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18년 동안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러왔다. 에이트(8eight), 옴므(Homme), 미드낫(MIDNATT) 그리고 이현까지. 수없이 많은 계절이 지나는 동안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마음. 계속해서 노래하고 싶다는 진심.
오랜만의 컴백이에요. 최근에 어떻게 지내셨나요?
이현: 거의 집에 박혀 있었어요. 주로 과학 영상들을 보고, 최근에는 애니메이션에 아주 푹 빠졌습니다.(웃음) 콘텐츠는 항상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대중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항상 세상이 어떤 걸 필요로 하는지,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해야 하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경험들이 제 안에 녹아 있어야 노래할 때든, 생각으로든 어느 순간 터져 나온다고 생각해요.
꽤 오래전이지만 2009년에는 ‘맨즈헬스’ 표지를 촬영할 정도로 헬스에 진심이었어요. 그리고 볼링, 낚시도 좋아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최근에는 정적으로 시간을 보내셨네요.
이현: 예전에는 조금 더 활동적이었어요. 쉬는 시간이 생기면 뭐라도 하려고 했거든요. 볼링도 몇 시간씩 치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할 힘도 없고.(웃음) 이제 너무 많은 힘을 쏟으면 다른 것들을 할 여력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20대, 30대 때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생존 같은 느낌이랄까요?(웃음) 그땐 식스팩을 언제 보여줘야 할지 모르니까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30분이라도 더 운동하고 그랬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게 오히려 몸에 더 안 좋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머리가 복잡할 때 운동을 하면 ‘아, 맞다. 이렇게 해결하면 되겠지.’ 하면서 머리가 정화되는 느낌이에요.
유튜브 채널 ‘혀니콤보 TV’에서 진행한 MBTI 검사 결과가 ‘ISFP’인데, 그 유형의 유명한 밈이 집에서 누워 있는 모습이기도 하잖아요.(웃음) 평소 MBTI를 잘 안 믿는다고 하셨지만요.
이현: 아니, 원래 MBTI를 안 믿었는데(웃음) 그래도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됐어요. ISFP가 ‘느긋함의 끝판왕’이더라고요.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웃음)
하지만 사회에서 여러 역할을 소화하느라 집에서 쉬시는 건 아닐까요?(웃음) 걸그룹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JTBC ‘알유넥스트’에서는 항상 개선점을 하나씩 짚는 엄격한 코치였던 반면, 최근 진행하고 계신 MBC 라디오 ‘친한친구 이현입니다’에서는 후배 게스트들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는 ‘삼현이’ DJ인 것처럼요.
이현: 사실 ‘알유넥스트’에서는 일단 콧수염이, 그런 외형이 더 거리감을 만든 게 확실하게 있었고.(웃음) 그리고 저는 유일하게 출연진들과 하이브라는 같은 지붕 아래에 있는 코치다 보니 쓴소리를 하는 역할을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격려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미성년자더라도 모두 프로로서 일하는 게 현실이니까요. 과거에 저도 활동하면서 스스로 안일하게 ‘이 정도는’ 하고 넘겼던 것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회가 될지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이 격려를 해주실 때 저는 개선점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반면 라디오에서는 배려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요즘은 예능 프로그램도 모든 걸 함부로 하기 쉬운 시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많이 놓치는 배려가 라디오에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청취자분의 사연이 왔을 때 최대한 그분의 마음에 와닿게 이야기하려고 고민해요.
유튜브 채널 ‘혀니콤보 TV’에서는 동갑내기 친구들을 만나는 ‘83 유니버스’처럼 다양한 아이디어를 직접 내면서 트렌디한 콘텐츠에 집중했어요. 반면 최근에는 전혀 다른 호흡의 미디어인 라디오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현: 사실 오히려 저는 유튜브를 하면서 콘텐츠화할 만한 아이디어가 저에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무리 스태프분들과 다 같이 만들어 가는 채널이라고 하더라도 저에게 중점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나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반면 라디오는 플로우 자체가 콘텐츠를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이 시대하고는 굉장히 다르잖아요. 마치 넷플릭스에서는 건너뛰기가 가능하지만 영화관에서는 그럴 수 없어서 오히려 영화를 온전히 보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프로그램을 고를 수는 있겠지만 생방송으로 들으면 마음대로 넘길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라디오 진행을 생방송으로 하다 보면 순간적인 말이 생각이 안 날 때가 있어요. 처음엔 그런 부분들이 어렵기도 했는데 이젠 오히려 그게 더 매력적이기도 해요.
