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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권(음악평론가)
사진 출처JayaHadADream 인스타그램

음악의 미래는 예고 없이 도착한다. 대형 혹은 중소 레이블에서, 지하 클럽의 작은 무대에서, 틱톡의 15초 클립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낸 곡 한 줄에서, 미래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다. 영국의 힙합, R&B/소울 씬은 2025년에도 그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영국 아티스트들은 언제나 장르를 흡수하고 재창조해왔다. 단순한 구현이 아니라 지역성과 정체성을 품은 영국만의 힙합과 R&B로 진화했다.

마음 같아서는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끝내주는 아티스트를 전부 소개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될 것이다. 그래서 영국 힙합, R&B/소울의 미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아티스트, 그중에서도 엄선한 6인의 목소리를 좇는다. 만약 여러분이 그들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미래는 가장 조용한 순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포저(Pozer)
런던 남부 크로이던 출신의 포저는 영국 드릴 랩 씬에서 가장 뜨거운 존재 중 하나다. 그의 음악이 처음 인터넷을 통해 퍼졌을 때 많은 이가 ‘이건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영국 드릴의 낮은 베이스와 음울한 사운드, 미국 저지 클럽 특유의 경쾌하고 탄력적인 리듬이 충돌하는, 이른바 ‘UK 저지 드릴’을 통해 리듬의 규칙을 다시 쓰고 있다. ‘저지 드릴’은 이미 익숙한 장르지만, ‘영국 저지 드릴’은 그의 말처럼 포저가 창조했다. 그리고 이 같은 선구적 발자취는 영국의 블랙뮤직 시상식 ‘2025 모보(MOBO) 어워즈’에서 ‘최고의 드릴 아티스트(Best Drill Act)’ 부문을 수상하며 인정받았다.

특히 포저는 드릴이라는 하위문화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드릴이 제공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거리의 일화뿐만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고,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는 이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포저의 음악이 거리와 주류 음악계를 동시에 뒤흔드는 이유일 것이다. 본인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고 싶었기에 감정의 표출구로서 랩을 시작했다는 포저. 크로이던의 거리에서 시작된 한 청년의 목소리가 이제는 영국 전역의 스피커를 울리고 있다. 추천 곡은 ‘Kitchen Stove’, ‘Malicious Intentions’, ‘Shanghigh Noon’. 

제야헤드어드림(JayaHadADream)
제야헤드어드림은 고향인 케임브리지와 가장 큰 음악적 자양분을 얻은 도시 노팅엄을 오가며 영국 힙합 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그는 교사 출신이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에서 범죄학을 가르쳤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시스템을 설명하고, 밤에는 자신의 삶을 음악에 새겼다. 그리고 2023년, 마침내 정규직 교사의 삶을 접으며 전업 아티스트로 전향한 그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신진 아티스트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름부터 시적 상징을 품은 제야헤드어드림은 사회학 전공자로서 심도 있는 주제를 밀도 있게 풀어낸다.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노동자로서 그리고 교사이자 아티스트로서 살아온 경계를 담담히 되짚는다. 자기 연민이나 과장된 허세 따윈 없다. 대신 청자를 직시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있다.

그의 랩은 격정적이지만 차분하며, 냉소적이지만 따뜻하다. 또한 그라임, 개러지, 드릴, 저지 클럽 등 다양한 하위 장르를 넘나들며 장르적 실험과 전통성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절묘하게 구현해낸다.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결도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하고 흑인 청년들에게 창작의 중요성을 말하며, 지역 안에서의 예술 생태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제야헤드어드림은 우리 앞에 놓인 현실 안에서 꿈꾸는 법을 가르쳐주는 래퍼다. 추천 곡은 ‘Stubborn’, ‘Nothing’s Changed’, ‘Twiggy’. 

짐 레거시(Jim Legxacy)
런던 자치구 루이셤 출신의 짐 레거시는 래퍼이자 싱어이자 프로듀서다. 여기 소개하는 아티스트 중 데뷔한 지 제일 오래되었으며, 가장 변화무쌍하고 복합적인 음악을 구사한다. 그는 영국 그라임의 혈통도, 미국 힙합의 그늘도 거부하지 않는다. 힙합과 R&B를 토대로 드릴, 아프로비트, 얼터너티브 팝, 로파이, 이모, 개러지, 그라임, 심지어 볼리우드풍의 음악까지 흩뿌린다. 무엇보다 단지 장르를 섞는 차원의 시도가 아니다. 짐 레거시는 장르의 혼돈 속에서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재건한다. 19살에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The Life Of Pablo’를 듣고 음악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의 결과물이 예측 불허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레거시의 음악을 처음 듣는다면 아마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모/트랩 비트 위로 찢어지는 기타 리프가 흐르더니 갑작스레 저지 클럽 스타일의 드럼이 깔린다. 그리고 그 위엔 마치 랩도, R&B도, 록도 아닌 듯한 보컬이 울린다. 물론 이 모든 혼란은 그가 의도한 장치다. 레거시에게 음악은 하나의 장르가 아닌 자신의 존재 방식을 입증하는 수단과도 같기 때문이다. 올해 발표한 새 믹스테이프 ‘black british music’은 이 같은 사운드 실험이 절정에 도달한 작품(*주: 그가 레이블을 통해 발매한 최초의 앨범이기도 하다.)이다. 그는 ‘black british music’이라는 정체성의 거울을 깨뜨리고, 그 조각마다 감정을 아로새겼다. 레거시의 음악은 오늘날 영국 힙합의 가장 도전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을 엿보게 하는 동시에 진화를 상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추천 곡은 ‘new david bowie’, ‘stick’, ‘block hug’.

