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는 왜 끝내 금기를 깨고 죄악을 선택했는가. 엔하이픈의 미니 7집 ‘THE SIN : VANISH’의 콘셉트 필름 Chapter.1 ‘No Way Back’은 뱀파이어가 연인의 목을 물려다 발각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는 단순한 사건의 발단이 아니라, 그간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던 존재가 처음으로 선을 넘는 결정적 장면이다. 그간 엔하이픈의 음악 속 뱀파이어는 필멸의 존재인 ‘너’를 불멸의 존재인 ‘나’와 같은 운명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끝까지 통제해왔다. 직전 앨범 ‘DESIRE : UNLEASH’의 타이틀 곡 ‘Bad Desire (With or Without You)’는 상대방과 함께하기 위해 “영겁 같은 시간을 함께할 저주”를 고민하면서도,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고 싶은 고뇌를 노래했다. 그러나 ‘THE SIN : VANISH’에 이르러 뱀파이어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이는 전작의 수록 곡 ‘Outside’에서 보여준 “너를 지킨다던 의지, 이젠 중요하지 않지”라는 선언에서 암시되었던 선택이기도 하다. 이 선택은 충동이 아니라 각오에 가깝다. ‘Stealer’에서 엔하이픈은 노래한다. “죄가 된다 해도 that’s fine”, “손가락질해도 that’s fine”. 죄가 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상대와 자신을 같은 운명 안에 넣기 위해 선을 넘는 결정. 그로 인한 도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지만, 사랑의 형태는 바뀌었다.

엔하이픈의 서사에서 사랑은 상대의 동의를 전제로 성립해왔다. ‘XO (Only If You Say Yes)’에서 그들은 “무엇이든 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허락의 말”을 구했다. 이번 앨범의 수록 곡 ‘Stealer’의 “규칙을 깬 짜릿함 / 네 표정도 딱 같은 듯한 느낌이야”라는 가사는, 금기에 대한 위반과 도피가 상대방의 동의 하에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도망자들’에서 “달아나는 그들이, 마치 이 순간을 즐기는 듯 웃고 있었다는 것”이라는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THE SIN : VANISH’는 수록 곡 전반에 걸쳐 이 도피극의 주체를 ‘우리’로 호명한다. 그간 엔하이픈의 앨범에서 ‘나’와 ‘너’는 분리된 존재였으며, 화자는 지속적으로 인간성과 욕망의 경계에 선 스스로를 성찰하며 고뇌했다. 반면 ‘THE SIN : VANISH’는 질문의 주어를 바꾼다. 도피의 시작으로서 같은 운명에 올라탄 ‘우리’로.
‘Knife’의 뮤직비디오에서 엔하이픈의 일곱 멤버들은 바버샵, 카페, 주방처럼 일상적인 장소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들은 폴리스라인과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인 채, 자신들을 촬영하는 핸드폰 카메라 앞에서 보란 듯이 춤을 춘다. 초월적 존재인 뱀파이어로서의 자신감은 “너희들은 자꾸 분해서 / 주먹 쥐고 땅에 screamin’” 같은 ‘Knife’의 가사, 강한 타격감의 트랩 비트 위로 저음이 강조된 멤버들의 보컬을 통해 표현된다. 같은 앨범의 수록 곡 ‘Big Girls Don’t Cry’에서는 리드미컬한 멜로딕 랩과 보컬로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주고, “내가 책임질게, 걱정하지 말고” 같은 가사로 겁에 질린 연인을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Sleep Tight’에서는 미세한 떨림이 담긴 R&B풍의 보컬로 보다 깊은 감정을 노래하고, “괜찮은 척했지 아마 / 네 앞에서는 like Superman yeah yeah / 커지는 불안과 혼란 / 애써 깊이 누른 채”라며 불안과 두려움, 취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요컨대 ‘THE SIN : VANISH’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자신감과 ‘우리’가 된 연인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 그로 인한 불안처럼 다양한 감정을 교차시킨다. 그렇게 엔하이픈은 이질적인 존재로서의 자아 성찰, 욕망에 대한 갈증과 절제를 넘어 새로운 경계선으로 넘어간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 놓인 존재가 관계 안에서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뜬다. 뱀파이어가 또 다른 차원의 인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곧 ‘THE SIN : VANISH’의 서사다.

그래서 ‘THE SIN : VANISH’이 콘셉트 앨범 형식으로 도피극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쇼’를 보여주는 것은 필연적이다. 11개 트랙 중 5개를 내레이션과 스킷으로 제작한 구성은, 반복 감상이 중심이 되는 스트리밍 시대의 산업적 문법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THE SIN : VANISH’는 단순히 듣고 소비하는 음악을 넘어, 음악을 중심으로 가사와 비주얼 콘텐츠, SNS를 종합해 서사의 완결성을 내세운다. 앨범 발매 전 공개된 ‘뱀파이어나우(VAMPIRE NOW)’ 사이트는 뱀파이어 사회의 금기를 깨고 도피 중인 7명의 뱀파이어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몰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치 라디오 뉴스를 듣는 것처럼 구성된 ‘THE SIN : VANISH’에서 청자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도피극을 전해 듣는 사건의 청취자이자, 기록을 따라가는 목격자가 된다. 타이틀 곡 ‘Knife’의 뮤직비디오 역시 중요한 금기를 어겨 적색 수배가 내려진 일곱 뱀파이어를 추적하는 ‘뱀파이어나우’의 보도로 시작해 프로모션 사이트에 공개된 앨범 내 가사의 스토리라인을 이어간다. ‘THE SIN : VANISH’는 K-팝 앨범에서 소위 ‘세계관’이라고 불리는 스토리와 설정을 모든 프로모션과 앨범, 뮤직비디오에 걸쳐 종합적으로 구현한다. 이는 콘셉트가 K-팝의 콘텐츠 내에서 갖는 의미를 확장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뱀파이어와 우리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가 인간과 괴물의 경계선에 서 있듯 저희도 연습생과 아이돌의 경계선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미니 7집 발매 기념 인터뷰에서 정원이 전한 말처럼, 엔하이픈은 경계선에 놓인 존재로서의 이야기를 앨범 내 서사를 통해 확장해왔다. 신인으로서의 위치가 주어진 것인지, 스스로 쟁취한 것인지를 고민하던 ‘Given-Taken’의 고찰은 어느덧 불멸한 존재인 뱀파이어가 욕망 앞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뇌를 거쳐 “나의 발로 서길 원해”라 외치는 자아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덧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불멸’과 ‘필멸’ 사이를 고민하다가 같은 운명을 선택하는 뱀파이어의 서사로 확장됐다. 그사이 엔하이픈 역시 북미 최고의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의 무대에 오르거나, ‘2025 MAMA’ 대상을 수상하는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앨범과 트레일러에 항상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거 알죠? 우리는 작업할 때 항상 엔진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래서 그 캐릭터들을 엔진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이번 앨범과 관련한 ‘롤링스톤’ 인터뷰에서 성훈이 남긴 말처럼, 아티스트의 성장은 앨범 내에서 팬들을 중심에 놓는 판타지가 된다. 그리고 그 판타지를 통해 팬들은 다시 아티스트와 함께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주어가 된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그렇게 아티스트와 팬이 함께 써 내려가는, ‘우리’의 세계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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