스스로를 굉장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네요.
이현: 그건 빅히트의 영향이 있어요.(웃음) 연습생 때부터 잘하는 것보다 부족한 부분을 계속 채워 나가고 연습해야 한다는 기조가 있었어요.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체득했던 것 같아요. 항상 일을 할 때 큰 방향성을 정확하게 알고, 그 안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메타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난 이게 하고 싶어.’가 아니라 ‘난 이걸 할 수 있어.’에 대한. 한편으로는 무대 위에 서는 저든, 사진을 찍는 저든 그 안에서 자신감을 찾을 만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찾아내려고 해요. 오늘 위버스 매거진 촬영에 비유해보자면 ‘현아, 이거 네가 안 해봤던 거 아니야. 과감하게 해보고, 아니면 전문가분들이 알아서 다른 게 어울린다고 얘기해줄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죠.
이번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자기객관화가 있었나요?
이현: 독이(피독 프로듀서)와 방향성을 잡을 때 실험 정신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데 안 해왔던 것들을 한번 찾아보자.’는 목표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굉장히 좋아하고 연습생 때 많이 불렀지만, 막상 잘 보여드리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 R&B를 장르적인 베이스로 잡았어요. 이걸 한 곡만으로 보여주기 어려우니 미니 앨범을 내게 됐고요. 이번 앨범이 장르적으로 매우 참신한 시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시작점이라 할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작사가로서든, 보컬리스트로서든 이현 씨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섯 곡 중 다섯 곡의 작사에 직접 참여하시면서 깊은 성찰을 담은 것은 물론이고, 보컬로는 평소의 폭발적인 가창력을 의도적으로 절제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살리는 데 집중했어요.
이현: ‘이쯤에서 널’을 타이틀 곡으로 정한 건 직관적인 부분이었어요.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거의 100여 곡을 넘게 살펴봤는데,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제 목소리로 좋은 가사와 함께 부른다면 잘 어울리겠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들어본 것 같지만 뻔한 발라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사를 써보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각 트랙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보컬적인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와중에도 이현이 부른 노래라는 건 분명히 전달하려고 했고요. 다행히 이번 앨범을 녹음하면서 ‘아, 나 그래도 좀 늘었구나.’ 이걸 느꼈어요.(웃음)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요?(웃음) 오랫동안 활동하셨는데도 목소리를 정말 잘 유지하고 계시잖아요.
이현: 아니 근데(웃음) 진짜로 선배님들이 노래라는 건 할수록 모른다고, 어렵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최근 몇 년 사이에 그걸 굉장히 많이 느꼈어요. 제 보컬의 신은 루더 밴드로스(Luther Vandross)인데, 튠이 하나도 안 된 그 옛날 라이브를 들어도 ‘우와,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지? 여기서 이렇게 올라가는데도 톤이 이렇게 된다고?’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아, 나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웃음)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웃음) 사실 이번 앨범의 보컬이 정말 섬세하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Day & Dream’에서는 진하고 재지한 보컬이 돋보이는 반면, ‘What’s On Your Mind’에서는 청량하고 가벼운 보컬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트랙별로 다양한 지향점을 보여줘요.
이현: 빅히트 디렉팅의 재미있는 부분은 발성보다 표현과 톤, 느낌을 훨씬 많이 신경 쓴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녹음할 때도 보컬 디렉팅을 해준 슬로우래빗과 “이 부분에서 나는 짜증이 좀 들어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소리가 좀 흔들렸으면 좋겠어. ‘삑사리’가 나듯이.” 이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했어요. ‘Day & Dream’은 처음에는 조금 더 과장되게 불렀는데, 나중에 편안하게 부르는 스타일로 바꾸면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What’s On Your Mind’의 가이드는 원래 엄청 허스키한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가볍게 부르는 게 요즘 문법과 더 어울릴 것 같았고, 독이도 동의해서 트랙 또한 조금 더 손을 봤어요. 그리고 ‘우리의 중력 (feat. 송하영 of 프로미스나인)’은 사실 하영 씨가 살려준 노래라고 생각해요. 여성 보컬 파트가 딱 들어왔을 때 산뜻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독이가 “이건 무조건 노래를 잘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렵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영 씨가 노래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좋아서 녹음이 엄청 빨리 끝났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우리의 중력’이라는 제목도 하영 씨가 정해준 거예요. 저희가 제목을 못 정해서 “혹시 부르면서 제목 생각나는 거 있었어?”라고 물어봤더니 하영 씨가 아이디어를 다섯 개 정도를 보내줬거든요. 그중에서 ‘우리의 중력’이 됐어요. 피처링한 사람이 지어준 제목이에요.(웃음)
‘A(E)ND’라는 앨범명처럼 수록 곡들은 사랑의 다양한 감정을 다루지만, 한편으로는 아티스트로서 이현 씨가 한 막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Tree of Life’ 가사에서 “내겐 물숨 같은 너”는 음악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요?
