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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해인
사진 출처. 블랙핑크 인스타그램

“2005년쯤부터 ‘마이걸’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어머니와 함께 봤고, 가족들과는 예능 프로그램 ‘패밀리가 떴다’나 ‘런닝맨’을 주기적으로 봤다. 중학생 시절에는 친구와 함께 슈퍼주니어, 샤이니, 소녀시대 그리고 원더걸스 같은 ‘2세대’ K-팝 아이돌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래서 당시 K-팝 씬에 일어나는 최신 정보를 꽤 잘 알고는 했다. 그러다 방탄소년단이라는 새로운 보이 그룹이 데뷔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No More Dream’과 ‘We Are Bulletproof Pt.2’가 나오자마자 들었다. 그 가사와 힙합 장르를 베이스로 한 음악이 다른 K-팝과는 다르다고 느껴져 바로 빠져들었다.”

 

2010년대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이야기다. 누군가는 자신이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보낸 방탄소년단의 팬이자, 유명 팬 번역 계정의 번역가로 활동하는 페이스(Faith)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싱가포르에서는 “K-팝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 싱가포르와 인접한 국가에 거주하고 있는 국가의 K-팝 팬들 역시 10대 시절 열성적인 팬은 아니더라도 K-팝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방탄소년단 팬 번역 계정의 번역가 치카(Chika)는 “고등학생이었던 2010년 초반, 주변 친구들이 K-팝 팬이어서 K-팝을 들어볼 수밖에 없었다.”고 페이스와 비슷한 경험을 떠올렸다. 필리핀에 거주 중인 블랙핑크 팬이자 블랙핑크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SNS에 업데이트하는 필리핀 기반의 정보 계정을 운영 중인 비(BEE) 역시 “어린 시절 포미닛이나 투애니원,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춘 경험이 있다.”며 각 팀의 대표곡들을 하나하나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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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치카, 비의 예에서 보듯 동남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한류'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K-팝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보다 밀착된 모습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 스포티파이의 주간 차트(2월 24일 자) 중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지역에서는 상위권에는 정국의 ‘Stay Alive (Prod. SUGA of BTS)’를 포함해 ENHYPEN과 TREASURE 그리고 태연의 신보 수록곡들이 안착해 있다. 베트남 최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인 ‘냑꾸어뚜이(NhacCuaTui)’는 메인 홈페이지에 베트남, 영국/미국 그리고 한국의 팝 세 가지로 차트 순위를 구분한다. 2020년 싱가포르에서 최대 재생된 뮤직비디오 상위 10개 중 8곡은 블랙핑크와 방탄소년단을 포함한 K-팝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다. 인도네시아에서 14년째 거주 중인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하 ‘진흥원’)’의 신진세 통신원은 “현지에서 사용자가 가장 많은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쥭스(Joox)에서도 상위 100곡 이내 30~40%를 K-팝 음원이 차지하고 있다.”고 현지의 인기를 전했다. 차트에서의 인기는 그대로 동남아 지역의 여러 나라 국민들이 K-팝을 접하는 과정에서 체감된다. 태국에서 4년째 거주하며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는 세종학당의 조남석 교원은 “한식당이나 한인 마트에서 한국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음악을 트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나 상점, 헬스클럽에서 쉽게 K-팝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K-팝은 말레이시아의 주류 문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진흥원의 홍성아 통신원은 말레이시아에서 K-팝의 영향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여성 K-팝 아티스트의 메이크업, 렌즈, 안경, 헤어스타일, 패션 등이 영향을 끼쳐 안경점에서 한국식 컬러 렌즈나 한국식 안경을 판매한다고 홍보한다.”고 말했다. 비는 블랙핑크가 ‘How You Like That’으로 활동하던 당시 멤버인 제니의 헤어스타일이 곧 필리핀의 여성들과 셀럽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며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블랙핑크 같은 K-팝 스타의 영향력은 이들에게 단지 외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블랙핑크는 확실하게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준다.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고, 그들을 통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는 인도네시아 기반의 블랙핑크 팬 베이스 SNS 계정 운영자의 말처럼, 블랙핑크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찾는 팬들도 있다. 비 역시 “나는 블랙핑크처럼 성공한 여성이 되고 싶다. 블랙핑크는 내가 가라앉아 있다고 느낄 때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다.”고 말했다. 이는 블랙핑크 리사의 고향인 태국 부리람주에서 현지 학생을 대상으로 한 ‘K-팝 댄스 아카데미’ 사업을 진행한 진흥원의 김세진 대리가, 현지 국영방송사 Thai PBS에서 “리사는 태국 학생들이 꿈을 쫓을 수 있도록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있다.”며 리사의 영향력이 현지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전한 것과 이어진다. 홍성아 통신원은 말레이시아에서 블랙핑크의 인기에 대해 “말레이시아에서도 블랙핑크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으며, 블랙핑크가 ‘블랙핑크 더 무비’에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말레이시아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K-팝의 유행은 최근들어 다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2019년, 홍성아 통신원이 진흥원에 올린 해외 통신원 리포트 ‘말레이시아의 변화하는 팬 클럽 문화’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에서도 한국처럼 K-팝 팬덤들이 모여 ‘생일 카페’를 여는 행사를 진행했었다. ‘생일 카페’란 팬들이 아티스트의 데뷔일이나 생일 같은 기념일에 소규모 카페를 대관, 아티스트와 관련된 물품을 나누거나 구경하면서 즐기는 이벤트다. 리포트에 따르면 (팬데믹 이전이기에) ‘생일 카페’ 이벤트는 한 달 동안 40회 정도 말레이시아 곳곳에서 열렸다. ‘생일 카페'처럼 한국의 K-팝 팬덤에서 일어나는 유행이 동남아 지역에서도 동시간대에 퍼지고 있다. 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가 10여 년 이상 전파되면서 이를 소비하는 팬덤의 문화 또한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 지역의 K-팝 팬덤이 팬덤 문화를 기반으로 연대하는 경우도 생긴다. 홍성아 통신원의 또 다른 리포트, ‘방탄소년단 팬들, ‘BTS 세트’로 선행 이어나가’는 방탄소년단의 팬덤 아미들의 기부 활동을 말레이시아 K-팝 팬덤의 사례로 들었다. 2021년 5월 맥도날드 ‘BTS Meal’이 전 세계로 판매되었을 당시, 말레이시아 아미들이 자발적으로 의료 기관에 이 세트를 릴레이 형식으로 기부해 화제가 됐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말레이시아에서도 단체 기부가 가능할 만큼 팬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그들이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다. 

