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사의 혼잣말’
윤해인: 동명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약사의 혼잣말’은 과거 가상 국가의 황궁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마오마오는 유곽의 약사이자 양부인 뤄먼에게 약에 대한 지식을 배우며 자란 열입곱 소녀 약사다. 약재와 독극물에 대한 엄청난 호기심과 지식을 보유한 마오마오는 약초만 보면 두 눈을 반짝이며 정신 못차리고 달려든다. 왜소한 체격과 시종일관 무심한 표정, 심드렁하게 빈정거리는 낮은 목소리. 작중 ‘들고양이’로 비유되는 마오마오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관심사에만 충동적으로 이끌리는 괴짜 천재처럼 묘사된다. 단, 약초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지론처럼, 마오마오의 재능 또한 마찬가지다. 첫 에피소드, 마오마오는 양부의 심부름을 나갔다가 납치를 당해 허드렛일을 하는 궁녀로 팔려간다. 신분제 국가라는 설정 속에서, 마오마오는 봉공 기간을 최대한 무사히 채우고자 눈에 띄지 않게 처신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다만 그 “호기심과 지식욕”에 비하면 큰 바람이었을까. 마오마오는 후궁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 속에서 “아주 약간의 정의감”을 참지 못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움을 건네고 만다. 그 과정에서 후궁의 관료와 비들을 관리하며, 유능함과 미모를 동시에 겸비한 환관 진시가 마오마오의 존재와 재능을 발견해버린다. 이를 계기로 마오마오가 네 명의 상급비 중 한 명인 쿄쿠요 비의 독 시식 담당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약사의 혼잣말’이 시작된다.
에피소드마다 진시는 마오마오에게 어떤 사건을 부탁하고, 마오마오는 특유의 명민함과 대담함을 기반으로 진상을 파악해 나간다. 마오마오가 궁궐을 누비며 사건을 해결해 나갈수록, 들고양이 같은 마오마오가 신경 쓰는 사람들 또한 조금씩 조금씩 늘어난다. 예컨대 39화, 마오마오와 후궁에서 친해진 동료이자 여동생 같은 존재 샤오란은, 또 다른 상급비인 러우란 비에게 갈 얼음을 운반하던 환관과 실수로 부딪힌다. 사람 한 명의 몸값과 맞먹는 얼음을 깨는 것은 일개 궁녀가 책임질 수 없는 큰 사고다. 그 순간 마오마오는 일말의 고민 없이 샤오란을 대신해 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낸다. “도와줄 의무는 없”지만 돕지 않으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라는 소심한 핑계는, 그에게 내재된 선한 마음과 정의감을 보여준다. 마오마오의 혼잣말 같은 추리는 언제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는 책임에 대한 회피라기보다 진실이 지닌 무게와 책임을 이해하는 행동에 가깝다. 그래서 마오마오는 종종 어떤 사건의 진실을 알아채더라도, 시대 상황에 의해 그 진실이 누군가를 비극에 빠지게 한다면, 있는 그대로를 밝히기보다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는 쪽을 택한다. 주인공 ‘버프’와 같은 천재 ‘설정값’ 외에도 이 ‘츤데레’ 같은 마오마오라는 인물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시즌과 회차를 거듭하며 그저 환관이라기엔 수상하게 유능한 진시의 정체가 점차 드러났고, 마오마오의 친부모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도 밝혀졌다. 후궁에는 점점 더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궁궐 내 복잡한 정치 관계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조용히 봉공 기간을 채우려던 본래의 계획과 달라진 것은 이미 오래, 마오마오는 점점 더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는 중이다. 지난 10월 3일부터 공개되고 있는 시즌 3를 통해 마오마오와 함께 그 진상을 추측해 보자.
* 방영일은 아시아 일부 지역 넷플릭스 기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백설희(작가, 칼럼니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2023년 12월 NHK 방송분을 120분으로 재편집한 다큐멘터리로, 국내에서는 지난 4월 15일에 메가박스 단독으로 개봉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 공개는 이번이 처음이다.
몇 년 전, 갑자기 활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의 나를 구원해준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하늘을 날 수 없게 된 ‘키키’에게 화가 ‘우르슬라’가 건넨 대사였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버둥거리면서 그리고 또 그린다, 그럼에도 그릴 수 없다면 그때는 그리는 행위를 그만둬 버리면 된다. 당시 쉰을 바라보던 미야자키가 건넨 이 대사에, ‘마녀 배달부 키키’와 같은 해에 태어난 내가 위안을 받은 셈이다. 그렇다면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노장 감독은, 각별했던 다카하타 이사오(파쿠상)를 비롯해 이미 많은 동료를 떠나보낸 그는 어디에서 위안을 받는가.
“그 어떤 때보다 뇌의 뚜껑을 열고 만든 진정한 자서전이야.” 최후의 장편이라 천명했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작하기 위해 또 한 번 은퇴를 번복한 미야자키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듯 콘티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애증 깊은 관계’였던 다카하타를 투영한 ‘큰할아버지’를 그려내며 “이제야 겨우 파쿠상을 콘티 속에 묻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날까지 2566일.’ 이 숫자가 줄어들수록 감독의 얼굴은 여위고 말투도 까칠해진다. 그의 곁을 떠나는 이들도 점점 더 많아진다. 미야자키 감독의 마음 역시 크게 흔들린다. 그럼에도 연필을 쥔 손은 멈추지 않는다. “현실 세상으로 돌아오기 귀찮아.” 그는 자신의 작품에 푹 빠져,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2023년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고 나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항상 말해왔던 노익장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테냐?” 하고 호통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니, 저 문구는 감독이 자신에게 외치는 말처럼 느껴진다. 대답은 감독 자신이 이미 했다. 동료의 부고 소식을 들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난 일을 하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죽는 순간까지 이야기를 그리면서 그렇게 살 것이다.
앨런 레비 - ‘테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이름)’
김복숭(작가): 성(姓)조차 알려지지 않은 테오라는 남자가 어느 날 미국 남부의 한 작은 마을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왜 오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이 연유를 물어도 테오는 항상 화제를 슬쩍 돌린다. 아흔에 가까운 이 노인의 계획은 마을 사람들의 초상화를 하나씩 사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그림들을 한 점씩, 그림 속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자신의 나이만큼이나 많은 수의 초상화들. 사람들은 곧 이 선물이 단순한 그림 선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건네는 그림 한 장 한 장에는 잠시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는 조용한 초대가 함께 담겨 있고, 테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탁월한 공감 능력의 소유자다.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들이 앨런 레비의 데뷔 소설 ‘테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이름)’를 이끄는 중심축이다. 책은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꺼이 기분 좋은 이야기가 되어준다.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이야기가 때론 필요하다는 듯, 이 책은 자신이 지닌 다정함을 숨기지 않는다. 테오의 진짜 정체는 결국 감정적 반전과 함께 드러나지만,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아마 테오가 건넨 그림 한 장과 그 곁에서 나눈 이야기. ‘이웃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법’,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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