조던 아데툰지(Jordan Adetunji)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던 아데툰지는 독특한 음악 유전자를 지닌 아티스트다. 얼터너티브 힙합, R&B, 그라임, 드릴, 하이퍼팝, 글리치, 펑크(Funk), 저지 클럽 등 여러 장르가 불규칙하게 뒤섞이는 그의 음악을 듣다 보면 마치 낯선 언어로 말하는 이를 만난 듯하다. 보컬 면에서도 최초 랩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그리고 여전히 랩도 하지만) 노래 혹은 노래와 랩의 경계에 서 있는 스타일을 주로 구사한다. 오늘날 힙합과 R&B를 넘나들고 두 장르의 경계를 흐리는 싱어송라이터는 많다. 그럼에도 아데툰지의 음악은 확실히 눈에 띈다.

그는 그래미, 브릿, 모보 시상식 후보에 오른 것을 비롯해 여러 매체로부터 ‘영국 대중음악의 미래’ 중 한 명으로 지목되었을 만큼 이미 유명하다. 그러나 단지 히트 곡만 만들어내는 아티스트는 아니다. 그는 철저히 ‘세계관’을 구축해 가는 뮤지션이다. 올해 1월에 발표한 두 번째 믹스테이프 ‘A Jaguar’s Dream’에서도 이 같은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R&B와 하이퍼팝을 병합한 미래적이며 멜로딕한 음악이 마치 애니메이션 배경처럼 어우러졌다. 놀랍게도 그는 실제로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받는다. ‘강철의 연금술사’, ‘나루토’,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들이 음악 세계관 형성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감수성 덕분에 그의 음악은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하나의 경험으로 다가온다. 아데툰지는 종종 틱톡의 세례를 받은 Z세대의 대표 주자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본질은 훨씬 더 깊고 넓어 보인다. 추천 곡은 KEHLANI’, ‘305’, ‘Bitter’.

브룩 콤(Brooke Combe)
스코틀랜드 달키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 연주자 브룩 콤의 음악적 자양분은 놀랍도록 전통적이다. 조부모님이 수집한 클래식 모타운 앨범과 부모님이 좋아했던 1990년대 네오 소울, R&B를 들으며 자란 그는 일찍이 전통적인 소울 음악에 매료되었다. 한때 영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어느 순간 주류 음악계에서는 밀려났던 소울. 콤은 소울 음악을 다시 주류로 끌어올릴 수 있는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백인이 많은 지역에서 자란 콤에게 소울은 단지 음악을 넘어 그의 민족과 유산을 상징한다. 지난 2024년 ‘롤링 스톤 UK’와의 인터뷰에서도 소울을 대하는 이상의 심경을 밝힌 바 있다.

자신이 어렸을 때 듣던 음악을 다시 들려주고 싶다는 포부만큼이나 콤은 만드는 곡마다 세세한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인다. 가령 2023년 믹스테이프 ‘Black Is The New Gold’는 라이브 밴드와 작업하여 테이프에 녹음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인트로 제외) 10곡의 소울풀한 음악으로 채운 정규 데뷔작 ‘Dancing At The Edge Of The World’(2025)는 선배 아티스트인 마이클 키와누카(Michael Kiwanuka)와 레온 브리지스(Leon Bridges)의 작품처럼 올드스쿨 소울 앨범으로 들리기를 원하며 작업했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서적 깊이가 흘러넘치는 그의 보컬이 있다. 탄탄한 음악적 뿌리와 변화에 대한 용기 그리고 진솔한 이야기로 입지를 다져나가는 중인 콤은 지금의 영국 R&B/소울 씬에서 보기 드문 목소리다. 추천 곡은 ‘This Town’, ‘L.M.T.F.A’, ‘Praise’.

엘민(Elmiene)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포드에서 자란 엘민의 음악 여정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2021년 인스타그램에 올린 디안젤로(D’Angelo)의 ‘Untitled (How Does It Feel)’ 커버 영상이 많은 이를 사로잡은 것이다. 디안젤로는 그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였고, 사람들은 엘민의 풍부하고 섬세한 보컬에 매료됐다. 몇 달 후에는 더욱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그의 첫 싱글 ‘Golden’이 버질 아블로(Virgil Abloh)의 마지막 루이비통 쇼에서 울려 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이 곡은 미발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 한 번의 사용으로 세계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엘민은 유명세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보다는 자신이 만든 음악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려서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엘민의 음악은 늘 경계에 서 있다. 개인과 사회, 이주와 귀속, 슬픔과 희망, 어제와 오늘. 그는 그 틈에서 디아스포라의 기억을 되짚고 상실과 치유의 문제를 감각적인 멜로디와 속삭이듯 흐르는 보컬로 녹여낸다. 라이브에서도 돋보인다. 어쿠스틱 기타 한 대를 들고 무대에 오르더라도, 공간은 곧 그가 자아낸 복합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다. 엘민은 ‘2025 브릿 어워드’에서 ‘라이징 스타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는 음악계가 엘민에게 ‘영국 R&B의 미래’로서 기대하는 정서적·예술적 무게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추천 곡은 ‘Someday’, ‘Light Work’, ‘Crystal Tears’.

*Honorable Mention: Reuben Aziz, Saiming, Rigga, Jalen Ngonda, Mnelia, Nia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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