 

애초에 K-팝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질적인 음악이었다. 신진세 통신원은 “인도네시아는 라이브 밴드 문화가 발달해 있고, 한국의 트로트와 유사한 ‘당둣(Dangdut)’이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기존 인도네시아 음악 산업에서 배출한 음악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음악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홍성아 통신원은 “말레이계 사람들은 잔잔하고 조용한 어쿠스틱 발라드를 선호하고,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중화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다.”고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K-팝은 역설적으로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에게 새로워서 흥미 있는 음악으로 받아들여졌다. 인도네시아에 거주 중인 치카는 방탄소년단의 ‘Not Today’의 “중독성 있는 음악, 인상적인 가사 그리고 뮤직비디오의 아름답고 극적인 비주얼에 놀랐다.”고 기억했다. 태국 촌부리에 거주하며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 중인 아리랏 락싸나와리가 말하는 “K-팝의 중독되는 멜로디와 가수의 비주얼과 댄스”는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K-팝의 인기 이유다. 블랙핑크 필리핀 기반 정보 계정의 또 다른 운영자 잼(JAM)은 “뮤직비디오의 스타일, 안무, 배경 세트 그리고 패션에 엄청난 공이 들어가 있어, 즐겨 감상했다.”고 말했다.

이질적인 음악을 10여 년 이상 받아들이고 체화하기에 이른 과정에는 동남아시아 지역만의 독특한 맥락적 배경이 존재한다. 2012년 발표된 김수정의 논문에서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족적·문화적 다양성을 기본 바탕으로 타 집단의 문화에 대해 전반적으로 개방적이고 공존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김수정, ‘동남아에서 한류의 특성과 문화취향의 초국가적 흐름’, <방송과 커뮤니케이션 제3권 1호>, p.23, 2012) 동남아시아를 구성하는 국가들은 각각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 다양한 국교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언어적으로도 상이한 경우가 많다. 홍성아 통신원이 예로 든 것처럼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로 나뉘며, 이슬람 신자가 다수인 말레이계부터,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종교와 민간 신앙에 대한 믿음이 공존”하는 국가다. 싱가포르의 경우 총 4개의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방송 채널 역시 언어별로 공급되기도 한다. 또한 각각 다른 국가이면서도 비슷한 종교를 공유하거나, 정치/경제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 상호 친밀한 문화적 교류에 익숙하기도 하다. 신진세 통신원은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태국 남부,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과 함께 이슬람 문화권으로 여겨져, 정서적으로나 문화적인 친숙함이 서로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또한 김수정의 논문에 따르면 동남아시아는 급속한 발전으로 대중문화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다양한 국가의 콘텐츠를 수입한 경험이 있기도 하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 지역은 새로운 문화에 대해 비교적 배타적이지 않고, 한 지역에서 유행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갈 가능성이 높은 복합적인 맥락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한국 드라마와 K-팝이 수많은 문화 중의 한 갈래로 동남아시아에 들어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지금 K-팝 산업이 동남아시아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타 문화에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동남아시아 지역은 그만큼 빠르게 다른 문화를 수용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역사가 보여주듯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로 나아갈 동력을 갖는다. 블랙핑크 필리핀 기반 정보 계정의 또 다른 운영자 에이스(ACE)는 “‘P-팝(필리핀 팝)’이 뮤직비디오 스타일이나 패션 등에서 K-팝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비는 “(P-팝 가수들이) K-팝 아티스트처럼 연습생 생활을 거친다.”