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그룹의 미래를 점칠 때 ‘7년’은 피할 수 없는 키워드다. ‘표준전속계약’에 따른 7년의 기한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개인 활동의 비중이 커졌음에도 K-팝 산업에서 그룹이라는 형태는 여전히 중요하다. K-팝의 활동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된 이후에도 대규모 투어와 글로벌 팬덤을 굳건하게 결집하는 단위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K-팝 그룹은 하나의 브랜드로 기능하며, 그 브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대규모 투어와 글로벌 팬 커뮤니티, 그리고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가 여전히 그룹이라는 이름과 이미지 아래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K-팝에서 그룹은 단순히 함께 활동하는 단위가 아니라 산업과 팬덤을 연결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작동한다.
아티스트 유튜브 채널 최초로 1억 명 이상의 구독자를 기록한 블랙핑크는 K-팝의 글로벌 확장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이는 단순한 숫자 이상이다. K-팝 그룹이 세계적인 팬덤과 산업구조를 동시에 움직이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브랜드는 이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블랙핑크가 약 3년 5개월 만에 발표한 새 앨범 ‘DEADLINE’은 그 질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에겐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붉은빛과 푸른빛의 바다가 파도친다. 이내 깊은 아래로 내려간다. 수자문(*필자 주: 주로 조선시대에 사용된 길상 문자 문양 중 하나로 장수를 상징한다.)이 새겨진 문이 닫히고, 네 명의 멤버가 노를 저으면 거대한 중심축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네 명의 움직임은 수많은 노질을 촉발하고, 그 거대한 흐름은 세상을 뒤엎는 파도를 일으킬 수도, 누군가의 눈을 뜨이게 할 수도 있다. 빠르고 거센 바깥의 움직임과 달리, 같은 노를 잡은 네 사람의 모습은 비교적 고요하고 평온해 보인다. ‘DEADLINE’의 타이틀 곡 ‘GO’의 뮤직비디오 이야기다.
블랙핑크는 대중의 움직임을 촉발한다. 이 메시지는 ‘DEADLINE’ 속 노래 구성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블랙핑크 네 사람만의 곡이 아니라, 청자의 존재까지 있어야 완전하게 완성되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뛰어”라고 명령하는 것은 물론이고, ‘GO’ 후반부엔 “블랙핑크”를 다 같이 연호하기도 한다. 듣는 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Champion’에서는 “블랙핑크”를 외치는 것도 모자라 후렴 자체가 떼창으로 구성된다. 블랙핑크 외에 이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노래들의 생명력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블랙핑크는 앨범 내내 그룹의 형태를 강조한다. “I’m already stuntin’, and my girls are on the way(난 이미 멋지고, 내 여자들도 곧 올 거야)” (‘뛰어(JUMP)’), “Just me and my girls(나랑 내 여자들뿐이야)” (‘Me and my’)처럼 블랙핑크를 연상시키는 가사는 물론이고, “Same team, girl, yeah, I got your back(우리 같은 팀이잖아, 내가 니 뒤에서 지켜줄게)” 같은 노랫말 앞엔 “Pull up, four in a sprinter(스프린터 타고 우리 넷 등장)” (‘Champion’)이라며 넷을 강조한다. “Blackpink’ll make ya GO(블랙핑크가 널 움직이게 할 거야)”라고 블랙핑크의 이름을 앞세워 선언하는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DEADLINE’에 수록된 다섯 곡은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다. 정지하지 않는다. 앞으로 뛰고 나아간다. 이별 노래인 ‘Fxxxboy’에서조차도 과거 관계에 멈춰 있지 않는다. 잘못된 관계를 인지하고 주체적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블랙핑크로 하여금 ‘넘어가면 위험한 선(Deadline)’을 넘어,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블랙핑크’라는 소속감, 그리고 그 이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팬덤과 대중으로부터 비롯된다.
블랙핑크의 움직임은 단순히 현지화 전략에 머무르지 않는다. 다시 ‘GO’ 뮤직비디오로 돌아가 보자. 수많은 노꾼이 타고 있는 배에는 전통 문양 중 하나인 회문(*필자 주: 꺾이는 형태를 반복하여 만든 기하학적 장식 문양으로, 연속과 영원을 뜻한다.)이 새겨져 있고, 다양한 언어로 해석된 ‘GO’가 연달아 등장하기 전에는 곳곳에 한글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빨강과 파랑의 태극 문양이 이 비디오의 핵심적인 오브제로 작용한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바다가 등장하는 뮤직비디오 첫 장면은 물론이고, 블랙핑크가 만들어내는 푸른 소용돌이 중심엔 붉은색이 있다.
블랙핑크가 만드는 예술의 뿌리엔 ‘한국’이 있다. 격렬한 급류가 만들어낸, 태극을 코어로 한 인간의 형상이 불특정 개인과 입을 맞추는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은 한국을 품은 블랙핑크가 세계와 접속하는 순간을 은유한다. 그 입맞춤의 결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Blackpink’ll make ya GO
‘DEADLINE’ 속 음악은 수많은 관객이 존재하는 공연장을 전제로 한다. 개인의 감정이나 특정한 서사를 세밀하게 묘사하기보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구성된 것만 같다. 군중의 반응을 끌어내겠다는 그 명백한 목적. 둔탁한 사운드가 곡의 기반이 된다거나, 다음 파트를 기대하게 만드는 빌드업, 관객을 해방하는 듯한 드롭 구간 등이 앨범 전체적으로 반복해 등장하는 이유다. 감상을 위한 음악이라기보다 공연장에서 함께 즐기는 집단적 경험을 형성하는 사운드에 가깝다.
‘뛰어(JUMP)’에서는 테크 하우스, 유로 댄스, 트랩, 저지 클럽 등 다양한 장르를 조화롭게 섞어 흥을 돋우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뛰어”라는 명령형 가사가 집단적 움직임을 유도한다. ‘GO’에서는 세 번의 드롭으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증폭시키고, ‘Me and my’에서는 박자마다 클랩 사운드를 책갈피처럼 꽂아 곡이 가진 그루브에 몸을 맡기게 만든다. 신체적인 반응을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구조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후렴구 전체를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짜인 ‘Champion’의 기반에는 익숙한 팝 록 장르가 있다. 거기에 박수를 연상하게 하는 드럼을 메인으로 미니멀한 짜임새를 취한다. 따라 부르는 목소리를 더 강조하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서정적인 기타 구성으로 한껏 끌어올린 에너지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Fxxxboy’는 앞선 곡들과 완전히 상반되는 분위기를 취한다. 물리적 반응보다는 감정선을 정리하는 정서적 움직임을 이끈다.
결국 ‘DEADLINE’이 보여주는 것은 블랙핑크라는 그룹이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같은 세계적인 명성이 아니라, K-팝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제안처럼 느껴진다. 개인의 스타성이 강해질수록 그룹의 의미가 흐려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블랙핑크는 오히려 집단의 에너지와 팬덤의 참여를 통해 그룹이라는 형태를 확장한다. 그 중심에는 공연장에서 관객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제틱한 음악과 태극을 본질로 삼은 한국적 정체성이 함께 놓여 있다.
블랙핑크가 제시하는 K-팝의 방향은 단순히 글로벌 팝에 편입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잊지 않는 것, 한국이라는 문화적 뿌리를 품은 채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다. 블랙핑크는 그렇게 한 번 더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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