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전문 레이블, 미디어, 팬덤, 혹은 커뮤니티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씬(Scene)이 형성된다. 그리고 많은 장르가 씬에 기반을 두고 성장해왔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주류 음악이 아닐수록 씬의 존재 유무가 생사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나아가 음악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발전과 확장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마니아들이 향유하던 음악에서 급속도로 시장 점유율이 높아진 힙합은 대표적이다. 내부 구조와 현실의 건강도를 따지는 것과 별개로, 장르와 씬은 이인삼각처럼 엮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R&B/소울(*필자 주: 이하 ‘R&B’로 통일)의 현재는 정말 놀랍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희한하다. 이제껏 장르 음악이 자생하고 발전해온 배경을 완전히 거스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R&B 아티스트의 역량과 음악의 수준은 눈부시게 높아졌다. 그러나 씬이라고 부를 만한 환경조차 조성되지 않았다. 같은 블랙뮤직이자 장르 간의 접점이 많은 힙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R&B만을 전문적으로 표방하는 레이블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찾아볼 수 없으며, 미디어 역시 한때 소수의 웹진이 있었으나 사라진 지 오래다. 비평을 중심으로 운영 중인 웹진 ‘리드머(RHYTHMER)’가 유일하게 힙합과 R&B를 다루지만, 실질적으론 힙합의 비중이 훨씬 크다. 팬덤도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실체가 보이는 록, 힙합, 일렉트로닉, 트로트, 재즈 등의 장르와 달리 매우 흐릿하다.
2010년대가 기점이었다. 미국 R&B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싱어송라이터가 연이어 등장한 시기다. 그들은 각자 추구하는 스타일과 방향성이 다양했다. 새 물결의 선봉에 있던 대표적인 3인을 뽑는다면, 진보(JINBO), 정기고(Junggigo), 보니(Boni)다. 정규 데뷔작 ‘Afterwork’로 마니아들을 놀라게 한 진보는 1070년대 소울, 힙합, 록, 재즈 등의 요소가 혼합되어 탄생한 네오 소울(Neo Soul)과 1990년대 초ㆍ중반에 유행한 힙합 소울을 구사했다. 보컬과 멜로디 모든 면에서 기승전결이 확실한 기존 한국 R&B의 구성을 벗어나 프로덕션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전개가 돋보였으며, 남녀 간의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서 탈피하여 육체적인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거나 동시대 젊은이를 향한 격려와 위로를 담아낸 노랫말도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최초 큐빅(Cubic)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던 정기고는 래퍼들과의 작업을 주로 하면서 힙합 보컬리스트란 독특한 위치를 점했다. 이후 힙합과의 퓨전보다는 R&B 본연의 스타일에 주력하면서 메이저와 인디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많은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소유와 함께한 ‘썸’으로 각인되었겠지만, ‘Byebyebye’와 ‘Blind’야말로 정기고의 진가가 드러난 곡이다. 5년간 몸담았던 스타쉽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을 끝내고 인디로 돌아온 다음에는 신인 R&B 아티스트를 위한 공연을 기획하거나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초대하는 등, 씬을 조성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보니는 015B의 ‘잠시 길을 잃다’란 곡을 불러 이름을 알렸던 신보경의 새로운 자아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유행한 R&B의 다양한 사운드를 담은 데뷔 EP ‘Nu One’으로 마니아와 평단의 눈길을 끈 이후, 오로지 1990년대 R&B에 헌정하는 작품 ‘1990’을 통해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무엇보다 한국 대중음악 씬에서 보기 드물게 장르적인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낸 여성 R&B 아티스트였다.

이상 세 명의 베테랑은 여전히 양질의 결과물을 발표하며 한국 R&B의 상향 평준화 현실에 기여하는 중이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음악의 수준과 세간의 관심도가 정확히 반비례하는 현실이 이어졌지만, 장르의 숨이 멎긴커녕 더욱 펄떡거리며 나아갔다. 잠깐 반짝이고 사그라진 것도 아니다. 많은 이의 무관심 속에서도 탁월한 작품이 꾸준히 발매됐다. 당장 없어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던 장르를 아티스트가 멱살 잡고 끌어올린 셈이다.
2010년대 중반, 자이언티와 서사무엘의 등장은 결정적인 순간을 장식했다. 최초 티페인(T-Pain)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음악으로 데뷔했던 자이언티(Zion.T)는 빠르게 본인의 색깔을 찾았다. 선 얇고 독특한 음색과 의도적으로 툭툭 끊다가 어느 순간 리드미컬하게 치고 나가는 보컬 스타일은 가히 독보적이다. 2014년에 발표한 싱글 ‘양화대교’는 자이언티 스타일의 정점이었다. 그와 아버지를 정서적으로 이어주는 매개물인 양화대교를 배경 삼아 부모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코끝 찡하게 그려냈다. 무엇보다 기존의 가요 발라드에 가까운 구성과 멜로디가 자이언티 특유의 보컬과 어우러지며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R&B 음악이 나왔다(*필자 주: 엄밀하게 따지자면, 발라드는 장르라기보다 음악 양식이지만, 쉬운 이해를 돕고자 한국에서 통용되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밝힌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힙합 레이블 빅딜 레코즈(Bigdeal Records)의 래퍼로 데뷔한 서사무엘은 싱어송라이터로 변신하면서 만개한 경우다.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어색할 만큼 완전히 다른 면모와 놀라운 장르 스펙트럼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소울, 펑크(Funk), 붐뱁 힙합(Boom Bap), 일렉트로 펑크, 팝, 재즈 등등, 다양한 장르를 결합하고 해체하며 만들어낸 음악은 빛나는 순간을 여러 번 연출했다. 비단 프로덕션뿐만 아니라 개인사를 비롯하여 사회문제를 관통하는 노랫말 또한, 그동안 한국 R&B 음악에서 듣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특히 앨범 커리어는 단연 독보적이다. 첫 번째 솔로 앨범 ‘Frameworks’부터 ‘EGO EXPAND (100%)’와 ‘The Misfit’까지 명반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작품을 내리 발표했고, 간간이 내놓은 비정규작들의 완성도도 출중하다.

