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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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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회 그래미 어워드를 장식한 베스트 뉴 아티스트(Best New Artist) 부문 후보들의 특별 무대. 벤슨 분, 도이치, 테디 스윔스, 샤부지가 각양각색의 멋진 무대를 선보인 가운데, 대미를 장식한 가수는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밴드 및 가스펠 코러스를 동원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레이(Raye)였다. ‘더 보이스 UK’,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브릿 어워드’, ‘로열 알버트 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를 거쳐 마침내 대중음악계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시상식까지 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지금부터 10점 만점에 1점짜리, 이름도 키도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남자들 중 한 명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미 어워드에서 통쾌하게 ‘Oscar Winning Tears.’를 열창하는 신예 가수에게 객석은 열광과 환호로 응답한다. 가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노래는 뜻깊은 시상식에서 마침내 트로피를 거머쥐는 순간의 감격에 대한 곡이 아니다. 레이는 2023년 첫 데뷔 앨범을 발표하기 몇 년 전부터 이 노래를 간직해왔다. 전 연인이 자신의 음료에 약을 타는 모습을 목격하고 난 후 만든 노래였다. 레이의 회고에 따르면, 범죄 사실을 들킨 남자는 '오스카에서 상을 탄 것처럼' 서럽게 울어댔다고 한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폭력과 학대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음악으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지금, 마침내 그는 대중문화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Ladies and gentlemen, I’m gonna tell you ’bout / One of the many men, name is irrelevant, height is irrelevant / He was a one out of a ten, I wish that I knew it then,”

오늘날 레이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슈퍼스타다. 2023년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발표한 데뷔작 ‘My 21st Century Blues’로 지난해 고국 영국 음악 시장의 최고 영예인 브릿 어워드에서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6개 부문 트로피를 가져가며 새로운 기록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그중에는 시상식의 핵심 부문이라 할 수 있는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가와 올해의 신인 석권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미 어워드에 비유하면 제너럴 필드라 불리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신인, 올해의 앨범 부문을 갓 활동을 시작한 가수가 모두 휩쓴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달 2일에 열린 제67회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레이는 올해의 신인, 올해의 작곡가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바다 건너 미국 음악업계의 인정도 받았다. 지난해까지 2년 동안 앨범과 동명의 투어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루이스 카팔디, 시저, 칼리 우치스, 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무대를 꾸렸다. 특히 테일러 스위프트와는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역사적인 ‘디 에라스 투어’ 오프닝 무대로 연을 맺었다. 그가 BBC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에 이름을 올린 것은 당연한 성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든 곡을 스스로 쓰고, 압도적인 성량의 재즈 및 R&B 보컬과 더불어 신세대들의 취향까지 무리없이 해내는 레이의 재능은 경이롭다. 빌보드 싱글 차트까지 진입한 070 셰이크와의 트립합 히트 곡 ‘Escapism.’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Oscar Winning Tears.’나 블루스 스타일의 ‘Mary Jane.’, 펑크(Funk) 기타 리듬의 ‘The Thrill Is Gone.’이 수록된 앨범과 웅장한 실황 무대에 놀랄 수밖에 없다. 앨범 후반부는 또 어떤가. 댄스홀과 아프로비츠 리듬의 ‘Flip A Switch.’, 또 다른 트립합 ‘Body Dysmorphia.’, 마할리아와의 컬래버레이션이 돋보이는 ‘Five Star Hotels.’ 등 즐길 거리가 넘친다. 흔히 많은 장르를 가져다 놓기만 하는 백화점식 구성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 하는 만능의 감각이다. 8살 때부터 지역 교회를 다니며 음악에 흥미를 느낀 후 10대 시절 내내 스튜디오 세션을 돌며 작사, 작곡을 익힌 오랜 내공 덕이다.

레이의 야심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곡은 2024년 발표한 싱글 ‘Genesis.’다. 3분도 너무 길다고 푸념하는 최근 대중음악 시장에서 7분에 달하는 대곡이다. 재즈, R&B, 힙합을 거쳐 가스펠로 마무리되는 이 곡은 놀랍게도 데뷔 앨범 발매 직전 작업에 착수했으며, 총 3막의 구성을 가스펠 작곡가 마빈 헤밍스, 스타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 샹카 라빈드란, 톰 리처즈 등 베테랑들과 함께 완성했다.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 니나 시몬과 같은 거장부터 레이디 가가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까지 포괄하는 레이는 힙합의 문법에도 능숙하며 빅 밴드 시대와 가스펠과 블루스, 빅 밴드 시대까지 소화한다.

