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CE UPON A TIME. WE WERE ALL MAGICAL GIRLS. NOTHING COULD STOP US. (옛날 옛적. 우리는 모두 마법 소녀였다. 아무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일릿의 새 앨범 ‘bomb’ 브랜드 필름이 시작되며 천 위에 자수로 새겨진 문구가 등장한다. 동화 속 전설을 이야기하듯 모든 설명이 과거형이다. 화면이 전환되고 등장한 쓰레기 수거차, 그 안에는 누군가 사용했던 수많은 마법봉이 버려져 있고 건물 안에서는 소녀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오랜 시간 수많은 소녀는 본인 세대의 ‘마법 소녀물’을 보고 자랐다. 마법봉을 사서 잡아보거나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TV 속 마법 소녀를 꿈꾸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어른이 되면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조금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브랜드 필름의 메이킹 필름 속 야나기사와 쇼 디렉터의 설명처럼, 소녀들은 자라며 마주하는 현실 속에 마법봉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마법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영상의 마지막, 아일릿은 마법의 행방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Remember, the magic inside you. (기억해, 마법은 네 안에 있어.)”

그래서 앨범 ‘bomb’은 오히려 평범한 현실의 소녀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는다.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 속 소녀들의 내면에는 마치 ‘little monster’와도 같은 우울, 불안, 두려움이 존재한다. 괴물을 “한입에 다 먹어버릴 거야”라는 가사는 유쾌한 듯 보이지만, 외부로 표출하기 어려운 우울과 스트레스를 종종 음식으로 푸는 현시대 10대, 20대 여성의 현실과도 겹쳐진다. 코러스 파트에서 가성의 보컬에 오토튠이 더해진 사운드로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는 “I don’t wanna know”나, “잔뜩 배부르게 먹고 나면 곧 지나갈 거야”라는 가사는 스트레스를 삼켜 버리겠다는 소녀들의 주문이 아직은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상상 혹은 일시적인 보류에 가깝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타이틀 곡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에서는 상대방에게 “Do you wanna dance?”라는 적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대답은 하나뿐 Say ‘Yes’”라 말하지만, 그 뒤에는 “근데 왜 뚝딱대 / 빌려온 고양이가 돼”라며 아직은 수줍고 확신 없는 마음이 숨어 있다. “데이트도 기세야 / 그게 내 필살기”라며 상대방이 “마법에 걸리게” 주문을 걸어보지만, 사실 이는 상대방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너무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네는 안도의 주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불안한 마음은 ‘jellyous’에서도 확신할 수 없는 상대의 마음에 “혹시나 이게 다 착각이면 어떡해?” 하며 “왠지 모르게 자꾸 불안해” 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마법은 내 안에 있다. 하지만 그 마법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빌려온 고양이같이: 여러 사람이 모여 떠드는 데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덤덤히 있는 경우를 이르는 속담이자 최근 유행했던 ‘밈’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일릿은 계속해서 현실 속 상황을 이겨낼 자신의 마법을 찾는다. “혹시나 이게 다 착각이면 어떡해”라며 “입맛이 없어 먹기 싫어질” 만큼 아직은 불안한 ‘jellyous’의 관계 속에도 “고민은 Back off”,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행복한 망상을 선택한다. ‘oops!’에서 보여주듯, 허물없는 친구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걱정은 3일 뒤로 슝!”이라며 실없이 웃거나 “배 아파 웃다 보면” 고민이 어느새 사라지기도 한다. ‘밤소풍’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우리만의 밤소풍”을 떠나 “다 이뤄볼까 우리”라며 함께 평소 원하던 추억을 만들고, “폴라로이드 찰칵 / 이 순간을 간직해”라며 추억의 소중함을 간직한다. 아무리 자신감 있게 나만의 주문인 “기세”와 “필살기”로 맞서보려 해도, 세상에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네모난 돗자리 쿠키와 버블티”처럼 사소한 행복을 찾거나, 불안해도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보려 노력하거나 혹은 나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소녀들과 손을 맞잡는 것이 어쩌면 우리 안에 숨겨진 마법일지도 모른다. “너랑 있으면 온 세상이 특별해”라는 ‘밤소풍’의 가사 그대로, 소중한 친구와 서로 눈을 마주하고 웃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
그래서 아일릿의 세계에는 활기와 불안, 반짝임과 슬픔이 공존한다. ‘little monster’에서 노래가 시작될 때 깔리는 신시사이저 키보드 사운드와 비트는 곡이 진행될수록 점점 다양한 층위의 사운드로 변화하면서 곡 전반에 점진적으로 다이내믹을 부여한다. 그러나 아일릿 멤버들의 보컬은 “전부 집어삼켜 당장 해치울래 한입 가득”처럼 의지를 표현하는 가사를 아이러니하게도 여린 가성으로 표현하고, “I don’t wanna know”를 반복하는 코러스 파트 역시 힘을 싣거나 밴딩하며 감정을 고조시키기보다 마치 속삭이듯 노래한다. 타이틀 곡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 역시 화려한 스트링 테마와 마치 심장 소리를 연상시키는 듯한 킥 드럼, 로우파이한 질감의 사운드로 몽환적이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음악적 분위기를 구현한다. 그러나 2절에서 “날까 아닐까 / 네 맘속 그 아이”를 노래할 때 하향하는 멜로디와 길게 처리된 보컬의 끝음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레트로 게임 신스를 활용한 ‘jellyous’의 사운드와 빠른 BPM, 박자에 맞춰 “Hey hey hey”와 “Wait wait wait”를 끊듯이 노래하는 멤버들의 보컬은 경쾌함과 설렘을 표현하는 듯하지만, 그런 경쾌함 속에서도 아일릿 멤버들은 “왠지 모르게 자꾸 불안해” 같은 가사를 노래한다. 특히 곡의 후반부에서 고음에서 저음으로 급격하게 음을 떨어뜨리며 노래하는 “Back off / Back off / 내일로 back off”에서 멤버들은 곡 전반의 경쾌한 분위기와는 달리 서정적인 감정을 실어서 노래한다.

지금까지 대중문화 속에서 묘사되는 마법 소녀는 종종 딜레마를 제시하곤 했다. 어리고 연약한 소녀가 마법 소녀가 되어 비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설정은 많은 소녀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했다. 하지만 판타지 속 수많은 마법 소녀들 역시 세상을 구원할지라도 자신의 삶이나 사랑, 우정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bomb’ 브랜드 필름에서 괴물들이 변신한 젤리를 삼킨 아일릿 멤버들은 마법 소녀가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고, 그 전까지 각자의 방 안에서 무표정하게 있거나 눈물을 흘리던 멤버들은 비로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허름한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하던 민주는 문이 달콤한 케이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내 그 문은 깨끗한 문으로 바뀐다. 그때 비로소 민주는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아무리 허름한 문에서 달콤함을 찾아내려 해도 여전히 현실은 쓰라릴 수 있다. 하지만 소녀들의 곁에는 수많은 또 다른 소녀들이 있다. 현실의 불안을 당장 없앨 수는 없어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빌려온 고양이 (Do the Dance)’의 도입부에서 아일릿 멤버들은 손을 잡고 함께 몸을 일으켜 세우고, 검지 손가락만 편 손을 위아래로 뻗은 채 작은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다시 양손을 마주 잡는다. 이는 마치 평범한 소녀들이 함께 손을 모아 마법 소녀로 변신하는 ‘마법 소녀물’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소녀들의 마법은 함께 손잡을 때, 함께 눈을 맞출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마법 소녀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 아일릿이 전하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마법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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