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글.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NFL 유튜브

힙합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시리즈 ‘힙합 에볼루션(Hip-Hop Evolution)’(2016 - 시즌 진행 중)에서 말한 대로 오늘날 힙합은 주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힙합이 곧 주류다. 대중문화, 스포츠, 사업, 정치까지,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 사회 곳곳에서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꽤 많은 이는 힙합이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역설해왔다. 시상식을 비롯한 음악계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행사에서 힙합이 종종 배제된다는 것이다. 뚜렷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닌 데다가 주최 측의 저의를 적확하게 알 수 없는 이상 열혈 힙합 팬들이 생성한 음모론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소린 아니다. 지난 십수 년간 그래미 어워드의 종합 부문에서 힙합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음악 발전에 기여한 전설의 업적을 기리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힙합 아티스트는 여전히 소수다. 여러 장르가 어우러지는 대규모 음악 페스티벌에서 힙합 아티스트를 헤드라이너로 볼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슈퍼볼(*프로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의 하프타임 쇼! 

매년 전 세계 1억 명 이상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이 대체 불가능한 콘서트는 유독 힙합 아티스트에게 인색했다. 1991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의 공연을 기점으로 30년 넘게 대중음악 무대가 펼쳐졌지만, 힙합이 주연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 제56회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힙합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결정적 순간이었다. 최초로 온전한 힙합 공연이 기획됐고, 아이콘 닥터 드레(Dr. Dre)와 친구들이 초빙됐다.

마침내 힙합에게 주어진 자리, ‘역사상 최초’라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거장이 필요한 때, 닥터 드레는 스눕 독(Snoop Dogg), 메리 제이 블라이즈(Mary J. Blige), 피프티 센트(50 Cent),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에미넴(Eminem)을 대동하고 품격에 걸맞은 무대를 선사했다. 드레는 Sci-Fi 영화 속 우주선의 내부 같은 넓고 새하얀 컨트롤 룸 세트에 앉은 채 등장했다. 7만여 명이 운집한 소파이 스타디움(SoFi Stadium)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The Next Episode’의 장중한 도입부가 울려 퍼지자 의자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리던 순간 흘러 들어온 전율은 공연이 끝나고도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함께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부흥을 이끈 스눕 독의 조력 아래 ‘The Next Episode’로 시작한 공연은 드레가 프로듀싱하고 피처링한 고(故) 투팍(2Pac)의 ‘California Love’, 뮤직비디오에서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 깜짝 등장한 피프티 센트의 ‘In Da Club, 영원한 힙합 소울의 여왕 메리 제이 블라이즈의 ‘Family Affair’와 ‘No More Drama’, 드레와 컴튼(Compton)의 또 다른 총아 켄드릭 라마의 ‘m.A.A.d city’와 ‘Alright’, ‘Forgot About Dre’의 후렴구를 부르며 등장한 에미넴의 ‘Lose Yourself’를 지나 다시 스눕 독과 호흡을 맞춘 ‘Still D.R.E’로 마무리됐다.

 

15분이 채 되지 않는 공연 안에서 닥터 드레와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축약된 역사가 흘렀고, 여러 의미 있는 장면 또한 연출됐다. ‘California Love’가 1996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들썩이게 한 이날은 곡이 수록된 투팍의 클래식 ‘All Eyez On Me’가 발매된 지 26주년 되는 날이었다. 드레는 피날레 곡인 ‘Still D.R.E’를 부르기 전 피아노 앞에 앉아 투팍의 또 다른 명곡 ‘I Ain’t Mad At Cha’를 연주하며 다시금 고인이 된 불세출의 래퍼를 추모했다. 바로 직전엔 퍼포먼스를 끝낸 에미넴이 무릎을 꿇으며 전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Colin Kaepernick)에게 경의를 표했다. 캐퍼닉은 2016년 시즌 동안 인종차별에 따른 경찰의 잔혹성에 항의하기 위해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일어나길 거부하며 무릎을 꿇었고, 광범위한 문화 현상과 논란을 불러왔다. 에미넴은 한동안 잊힌 캐퍼닉의 정신과 여전히 잔존하는 사회 이슈를 다시금 환기시켰다. 이 외에도 하얗게 불태웠다는 표현이 맞을 메리 제이 블라이즈의 무대와 ‘Dre Day’라는 상징적 문구(이자 닥터 드레의 명곡)를 앞세워 예의 좌중을 휘어잡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켄드릭 라마의 무대 그리고 시종일관 누구보다 환희에 찬 얼굴로 드럼을 두드리던 앤더슨 팩(Anderson .Paak)의 모습 등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 잔상을 남겼다.

 

이번 쇼를 기획하고 성사시킨 건 또 한 명의 거물, 제이지(Jay-Z)다. 몇 년간 하프타임 쇼를 책임져온 그의 락 네이션(Roc Nation)과 닥터 드레가 손잡고 재미와 의미를 모두 챙긴 최고의 힙합 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냈다. 비록, 갱스터 랩/지펑크(G-Funk)의 교과서라 할 만한 ‘Nuthin’ but a “G” Thang’과 스눕 독의 솔로 퍼포먼스를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세계의 힙합 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다. 그렇게 ‘Dre Day’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