이쯤되면 왜 이토록 다재다능한 가수가 2023년에야 첫 데뷔 앨범을 발표했는지 궁금해진다. 사실 레이는 올해 그래미 어워드 신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다른 후보들처럼 오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열일곱 나이로 자신의 첫 EP를 사운드클라우드에 발표한 해가 10년 전인 2014년이었다. 곧 밴드 이어스 앤 이어스의 리더 올리 알렉산더와 함께 본격적으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고, 폴리도어 레코즈와 계약을 체결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회사는 다재다능한 음악가의 재능을 무시했다. 레이블은 레이에게 2010년대 초중반 차트에서 인기를 끌었던 대중적인 일렉트로 하우스 음악의 백보컬 역할을 강요했다. 조나스 블루, 잭스 존스, 데이비드 게타, 메이저 레이저, 마틴 솔베이지 등 DJ들과의 초창기 경력은 그에게 높은 차트 성적을 보장해줬지만, 음악의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주지는 않았다. 창의력은 리틀 믹스, 리타 오라, 존 레전드, 찰리 XCX 등 음악가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욘세의 ‘라이언 킹’ 사운드트랙 ‘BIGGER’에 참여하는 영광도 안았다.

그런데도 끝내 회사는 냉정했다. 폴리도어는 2021년 싱글 ‘Call On Me’ 발매 후 저조한 성적을 이유로 데뷔 앨범 발매 불가를 통보했다. 당시 그가 소셜 미디어에 눈물을 섞어 고백한 심경은 팬데믹 시기 고통받던 모든 독립 음악가들의 절규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고, 너무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2014년부터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있는데도 앨범은 폴더 안에서 먼지만 쌓인다. A급 음악가들에게 무료로 곡을 제공하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숫자와 통계를 확인한다. 나의 첫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 레이는 폴리도어를 떠나 이듬해 독립 레이블 휴먼 리 소스(Human Re Sources)를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건 음악을 작업할 수 있었다.

레이의 21세기 블루스는 고통과 눈물의 행렬이다.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써도 자본의 논리 앞에 무력해졌던 무명 음악가의 설움과 고행이 음악에 녹아 있다. 레이가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시간의 시험을 버틴(have stood the test of time)” 외침이다.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며, 약물의 힘을 빌리며, 섭식 장애와 수면 부족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생존기다.

“저 다 큰 어른들을 다 울려버릴 거야. 나 같은 여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한 번 봐”라 외치는 ‘Hard Out Here.’, 마약에 중독된 ‘Mary Jane.’, 여성에게 모래시계와 같은 몸매를 갖추도록 압박하는 ‘Body Dysmorphia.’의 이야기는 모두 실화다. 그중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곡은 익명의 프로듀서로부터 입은 성폭행 피해를 고백하는 ‘Ice Cream Man.’이다. “당신은 나를 파멸로 몰아넣었지.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게 날 증명하는 거 같아. 난 여자라는 걸.”** 레이는 어두웠던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더는 물러서지 않는다. 누구도 정상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보낸 어지러운 나날을 똑바로 응시한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나날들의 기억을 후회하지 않는다. 몽환적인 트립합 ‘Escapism.’이 해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여성들의 합창과 함께하는 힘찬 밴드 라이브로 진화하고 있는 이유다.

오늘날 대중음악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서사는 살아남기다. 사회 권력을 거머쥔 기성에 대한 굴복, 좌절과 타협, 더불어 망가진 자아를 극복하고 우뚝 선 소수가 나날이 어두워지는 사회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다. 레이블로부터 버림받은 뒤 고향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다듬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채플 론, 아르바이트 해고 소식에 오열하던 유튜버에서 악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빠져나올 수 있음을 증명한 도이치에 세계가 열광한다.

그 변화의 물결 중심에 레이가 있다. 긴 무명 생활을 견딘 소수 인종이자 여성인 레이는 지독한 투쟁 끝에 알을 깨고 나온 새다. 생존자이자 투쟁가, 계속 고민하는 철학가이기에 가장 내밀한 고통부터 소셜 미디어 시대의 피폐한 인간상, 기후변화와 정치적 이슈까지 폭넓은 이야기를 다루며 세상과 공명하는 음악에 힘이 단단히 실린다. "그들은 내 경력이 끝났다고 말했지. 이제 난 트로피 일곱개를 받았고, 내일 오스카에서 노래할 거야."*** 현지 시각 3월 1일 개최된 제45회 브릿 어워드에서 작년에 이어 통산 일곱 번째 트로피를 거머쥔 레이가 소셜 미디어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다. 살아남은 이들의 21세기 블루스는 이토록 힘이 세다.

**“Everything you did, it left me in a ruin / And no, I didn’t say a word, I guess that proves it / I’m a woman, oh yes.”
***“they said my career was over and now I’m holding my 7th Brit award and I’m singing at the Oscar’s tmr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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