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LA에 처음 도착한 이의 시선을 붙들어 매는 두 가지가 있다. 훌쩍 큰 야자수들과 끝없는 대형 광고판의 행렬이다. LA에선 어딜 가나 이 두 가지를 보게 된다. 더위를 식혀줄 것만 같은 야자수와 달리, 대형 광고판들은 공개 예정인 영화와 시리즈, 상품들을 끝없이 전시하고 있어 처음 그곳에 발을 딛는 이에겐 모종의 압박감마저 준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도 이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여행자와 엘리자베스가 다른 점은, 그가 대형 광고판에 자신의 이미지를 싣기도 하는 유명 배우란 사실이다. 엘리자베스는 많은 배우들이 꿈꾸는 아카데미 수상자이며 30년 동안 피트니스 방송 프로그램 ‘스파클 유어 라이프’를 이끌어왔다. 그리고 그는 이제 막 50세가 되었다.
생일날 프로그램 하차 소식을 모욕적으로 들은 엘리자베스는 초라한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가 대형 광고판에서 자신의 치약 광고가 제거되는 모습을 목격한다. 2연타 충격에 빠진 사이 자동차 추돌 사고까지 벌어진다. 이윽고 카메라는 엘리자베스가 병원복을 입고 마르고 건조한 등을 드러낸 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비춘다.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엘리자베스는 “내 인생을 바꿨어요.”란 메모와 함께 USB를 발견한다. 누군가가 넣어둔 USB엔 “더 나은 버전의 나”를 탄생시키는 약물에 대한 짧은 영상이 담겼는데, 7일은 “더 나은 버전의 나”로 살고, 7일은 본래의 나로 살아가게 한다는 이 약물의 이름은 영화 제목과 같은 ‘서브스턴스’다. “더 나은 버전의 나”로 살아가는 동안 본체의 척수액, 즉 안정제를 주사하기만 하면 안전하게 새로운 나로 살아갈 수 있다고 영상은 설명한다. 그 영상은 웹이 아닌 USB로 옮겨지지만 여느 쇼츠, 여느 ASMR처럼 간결하고도 단도직입적이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은 영상과 SNS의 시대에 우리가 더 빠르고 강력하게 외모지상주의의 포로가 될 수 있음을 은밀하게 시사한다. 특히 이 영상은 서브스턴스 체험 과정에서 어떤 고통과 부작용이 수반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데 마치 SNS나 성형 앱이 드라마틱하게 외모가 나아진 사진과 과거 사진을 붙여놓아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후유증이나 정신적 영향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원리와 비슷해 보인다. 게다가 등을 가르고 또 다른 내가 태어나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루는데도 인간 신체와 연관이 없는 달걀노른자를 통해 위험성을 축소하려 든다는 점이 이 영상의 가장 유독한 면이다.
‘서브스턴스’는 이처럼 외모지상주의와 에이지즘에 대한 공포 영화지만 무엇보다 보디 호러 장르다. “더 나은 버전의 나”인 수(마가렛 퀄리)의 탄생 신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활성제를 주사한 엘리자베스는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지고 이내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탄생한다. 한참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던 수는 자신의 탄생으로 인해 엘리자베스의 등에 난 상처를 수습하고, 성공적인 교대 생활을 위해 엘리자베스의 육체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빠르게 익힌다. 카메라는 이 과정을 집요하게 담는다. 엘리자베스와 닮은 듯 다른 “더 나은 버전의” 수는 이후 엘리자베스의 후임을 찾는 오디션에 선발돼 할리우드의 신성이 된다. 하지만 관객은 불안하다. 초반에 제시된 규칙을 어길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우려는 현실이 된다. 수의 일주일 제한 시간은 ‘보그’ 커버 촬영 등으로 7일을 넘긴다. 대중에게 사랑받으려는 수의 끈질긴 욕망은 더 큰 스포트라이트를 원하고 수는 엘리자베스의 육체가 가진 힘을 무리하게 뽑아쓰기에 이른다. 더 나은 실루엣을 위해 항상 신체를 조이는 지퍼에 시달리던 엘리자베스의 쓸쓸한 등은 "더 나은 버전의 나", 즉 자기 자신에 의해 상처를 입고 곪아간다. 외모지상주의의 슬픈 단면은 나를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존재가 바로 나란 사실이다.
