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은 날에는 하루에 3~4편을, 연말에는 온종일 무려 7편의 영화를 몰아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섭렵하는 현민의 모습은 영락없는 ‘영화광(Cinephile)’이다. 현민은 영화를 보며 새로운 감정을 알아가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미래를 상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어린 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무대 위 반짝이는 보이그룹 ARrC의 리더이자, 무대 아래서는 영화라는 취미로 자기 삶의 한 부분을 채울 줄 아는 그의 영화 감상평에는 사람 현민의 삶과 생각이 담겨 있다.

‘로봇 드림’
현민: 103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진행되는 애니메이션이라니! 굉장한 흥미를 느끼며 기대에 부풀었다. 개와 로봇의 우정과 사랑을 다룬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 애니메이션이 단순한 우정과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관계의 시작과 싹틈, 이별과 털어냄을 평범하면서도 진득하게, 복잡하지 않지만 섬세하게 담아냈다. 첫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미숙하다. 하지만 관계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지는 경험 또한 우리가 얻어가는 교훈들이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며 서로의 행복을 위해 서로를 놓아주는, 함께한 추억에서 아픈 부분들이 아닌 행복했던 부분들만 기억하는 것. 나는 그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노래 ‘September’가 흘러나오는 도그와 로봇의 데이트 장면은 나에게 많은 감정과 행복을 안겨주었다. 그 사람은 영원하지 못해도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은 영원하다.)

‘결혼 이야기’
현민: 노아 바움백 감독의 이 작품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사람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슴 아픈 영화다. 부부는 서로 가장 가까운 존재였던 만큼 그 사람의 아픔을 더 잘 알고 있기에, 관계가 틀어졌을 때 그 사람에게 가장 아픈 말이 뭔지, 무엇이 가장 큰 상처로 남을지도 잘 알고 있다. 관계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렵다. 가족의 분열과 가족 구성원들의 각자의 입장 차이, 놓을 수 없는 고집은 서로를 뒤흔들며 상처만을 남긴다. 씁쓸한 영화의 결말에도, 나는 믿고 싶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기에 인간은 존재한다고. 사랑이 살아갈 용기를 준다고. (영화 속 스칼렛 요한슨과 애덤 드라이버의 부부 싸움 장면은 근 6년 동안 본 영화 중 가장 몰입해 봤다.)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
현민: 모험 액션 활극의 전설인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개인적으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1편인 ‘레이더스’와 함께 최고작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성배를 찾아 나서는 인디아나 존스, 존스 박사보다 먼저 성배를 찾아 세계를 정복하려는 나치가 대립 구도를 이룬다. 인디아나 존스의 아버지 역으로 전설적인 첩보 영화 ‘007’ 시리즈의 초대 제임스 본드를 맡은 숀 코너리가 열연을 펼치는데, 제임스 본드 역의 해리슨 포드와 숀 코너리의 부자지간 케미스트리도 영화의 재미를 한층 더한다. (영화 후반부에 평생 성배를 찾아 헤맸음에도 아들을 위해 성배를 놓아버리자고 아들에게 말하는 숀 코너리 경의 눈빛과 연기가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모험 액션 활극 장르를 정말 좋아하는데 ‘구니스’, ‘미이라’ 등과 함께 매년 정기적으로 한 번씩은 보는 영화다. (참고로 어린 시절 동네 도서관 DVD 코너에서 빌려 봤는데 그 당시에는 몇몇 장면들이 정말 무서워 꿈에 나왔던 기억이 있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
현민: 이 영화는 시종일관 웃기기만 하는, 시대를 앞서 나가는 블랙 코미디다. 영국 코미디계의 전설적인 그룹 몬티 파이선의 역작.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우면서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 배우들의 열연,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스토리까지. 그야말로 컬트 코미디의 ‘성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취향에 맞아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효과음, 동작 타이밍까지 외울 정도로 본 영화다.)

‘뜨거운 녀석들’
현민: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대표 3부작 ‘코르네토 트릴로지’의 두 번째 작품인 ‘뜨거운 녀석들’은 런던 경찰 니콜라스가 너무나도 유능한 나머지 시골 마을 샌드포드로 좌천되어 마을의 비밀과 숨겨진 흑막을 벗겨내는 액션 코미디 영화다. 언제나 실망시키지 않는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콤비는 러닝타임 내내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케미’와 ‘티키타카’를 보여준다. 가히 에드가 라이트의 최고작이라 뽑을 수 있는 작품. 가볍게 팝콘을 먹으며 주말 저녁에 보기 정말 좋은 영화다. (영화 후반부 본성을 드러낸 마을 사람들과 맞서는 두 경관의 액션 신이 백미.)

‘빅 피쉬’
현민: 이 영화를 보기 전 누군가가 나에게 멋진 거짓말과 실망스러운 진실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실망스러운 진실을 골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멋진 거짓말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함축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 에드워드가 아들 윌에게 들려주는 모험담은 허무맹랑하지만 그게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허풍쟁이가 아닌 이야기꾼이니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그의 마지막 이야기를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어주는 장면을 보며 언젠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저런 장면이길 바랐다. 아마 내가 죽기 전까지 평생 잊지 못할 결말.) 덧붙여 판타지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팀 버튼 감독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한다.

‘빅’
현민: 우리 모두 어릴 적 한 번쯤 어른이 된 자기 자신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나 역시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거라 상상했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있다. 어릴 적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어른들은 자유롭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본인의 자유와 꿈을 포기하는 값을 치렀다.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될 수는 없으니까.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어릴 적 나의 마음은 잊어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조시는 소원을 비는 기계를 이용해 하루아침에 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아이들 시선에 맞춘 장난감을 만들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주변인들도 그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어른이 된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어른이 된 조시를 통해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알려준다. (장난감 회사 사장과 톰 행크스의 피아노 신은 노인과 아이의 연결된 동심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른 연기를 하는 아이를 연기하는 어른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톰 행크스의 연기력 또한 일품.)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현민: 모든 인간에게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순간이 온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당신은 무엇을 고를 것인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꿈과 이상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들이 생긴다. 영화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경의와 위로를 건넨다. 누군가는 암벽등반가를 꿈꿨으나 실제로는 회계 업무를 하고, 누군가는 조각가를 꿈꾸면서도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고, 타인의 꿈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또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의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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