는 점을 짚으며 K-팝과의 유사성을 이야기했다. P-팝 그룹을 검색하면 나오는 뮤직비디오는 구성과 더불어, K-팝 특유의 멤버 조합이나 춤, 노래와 랩이 들어가는 음악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K-팝의 경향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K-팝의 영향을 받는데서만 그치지 않는다. 홍성아 통신원은 말레이시아의 4인조 걸 그룹 ‘돌라(DOLLA)’에 대해 소개하며 “2020년 데뷔한 돌라는 말레이시아에서 볼 수 없었던 패션과 음악으로 무장한 팝스타로 관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에 거주 중인 방탄소년단 팬 번역 계정의 팀 코디네이터 멜리사(Melissa) 역시 “멤버들의 패션이나 노래와 랩처럼 특정한 역할이 있는 점, 춤추는 모습이 마치 K-팝 시스템 안에서 나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동시에 “그들이 말레이어와 영어를 노래 안에 같이 넣으면서 말레이시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태국의 T-팝 그룹인 4EVE나 ATLAS와 같은 그룹들은 유튜브 채널에 뮤직비디오 외에 브이로그와 비하인드 영상 또 스페셜 라이브나 프리 데뷔 영상으로 멤버별 영상을 업로드하는 등 K-팝에서 활용하는 마케팅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알리기도 한다. 한 국가 또는 문화권이 다른 국가나 문화권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지 수용에서 끝나지 않는다. K-팝이 그러했듯, 문화적 수용은 새로운 문화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이제 새로운 그들의 팝스타가 탄생하고, 그들의 문화적 기반 위에 K-팝의 제작 및 마케팅 시스템을 통해 그들의 음악을 더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알릴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많은 K-팝 아티스트 유튜브의 구독자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상위 5개국 안에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 중 적어도 한 국가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아티스트와 K-팝 전반에 관련된 정보를 주고 받으며 팬덤들의 소통의 장이 된 트위터 상에서의 지표 역시 마찬가지다. 2020년 트위터 코리아와 스페이스오디티의 ‘케이팝 레이더’를 통해 공개된 ‘#KpopTwitter 트위터와 함께 한 Kpop 10년 역사와 성장’을 살펴보면, 트위터 상에서  K-팝 관련한 대화가 많이 발생한 상위 20개국 중 태국이 1위를,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말레이시아가 순서대로 3,4,7위를 차지하는 것을 비롯해, 20위 권 내 동남아시아의 6개국이 포함된다. K-팝을 트윗하는 이용자 측면에서도 10위권 이내에 동남아시아의 4개 국가가 자리하는 등 K-팝에 대한 높은 관심과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는 현재보다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약 6억6000만 명에 달하는 아세안의 인구와 더불어, 아세안 6개국의 2019~2024년 콘텐츠 시장 연평균 성장률은 3.87%다. 이는 글로벌 시장의 성장률로 가늠되는 2.83%보다 높은 수치다. 더불어 2019년 기준 한국 콘텐츠 수출액 중에서도 중화권과 일본 다음으로 큰 규모인 14.1%다. 이미 형성된 팬 층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다, 모든 한국 콘텐츠에 대해 ‘열성적 이용자’의 비율이 전반적으로 높은 편에 속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K-팝과 팬덤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은 동시에 동남아시아 지역이 K-팝 산업에 영향력을 갖게 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2020년 데뷔한 K-팝 그룹 SECRET NUMBER에는 인도네시아 출신의 멤버 디타가, 2022년 3월 데뷔한 그룹 TEMPEST에는 베트남 출신의 멤버 한빈이 소속돼 있다. 단지 특정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K-팝의 스타일과 문화가 10여 년 이상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나라에서 K-팝 아티스트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애초에 K-팝이야말로 국내외의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과 정서를 받아들여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며 지금에 이른 복합적인 장르이자 스타일이며 마케팅 방식이다. 그리고 이제 동남아시아가 이 K-팝에 또 하나의 영향을 부여하고 있다. 한국인이 모르는 사이에, 동남아시아 지역은 K-팝의 저변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하나의 축으로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