이 영화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여성에겐 호러, 남성에겐 코미디’란 표현이다. 유쾌하게 소비하는 이들은 레딧과 같은 커뮤니티에서 ‘서브스턴스’ 남성 버전이라며 나이 있는 남성 배우와 그와 닮은 젊은 남성 배우를 붙여보는 가상 캐스팅을 벌이고, 수가 엘리자베스의 폭식 흔적을 보고 “Control yourself”라고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 “통장 잔고를 볼 때 내 모습”이란 캡션을 단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서브스턴스’가 무섭고 슬픈 영화라는 리뷰를 게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된 정서는 슬픔이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서브스턴스’에서 비애를 읽어내는 한국 관객들이 수의 대형 광고판을 보며 끊임없이 외모를 점검하던 엘리자베스에게서 지하철 곳곳에 게시된 성형 광고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을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니’란 친근한 호칭이 붙었거나, 마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커뮤니티라는 듯 ‘톡’이라 명명된 성형 앱이 널리 이용되는 풍경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브스턴스’의 출발점은 파르자 감독의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라 관객의 젠더, 경험에 따라 영화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감독은 “40대가 되자 내가 지워질 것 같고 사라질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TIFF Q&A).”고 고백한 바 있는데, 그 내면의 불편함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 변주에 변주를 거듭한다. 특히 자기대상화, 신체 모니터링 등의 외모지상주의의 어두운 면은 거울과 문고리 등을 통해 재차 반복되며 강도를 더한다. 교통사고 후 병원 앞에서 조우한 옛 친구 프레드는 엘리자베스가 가장 취약한 상태임에도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고 상찬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와의 저녁 약속 전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신체를 한참이나 모니터링한다. 그러다 창밖 수의 대형 광고판을 보고는 무언가를 느낀 듯 다시 거울 앞에 선다. 신경질적으로 화장을 고치고 나갈 채비를 마치지만 이번엔 문고리가 그를 멈춰 세운다. 엘리자베스는 금속 문고리에 비친 모습을 보고 다시 거울 앞에서 얼굴에 손을 대다 자신의 얼굴을 할퀴며 무너져 내린다. 결국 그는 신체 모니터링의 굴레에 빠져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현상을 과장화(awfulizing)라 한다. 엘리자베스는 외모로 인한 나쁜 시나리오를 만들고 홀로 눈덩이처럼 굴리면서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굴욕적인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우울에 사로잡혀 등을 초라하게 굽힌 채 침실에 스스로를 감금하기에 이른다.
영화에 대한 평은 다양하지만 의견이 모아지는 단 하나가 있다면, 바로 배우 데미 무어의 연기력이다. 젊고 아름답지만 본체를 갉아먹는 또 다른 나를 인생에서 제거해버리고 싶은 감정과 눈부신 미모를 유지한 채 영원히 살고픈 캐릭터의 진실한 이중성을 무어는 훌륭하게 세공한다. 수의 착취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팔다리가 곱아든 채로 눈을 뜬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 체험 종료를 선택하는 신에서 무어는 천의무봉의 연기를 보여준다. 엘리자베스는 심한 분노에 휩싸였다가 막상 수를 영영 떠나보낸다 생각하니 일순간에 두려움을 느끼고 수를 흔들어 깨우는데, 무어는 부드러운 표정과 상냥한 목소리이지만 초조함이 비치는 탁월한 연기를 펼친다. 노쇠한 엘리자베스를 연기하기 위해 6~9시간씩 특수분장을 하고 1~2시간 정도밖에 촬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표정과 감정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작품으로 무어는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생애 처음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안았는데, 후보 지명 자체가 영화 연기로는 ‘사랑과 영혼(1991)’ 이후 오랜만의 일이다.
‘서브스턴스’는 외모지상주의를 겨냥하며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나 동시에 모호한 충동으로 가득한 영화 매체 본연의 매력을 뿜어낸다. 이때 영화를 두텁게 만드는 중추 역시 무어다. 영화 자체가 할리우드 스타 데미 무어의 삶과 포개지면서 복잡한 맥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990년대 여배우 중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던 무어는 2000년대 들어 커리어 하락세를 겪었다. 특히 그 시기 16세 연하 연인 애쉬튼 커쳐와 함께할 때 그는 젊어 보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에 관해서만 집중 관심을 받았다. 무릎 피부까지 신경 쓰며 무릎 리프팅 시술을 받았다는 소문, 7억 원을 들여 전신을 성형했다는 이야기가 그의 주위로 넓게 퍼졌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무어를 둘러싼 소문은 젊음을 갈망하는 엘리자베스의 형상과 한 덩어리가 되면서 영화 속에서 현실과 픽션이 묘하게 뒤섞인다. 엘리자베스가 거울을 볼 때, 관객은 엘리자베스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카메라 앞에 선 무어의 내면을 보는 것 같은 혼종적인 심상을 느낀다. 이때 거울-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서로 뗄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다시 LA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상상력은 오디션에서 수가 남성 심사위원들에게 들었던 “모든 게 제자리에 있군.”이란 발언을 비틀어, 수의 “더 나은 버전”이 아니라 이목구비는 물론 신체의 여러 부분이 무작위로 붙은 몬스트로 엘리자수를 탄생시킨다.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놓지 못한 듯 귀걸이를 걸고 새해 전야 쇼 무대에 난입한 그를 둘러싼 끝에 몬스트로 엘리자수와 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엘리자베스만 남아 야자수를 바라본다. 작열하는 태양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LA는 온화한 기후 그 자체다. 엘리자베스는 여성을 향한 오랜 폭력을 상징하는 메두사의 이미지를 하고도 이상하게 편안한 표정이다. 상업성을 은밀하게 숨긴 채 대중에게 환상을 심는 이미지를 확대해 내보이는 대형 광고판과 달리 야자수들은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습인 채로 넓은 이파리를 너울거리며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엘리자베스가 마지막 순간 환하게 미소 짓는 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그것도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보도블록에 안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야자수 덕분이라고 믿고 싶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자신을 괴롭히던 대형 광고판이 아니라 야자수 몇 그루란 점이 러닝타임 내내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던 관객을 묘한 방식으로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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