이현: 그렇죠. 그 노래의 가사에는 중의적인 표현이 많아요. ‘Tree of Life’는 제가 다큐멘터리 두 편을 보다가 쓴 거예요. 하나는 쓰레기를 매립하는 섬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마을에 있는 큰 나무들이 침식되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 되어서 드러난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안 넘어지려고. 그런데 그 모습이 뭔가를 다시 시작하지도 못하고 계속 미련을 갖고 있는 제 모습 같았거든요. 다른 다큐멘터리는 해녀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물숨”이 해녀들 사이에서 ‘욕심의 숨’, ‘죽음의 숨’이라고 불린대요.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수면 아래로 내려가서 쉬는 숨이니까요. 예전에 더 많은 사랑을 받던 저를 갈망하고 더 화려해지고 싶어하는 스스로가 “물숨”을 쉬고 싶어한다고 느껴져서 가사에 쓰게 됐어요. 제가 20, 30대 때 뭘 모르고 활동을 하다 보니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사랑을 받기도 했는데, 그걸 계속 잡고 있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고요. 어느새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놓아주면서, 이제 꼭 화려하게 피는 꽃이 아니더라도 제가 돌아볼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런 성찰이 앨범 전반에 깔려 있는 희망의 기운으로 표현된 것 같기도 해요. 마지막 트랙인 ‘너에게 (마중 pt.2)’의 “이번엔 내가 널 먼저 마중 나갈게” 같은 가사처럼요.
이현: 생각해보니 제가 팬분들을 위해 쓴 노래가 없더라고요. 사실 에이트 친구들이랑 함께 써야 하는데 저 혼자 쓰는 게 맞나 싶은 고민도 있었어요. 에이트 3집 ‘골든에이지 (GOLDEN AGE)’에 ‘마중’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팬 송은 아니지만 에이트 팬분들이 굉장히 좋아해주셨던 노래라, ‘당신들이 항상 나를 먼저 마중 나왔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마중 나가겠다.’라는 의지를 담고 싶었어요. 아티스트가 활동을 뜸하게 하는 건 팬들에게 그냥 가라고 하는 이야기랑 똑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아직도 저희를 기다려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무너진 삶이어도 바꾸기가 싫은 건 널 만나서야”라는 부분은 아직도 제일 울컥하는 가사예요.
여러 고민 끝에도 결국 변하지 않는 마음을 믿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현: 많은 부분들이 바뀌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저의 희망이에요. 지금이 누군가에게는 설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세상이 왈칵 뒤집힐 것 같은 모멘텀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랑도 가벼워지고, AI가 발전한다고 하고. 그런 와중에도 기댈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우주를 그렇게 돌아다니는 이야기를 하고도 결국 결론은 사랑이잖아요. 그게 약간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응원하게 되거든요. 결국 변하지 않는 가치, 사랑이나 우정이 없다면 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하는 세상을 계속 바라보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을 지키려는 거네요. 그러다 보면 이현 씨의 앨범에서 이야기하듯 결국 ‘End’가 ‘And’로 이어지고, “겨울이 끝나고 다시 A tree of life”가 오는 것 같아요.
이현: 이번 앨범을 통해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더 많아졌다는 게 고무적인 것 같아요. ‘나 아직 그래도 여러 것들을 할 수 있네? 더 시간이 지나서 날이 무뎌지기 전에 더 많은 것들을 남겨놓자.’는 욕심이 생기긴 했어요. 물론 이제 여러 상황이 따라줘야겠지만, 이제 여러 아티스트분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해보고 싶어요. 사실 저는 컬래버레이션을 그렇게 많이 했던 가수가 아니에요. 요즘은 정말 많이 하잖아요. 왜 하는지도 알겠고요. 제 부족한 색깔을 채워줄 수 있는 분들과 다양하게 협업해보고 싶어요. ‘혀니콤보 TV’에서 했던 ‘83 유니버스’가 콘텐츠를 위한 것이었다면, 음악적인 부분에서 저의 유니버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교류하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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