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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사진 출처그레이시 에이브럼스 인스타그램

오늘날 팝 싱어송라이터 시장은 수많은 테일러 칠드런(Taylor Children)들이 주도한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지난 20년간 쌓아온 팝의 역사를 동경하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음악을 만들고 팬덤과 소통하며 새로운 스타로 거듭나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닮고 싶어 하는 테일러는 컨트리와 포크의 문법을 중심에 놓고 보편의 일상 속 포착한 다양한 소재 특히 스쳐간 인연을 중심으로 내밀한 이야기를 수수께끼처럼 풀어가는 음유시인이다. 진솔하고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이 공식은 SNS의 보편화로 인해 더욱 손쉽게 팬덤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며 더욱 유효한 전략으로 자리매김했다. 켈시 발레리니와 마렌 모리스 같은 신예 컨트리 스타부터 로드, 메이지 피터스, 올리비아 로드리고, 사브리나 카펜터 등 팝스타와 인디 싱어송라이터 피비 브리저스까지 테일러의 영향은 거대하다. 관건은 어떻게 테일러의 유산을 슬기롭게 활용하여 독특한 본인만의 개성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레이시 에이브럼스는 테일러 칠드런의 세대 중 가장 돋보이는 모범 사례다. 저명한 영화감독이자 제작자 J.J. 에이브럼스의 딸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예술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출 수 있었던 그는 2019년 인터스코프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경력을 시작하며 차분한 팝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folklore’와 ‘evermore’ 프로젝트에 함께하며 새로운 경력을 선사한 밴드 내셔널의 아론 데스너와 함께 EP ‘This Is What It Feels Like’부터 함께하는 기회를 얻었고, 이 인연은 데뷔 앨범 ‘Good Riddance’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역사적인 ‘디 에라스 투어’의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올해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The Secret of Us’의 기세가 대단하다. ‘디 에라스 투어’의 무대에 서는 동안 틈틈이 앨범을 예고하고, 미공개 신곡을 공개하며 스위프티스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그레이시는 올해 6월 발표한 이 소포모어작으로 자신이 세웠던 대부분의 기록을 경신해 나가며 커다란 성공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앨범은 빌보드 200 차트 2위까지 올랐고, ‘I Love You, I’m Sorry’와 ‘us.’, ‘Risk’, ‘Closed To You’ 등이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진입했다. 제67회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이미 신인의 이미지는 떼어버린 지 오래였다. 결정타는 올해의 마지막 히트 싱글로 기록될 ‘That’s So True’다. ‘The Secret of Us’의 디럭스 버전에 수록된 이 노래는 현재 빌보드 핫 100 차트 정상을 향해 돌진하며 6위까지 올랐다. 폭발적인 스트리밍과 소셜 미디어 바이럴을 일으키며 오랫동안 굳어졌던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장세를 기록하는 곡이다. 이 노래의 히트에 힘입어 ‘SNL’ 무대에 데뷔한 그는 이제 정상을 다투는 팝스타다.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성공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 동시에 그가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기회를 영민하게 활용하여 고유한 자아를 개척하고 세웠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핵심은 그레이시가 테일러를 재창조하고 테일러에 헌사를 바치며 마련한 본인의 음악 보금자리가 오히려 오늘날 팝 팬들에게 새로운 공간이자 대안의 휴식처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레이시의 음악 세계와 가장 큰 성과를 안겨주고 있는 싱글 ‘That’s So True’의 히트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레이시는 절친한 작곡 동료 오드리 호버트와 함께 떠나간 연인에 대한 후회와 그의 곁에 있는 새 사람을 향한 경고를 ‘That’s So True’로 완성했다. 곡의 주제는 테일러 칠드런들의 단골 소재로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그레이시의 전체 경력에서는 다르다. 아론 데스너와 함께 만들어온 그레이시의 음악은 섬세하게 가라앉는 틴에이지 다크팝을 컨트리와 포크, 미니멀한 전자음악으로 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라나 델 레이, 보이지니어스, 리지 맥알파인, 미츠키, 캐서린 리 등이 주도한 지난해의 ‘새드 걸’ 포크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단순한 편성 위 흩어진 인연과 홀로 남겨진 인간관계, 뿌옇게 흐려진 자아를 고백하는 쓸쓸한 절규가 지금까지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음악이었다.