201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 R&B 음악계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얼터너티브 R&B가 국내에도 깊이 스며들었고,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아티스트의 약진이 돋보였다. 한국 R&B의 현재를 이끄는 신예가 대거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얼터너티브 R&B 계열에서는 듀오 히피는집시였다와 에이트레인(A.Train)을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각자의 세계가 뚜렷한 앨범을 통해 연이어 호평을 이끌어냈다. 힙합 그룹 와비사비룸의 멤버인 제이플로우(Jflow)가 프로듀싱을, 신인 셉(Sep)이 보컬을 맡은 히피는집시였다의 음악은 기존의 얼터너티브 R&B와 온도차가 확연했다. 예를 들어 사운드와 무드가 밝지는 않지만, 침잠되기보다 포근하고, 차갑기보다 따뜻하다. 쓸쓸함이 밴 보컬과 관조적인 가사 그리고 인위적으로 늘어선 음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흐르는 멜로디가 반대편에서 균형을 맞추며,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R&B가 완성됐다. 이 같은 정규작을 불과 2년 사이에 4장이나 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나무’, ‘언어’, ‘빈손’, ‘불’).
에이트레인은 세련되고 때때로 실험적인 시도를 감행한 음악 속에 우울과 죽음을 담아낸다. 그만큼 매우 어둡고 불안정한 기운이 서려 있다. 두 장의 인상적인 EP 뒤에 발표한 첫 정규작 ‘PAINGREEN'은 제목처럼 아이러니한 무드의 충돌이 짜릿한 감흥을 불러일으킨 앨범이었다. 예를 들어 매우 대담하게 죽음을 마주하고 그리지만, 음악은 전반적으로 밝다. 또한 여느 아티스트라면 기피하거나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구성을 취하기도 한다. 곡의 후반부, 서로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두 개의 코러스가 엇갈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럼까지 이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독불장군처럼 나아가는 ‘또 왜 그래’ 같은 곡을 들어보라. 아티스트의 고통을 목도하며 괴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음악에서 오는 감흥을 음미하게 되는 에이트레인의 앨범을 듣는 건 일종의 길티 플레저나 다름없다.

최근 5년 사이에 이루어진 한국 R&B 음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끈 핵심 인물 중 상당수는 여성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노래하는 것에만 국한된 포지션이 대부분이었던 여성 R&B 아티스트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멜로디와 가사는 물론, 앨범의 프로덕션까지 책임졌다.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앨범을 들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아티스트들이 트랩 소울(Trap Soul/*필자 주: 트랩 뮤직과 소울이 퓨전된 스타일의 음악을 일컫는다.)로 대변하는 트렌디한 사운드를 위주로 단선적인 가사, 혹은 래퍼들의 언어를 노래로 옮겨온 듯한 작사법을 선보였다면, 여성 아티스트들은 트렌드뿐만 아니라 다양한 스타일로 프로덕션을 꾸리고 보다 통속적인 주제를 벗어난 메시지의 가사를 전달하는 데에 집중했다.

