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 올림픽은 막을 내렸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리그가 있다. 제1회 SBS 사장배 여자 축구 리그,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토너먼트전이다. 지난 2월 설 연휴 파일럿으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정규 편성의 꿈을 이루었고, 리그가 시작된 이후 매 경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스포츠 예능은 SBS ‘진짜 농구, 핸섬타이거즈’나 JTBC ‘뭉쳐야 찬다’처럼 남성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박세리를 비롯해 다양한 종목의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출연하는 E채널 ‘노는 언니’의 성공, 김민경의 놀라운 운동 능력을 발굴한 웹 예능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 신드롬은 여성-팀-스포츠-예능이라는 새로운 도전이 가능한 토양을 만들었다.

 

‘골 때리는 그녀들’의 기획은 단순하다. ‘여자들이 모여서 축구를 한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의 모든 요소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많은 여성은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팀 스포츠를 배우거나 즐길 기회가 거의 없었던 데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는 축구, 여자는 피구(혹은 발야구)’ 같은 식으로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세계에서 넓은 운동장은 자연스레 남자아이들의 몫이 되고, 여자아이들은 공을 무서워하거나 운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며 점점 팀 스포츠와 멀어진다. 성인이 되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익숙하지 않은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바쁜 생활 속에서 운동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개인 운동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책임감을 키우는 데 팀 스포츠만큼 효과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경험은 드물다. 이민희 작가가 엮고 쓴 ‘보통 여자 보통 운동’은 일하는 여성 열 명의 다양한 운동 경험에 관한 책이다. 그중 퀴어 여성 풋살팀에서 활동하는 회사원 엘렌 페이지(가명)는 자신이 즐기는 또 다른 운동인 수영과 달리 풋살이 ‘공동의 운동’이라는 면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다른 팀과 경기를 마친 뒤 서로 SNS ‘맞팔’을 하고 함께 훈련할 계획까지 나누는 이유 또한 공동의 경험 때문이다. “고작 한 시간이라 해도 그렇게 뛰고 나면 엄청 강한 감정을 주고받게 되는 것 같아요. 다같이 격렬하게 뛰었으니까요. 모두가 경험한 육체적 활동이 감정으로 공유되는 것 같아요.”

‘골 때리는 그녀들’의 주된 성공 요인 역시 바로 그 ‘다같이 격렬하게’ 뛰는 여성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한껏 시끌벅적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FC 개벤져스(개그우먼), FC 구척장신(모델), FC 불나방(SBS ‘불타는 청춘’ 출연자를 중심으로 한 싱글 여성 유명인), FC 국대 패밀리(자신이나 가족이 국가대표 운동선수인 여성), FC 액셔니스타(운동을 즐기는 여성 연기자), FC 월드 클라쓰(한국에 사는 외국인 여성) 등 정규 리그에 출전한 여섯 팀 멤버 30여 명의 직업, 연령대,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서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왔고 다르게 생긴 몸을 가진 이들이 공 하나를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목표는 하나, 이기기 위해서다.

 

그들 각자에게는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 ‘거미손’ 조혜련은 명실상부 에이스인 박선영의 플레이에 감탄하며 “나랑 동갑인 쉰둘인데 장난 아니다.”라며 전의를 다지고, 제왕절개수술한 자리가 아물지도 않은 채 첫 경기를 뛴 이천수의 부인 심하은은 축구의 재미에 빠져 동네 엄마들과 축구단을 꾸렸다고 자랑한다. 격렬하게 부딪히고 밟고 밟히는 가운데 발톱이 빠지는 상처를 입고도 정규 시즌만 기다려왔다는 모델 한혜진은 팀의 주장이자 심장 같은 존재다. 결정적 순간마다 죽기 살기로 골을 넣고, 룰은 잘 모르지만 열정이 앞서 실수도 하는 그의 모습은 한 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 낯선 세계와 사랑에 빠졌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일단 차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김민경의 대포알 슛, 뛰어난 집중력과 반사신경으로 승부차기의 중압감을 이겨낸 남현희의 위엄, 다리 부상으로 깁스를 하고도 축구를 향해 불타오르는 사랑을 고백한 신봉선의 눈물은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이유를 확인시켜준다.

 

좋은 드라마는 어느 순간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자연스레 포착하며 작품의 의의를 증명한다. 승무원으로 일하다 축구선수 정대세와 결혼하며 사직한 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서만 살아왔는데 직접 축구를 하게 되어 너무 좋다고 말했던 FC 국대 패밀리의 명서현은 피나는 연습의 결과로 FC 구척장신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 골을 넣는다. ‘골 맛’에 푹 빠진 그가 라이벌팀이었던 FC 구척장신과 FC 월드 클라쓰의 경기를 관전하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보다 떨린다.”고 털어놓는 장면은 왜 여성 시청자들이 ‘골 때리는 그녀들’과 함께 울고 웃는지 깨닫게 한다. 과거의 명서현이 남자들의 축구를 보는 관중의 한 사람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그에겐 자신이 속한 리그가 있고 자신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 서로 의지하며 함께 뛰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떤 여성들은 이들을 보며 용기를 얻어 운동장으로의 첫발을 내디딘다.

 

김혼비 작가는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 자신과 동료들이 하는 운동이 ‘운동’이 되는 순간에 대해 말한다. “일상에서 개인이 편견에 맞서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건 결국 편견의 가짓수를 줄여 나가는 싸움 아닐까. ‘여자가 ㅇㅇ를(을) 한다고?’라는 문장에서 ㅇㅇ에 들어갈 단어의 숫자를 줄이는 것 같은. 나와 우리 팀과 수많은 여자 축구팀 동료들은 저기서 ‘축구’라는 단어 하나를 빼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 해온 운동 그리고 ‘운동’ 역시 그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글. 최지은(작가)
사진 출처.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