이에 비해 ‘That’s So True’는 그의 경력에서 상당히 독특한 곡이다. 선명한 멜로디 구조와 합창을 유도하는 코러스를 삽입하고, 고양감 있는 리듬을 삽입해 모두가 발을 구르며 따라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췄다. 서사에 몰입하기 전에 우선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의 힘이 있다. 이는 ‘The Secret of Us’ 앨범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음악적 성장과도 맞닿아 있다. 컨트리의 영향을 짙게 가져가는 ‘I Love You, I’m Sorry’, 잭 안토노프와 아론 데스너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의 도움을 받아 만돌린과 멜로트론, 신시사이저의 조화를 이룬 파워 팝 ‘us.’, 앨범의 문을 닫는 신스팝 ‘Close To You’ 등 다양한 장르가 자칫 모노톤으로 침잠하기만 할 뻔했던 아티스트의 세계를 총천연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레이시는 ‘That’s So True’를 모두의 곡으로 만들기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전략을 세웠다. 기타를 메고 무대에 선 것이다. 현재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감상은 긴 시간 반복되어 온 신곡 발표 후 감상의 수동적 양상에서 곡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음악가와 팬이 공유하며 함께 완성한 노래를 감상하고 즐기는 준비된 파티 현장과 가깝다. 팬들은 싱글 정식 발매 전 이미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숙지하고 있으며, 빠르게 곡의 포인트를 짚어 SNS에서 유행을 창조한다. 이 노래가 일찍이 틱톡을 점령하고 알파 세대의 송가로 자리 잡은 비결이다.

곡의 정식 발표 전부터 팬들은 ‘That’s So True’의 무대를 촬영한 영상을 음원으로 소비하며 소셜 미디어 바이럴 콘텐츠를 제작했다. 인터스코프 A&R 샘 리벡은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곡 발매 전부터 이 노래를 가수의 커리어 하이라이트가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는 라이브 무대에서 그레이시의 코어 팬덤이 보여준 폭발적인 반응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보통 앨범을 공개하고 며칠 혹은 몇 주일 내로 공개되는 디럭스 버전의 관행을 생각하면 그레이시가 가진 3개월의 공백은 ‘디 에라스 투어’를 비롯한 수많은 실황 무대에서 ‘That’s So True’를 널리 알리기 위한 홍보 기간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That’s So True’를 수식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간소화다. 팝스타의 새로운 싱글을 알리는 영상이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입을 클로즈업하여 비추는 단순한 뮤직비디오와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의 실황, 가사 비디오가 전부다. 라이브의 경험을 팬덤과의 유대감으로 확장하여 커다란 송가로 만들고자 하는 아티스트의 의도가 투명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제대로 적중하고 있다.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모습은 2024년 팝 음악 시장을 관통하는 ‘진정성’에 대한 갈망과도 맞닿아 있다. 이제는 전 인종과 세대, 성소수자들의 입장까지 대변하며 저변을 넓히고 있는 컨트리 음악이 악기를 들고 노래하는 아티스트의 진솔한 고백을 담는 도구로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다. 공교롭게도 올해 빌보드 차트에서 선전한 남성 아티스트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빌보드 핫 100 차트 19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샤부지와 브루노 마스, 호지어, 포스트 말론이 그들이다.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테일러의 공식을 바탕으로 대안의 팝을 펼쳐나간 것과는 다른, 보수적이나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그레이시 에이브럼스가 아이콘으로 거듭나는 오늘날의 모습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대중의 수요와 더불어 테일러의 아이들 중 가장 정통적이고 직관적으로 선배의 초기 경력을 오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 Secret of Us’에 눌러 담은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비밀은 특출나지 않다. 사랑에 슬퍼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며, 우울함에 빠지는 미국 틴에이저들의 감정 파고가 규칙적으로 휘몰아친다. 번득이는 부분이 있으나 이미 존재했고, 계속 존재할 음악이라는 비판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아직은 물음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그레이시 에이브럼스는 팝스타의 자격을 갖춘다. 독특하고, 새롭고, 과감한 음악이 세대를 대표하고자 하는 이 시기에 향수를 자극하며 잔잔한 분노와 서정적인 위로를 건네며 파고드는 음악의 힘은 시대를 아우르는 힘과 있는 힘껏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공연의 미학을 다시금 조명한다. 찰리 XCX, 채플 론, 사브리나 카펜터의 해를 마무리하는 반동 인물 그레이시 에이브럼스의 비상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천천히 되짚어보게 한다. ‘That’s So True’,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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