수민은 단연 손꼽을 만하다. 그는 젠더와 장르를 통틀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데뷔 초기엔 네오 소울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신스 팝, 펑크, 일렉트로닉까지 섭렵하여 범상치 않은 음악을 다수 쏟아내고 있다. 첫 번째 정규작 ‘Your Home’은 수민의 음악적인 변화, 혹은 확장을 고스란히 체감할 수 있는 앨범이다. 블랙뮤직에 기반을 둔 여러 장르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비선형적인 리듬 파트와 몽환적이면서도 청량한 사운드가 귀를 휘감는다. 더불어 곡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선을 섬세하게 표현한 수민의 보컬이 감흥에 방점을 찍는다. 레게와 소울 퓨전을 표방하며 데뷔했던 소마(SOMA)는 앨범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아티스트다. 그러니까 그는 가진 패를 꼭꼭 숨겨둔 채 하나씩 던지며 승부하는 스타일이다. 그동안 발표한 두 장의 EP와 한 장의 소품집 그리고 정규 앨범(‘SEIREN’)을 들어보면, 얼터너티브 R&B가 중심에 놓였지만, 적재적소에서 트렌드로부터의 일탈이 이루어졌고, 작금의 R&B에 최적화된 가성을 구사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진성에 기반을 두고 R&B와 팝의 경계를 절묘하게 가로지른다. 또한 본인의 직간접 경험과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견해를 바탕으로 앨범의 콘셉트를 짜고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수준이 남다르다.
음악 공동체 바밍 타이거(Balming Tiger)의 멤버로 시작하여 AOMG와도 계약한 소금(sogumm)은 무려 두 장의 앨범을 한 달 간격으로 발표하며 등장했다. 하나는 프로듀서 드레스(dress)와의 합작 ‘Not my fault’, 하나는 피처링 없이 혼자 부른 곡들로 꾸린 솔로작 ‘Sobrightttttttt’다. 어느 앨범에서든 가장 먼저 와닿는 건 보컬이다.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발음을 뭉개고 흘리며 전개하는 그의 보컬은 일렉트로닉, R&B, 앰비언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변칙적인 프로덕션 위에서 다중 자아가 되어 흐른다. 때론 천진난만하다가도 시니컬하며, 어떤 때는 주술처럼 들린다. 더하여 흔한 소재인 사랑을 진부하지 않은 가사로 담아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소금은 한국 R&B의 현재이자 미래에 가장 가까운 신예다.

힙합과 R&B를 비슷한 비중으로 아우르는 제이클레프(Jclef)도 빼놓을 수 없다. 데뷔 앨범 ‘flaw, flaw’에서 그가 선보인 싱어송라이터이자 리리시스트(Lyricist)로서의 재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래퍼로서도 활동한 이력이 뒷받침하듯이 다루는 주제도 남달랐다. 2019년 가장 중요한 싱글 중 하나였던 ‘mama, see’는 대표적이다. 제이클레프는 이 곡을 통해 세대에 걸쳐서 이어진 여성 혐오 범죄 이슈를 직접적으로 건드렸다. 힙합과 R&B의 경계에서 미니멀하게 구축된 프로덕션, 관습적이지 않으면서 귀를 즐겁게 하는 멜로디 라인, 후반부에서 이루어지는 극적인 변주 등, 듣는 것만으로도 좋은 음악이 메시지의 힘까지 장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커다란 감정의 파고를 경험케 했다.

마지막으로 선우정아가 있다. 그는 R&B 아티스트로 데뷔한 것은 아니었지만, 2006년 첫 앨범 이후, 7년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 ‘It's Okay, Dear’부터 R&B에 기반을 둔 음악을 선보였다. 선우정아에게선 트렌드를 좇고 구현하는 것에 대한 욕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R&B에 기반을 두고 팝과 일렉트로닉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기존 가요의 관습을 따르는 듯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뒤틀어지며, 짜릿함을 안기거나 아예 작정하고 비선형적으로 나아간다. 세 번째 정규작 ‘Serenade’는 이 같은 그의 장점이 응축된 걸작이다. 이 외에도 호림, 정진우, 시문(of 추다혜차지스, 림하라, 오가닉사이언스), 씬(Syn), 형선, 저드(jerd), 프롬올투휴먼(from all to human), 리코(Rico), 더 딥(The Deep), 여전희, 담예(DAMYE), 지바노프(jeebanoff), 후디(Hoody) 등등, 저마다 탁월한 퍼포먼스와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확실한 아티스트들이 한국 R&B의 오늘을 함께 이끌고 있다.

1970년대 신중현 사단을 통해 처음으로 한국 대중음악에도 소울 음악이 이식된 이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1980년대를 제외하곤 적잖은 명곡이 나왔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R&B는 장르로서의 위치가 애매했다. 철저하게 주류 가요, 적확하게는 가요 발라드에 귀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솔리드(Solid), 윤미래(aka T), 브라운 아이즈(Brown Eyes), 라디(Ra.D)처럼 이른바 장르의 정통성을 내세웠던 이들, 양파, 제이, 휘성, 박정현처럼 R&B와 발라드의 경계에 섰던 이들, SG워너비(SG Wannabe)처럼 한국 특유의 음악 시장 상황과 맞물려서 탄생한 변종 R&B(?)를 들려줬던 이들, 각자가 추구한 바는 달랐지만, 당대의 미디어와 대중은 그들의 음악을 비슷한 군으로 분류했다. 한국에서도 R&B가 가요 발라드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건 오랜 무관심 속에서도 매해 탁월한 작품을 낸 아티스트 덕이다.

어느 장르든 음악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미디어나 대중이 특정 장르를 소비하고 다뤄야 할 의무도 없다. 외면을 받아 사라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국외 음악계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내에서는 미디어의 과도하고 명분이 약한 대중화 시도 아래 장르의 본질과 특징이 왜곡되고 음악의 질마저 퇴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도태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R&B는 오히려 발전을 거듭해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조하건대 우린 한국 R&B 음악에 훨씬 더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알량한 의무감이나 선민의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듣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놓치지 말자는 소리다.
글.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딩고프리스타일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