하면서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아이유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 아티스트들을 언급한다. 그리고 르세라핌은 자신을 “새 시대의 crazy girls”로 호명한다. “마음이 이상하고, 묘하더라고요. ‘Ending Credit’이라는 노래를 부르시면서 또 새로운 시작을 여신 거잖아요.” 엄정화와 함께 ‘2023 위버스콘 페스티벌’ 무대를 준비하며 김채원이 한 말처럼, 르세라핌이 지금 “crazy girls”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앞에 각자의 방식으로 번개를 쫓으며 시대의 문을 열어준 그 시대의 ‘Girls’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르세라핌의 ‘미침’은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된다. 날씨가 어떻든, 유쾌하게 웃으며 앞으로 가는 것.

힙합, EDM, 록 등이 혼재되며 강한 사운드 중심으로 진행되던 앨범은 마지막 곡이자 허윤진의 자작 곡이기도 한 ‘미치지 못하는 이유’에서 차분한 팝 발라드로 변화한다. “미치고 싶은데 눈치 보느라 이미 늦은 듯해”로 시작하는 가사는 ‘CRAZY’ 이전 르세라핌의 이야기일 수도, 곡명처럼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무언가를 미쳐도 좋을 만큼 사랑한다 해도 주변을 돌아보면 미치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FEARLESS’를 마음속으로 되뇌어도 겁이 날 때가 있고, ‘EASY’를 외쳐도 그 과정은 쉽지 않은 것처럼, ‘CRAZY’를 바라도 미칠 수만은 없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이틀 곡 ‘CRAZY’에 등장하는 “Back in the days 미침에 미치지 못했던 me”를 이해하며 “미치지 못한 my youth / Still beautiful”이라고, 미칠 수 있는 삶과 미칠 수 없는 삶 모두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그리고 “미치도록 사랑하면 언젠가 look back and see”, 사랑하는 것을 향해 가다 보면 미치지 못했던 시간들도 돌아보았을 때 무언가 남아 있다. “제 안에 다른 사람이 계속 싸우는 느낌”,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잘 모르겠어요”. ‘CRAZY’가 나오기 전, 르세라핌의 다큐멘터리 ‘Make it look easy’ 속 르세라핌 또한 미치지 못했던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강아지는 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보고 싶으면 봐야지”라고 할 수 있게 됐다. 미치게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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