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릴 라빈이 새 앨범 ‘Love Sux’로 돌아왔다. 2022년은 그가 컴백하기에 더없이 좋은 해다. 그의 데뷔 앨범이 나온 지 20주년이기도 하지만, 에이브릴 라빈으로 대표되는 팝 펑크 장르가 새삼 다시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팝 펑크가 별안간 다시 돌아온 이유는 뭘까? 실은 팝 펑크뿐만 아니라 2000년대의 팝 컬처 전반이 최근 들어 재전성기를 맞고 있다. 근 몇 년간 SNS를 통해 20세기 팝 컬처가 빠르게 소비되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유행을 견인한 주인공으로 짧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젊은 유저들을 꼽는다. ‘레트로’라는 키워드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시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팝 컬처 소스, 이를테면 패션, 음악, 미장센 등이 유행했다. 이제 Z세대의 과거 ‘디깅’은 2000년대에 진입했다. 본인들이 유아이던 시절이자 조금 나이 차가 나는 손위 형제들이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이기도 하다. 2000년대 10대 문화의 당사자들 역시 지금은 구매력이 있는 30대가 되었고, 마침 패션의 유행 주기라는 20년도 딱 돌아온 참이다. 2010년대 말 인기를 끈 이모랩(Emo-rap)이 이모팝 펑크의 영향을 받은 것도 어찌 보면 큰 그림에서의 빌드업이었다. 단순한 코드 워크와 직설적인 가사, 선명한 멜로디, 거친 디스토션 기타와 빠른 라이브 드럼으로 대표되는 팝 펑크는 최근까지 유행한 트랩 같은 장르와는 또 다른 맛의 자극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답답해진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2022년 팝 펑크의 리바이벌은 여러 가지 요소가 제때 잘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올해 10월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When We Were Young’이라는 이름의 페스티벌도 예고돼 있다. 라인업에는 에이브릴 라빈을 비롯해 마이 케미컬 로맨스, 파라모어, 지미 잇 월드 등 그 시절 한자락 한 팀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무심한 기타 인트로와 멀리서 나직하게 들리는 “Life’s like this”라는 가사가 담긴 그의 데뷔 싱글 ‘Complicated’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의 마음을 단번에 뒤흔든다. 신나는 기타와 드럼, “He was a boy, she was a girl”로 시작하는 ‘Sk8er Boi’도 마찬가지다. 이 곡들이 수록된 2002년 데뷔 앨범 ‘Let Go’로, 17세의 캐나다 출신 싱어송라이터 에이브릴 라빈은 곧장 틴에이저들에게 각광받는 록스타가 됐다. 헐렁한 카고 바지, 넙데데한 스케이트보드화, 탱크톱 위에 툭 둘러맨 넥타이 그리고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그의 영향으로 2000년대 10대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는 체커보드 아대 같은 아이템이나 엘리멘트, 퀵실버 같은 보드 스포츠 브랜드가 널리 유행했다. TMI로, 그는 본래 컨트리 아이돌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중 에이브릴의 음악 취향이 록 밴드 사운드로 옮겨가며 레이블과 갈등을 빚었고, 오히려 여기에서 새로운 기회를 본 프로듀서 엘에이 리드가 전격적으로 로큰롤 콘셉트를 지지해주며 우리가 아는 싱어송라이터 에이브릴 라빈이 탄생했다. 만일 애초의 계획대로 데뷔했더라면 리앤 라임즈나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가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Let Go’로 그는 2003년 그래미 어워드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이 앨범은 현재까지 미국에서는 700만 장, 전 세계에서는 1,6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미디어는 그를 당대 다른 여성 틴 팝 아이돌의 안티테제로서 조명했다. 1999년에 데뷔한 브리트니 스피어스 그리고 그의 팔로워 포지션으로 데뷔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은 분명 많은 청소년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래 여자아이가 미디어를 누비며 시원시원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사랑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영국에서 스파이스 걸스를 사랑한 여성 청소년 팬덤과 비슷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팝 시장은 산업 자체의 자본과 힘이 강력해지며 아티스트를 업계인의 입맛대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커져 있었다. 데뷔 초부터도 적지 않은 성적 대상화 함의를 내포하던 프로듀싱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화되었고, 여기에 지친 10대 팬들은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스타일의 여성 스타를 갈구했다. 쿨한 스케이트보드나 밴드 문화 비주얼을 앞세운 톰보이 이미지의 에이브릴 라빈은 이들의 니즈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또 다른 형태의 ‘아이돌’이었다. 인터뷰어들은 에이브릴 라빈으로부터 여타 틴 팝스타를 비난하는 코멘트를 따려 노력했지만, 에이브릴 라빈은 이런 시도를 싫어했다. 특히 안티-브리트니(Anti-Britney)로 그를 조명하려는 인터뷰어에게 “그도 사람이다, 브리트니 좀 내버려둬(She’s also a human being. Leave Britney alone.).”라고 말한 것은 후에 ‘Leave Britney alone’이란 표현으로 밈이 된 2000년대 말 그리고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마침내 아버지의 법적 후견인 자격을 박탈하는 소송에서 승리한 2021년에 새삼 재조명되기도 했다.
온건한 입장이었던 에이브릴 라빈이 오히려 데뷔 초 각을 세운 대상은 펑크록 팬덤이었다. 당시에는 팝 펑크가 마땅히 장르로 인정받지 않았다. 1970년대에 이미 펑크에 팝 멜로디를 접목시킨 라몬즈 같은 밴드가 있었다지만, 이들이 팝 펑크의 조상 격으로 소환되는 건 2000년대 중반 이후 팝 펑크가 장르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뒤의 이야기다. 장르 싸움을 하는 리스너들에게는 펑크면 펑크고, 팝이면 팝이어야 했다. 이를 가르는 기준은 대중음악의 유구한 논쟁 거리, ‘록키즘 대 팝티미즘(‘진정성’ 있는 록 음악과 ‘자본주의’ 팝 음악의 대립 구도)’ 프레임을 그대로 따랐다. 안타깝게도 록 씬에 역시 사회 전반처럼 여성 혐오적인 시선이 있었고, 암묵적으로 ‘진정성’ 있는 록 음악은 ‘남자다운 것’, 대중에 영합하는 자본주의 팝 음악은 ‘여성스러운 것’이라는 흑백 구도가 존재했다. 틴에이지 스타 에이브릴 라빈은 앨범에 얼터너티브 록의 영향을 받은 트랙이 여럿 있음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후자로 분류되었다. 또한 그는 데뷔 전부터 펑크록과 긴밀한 관계인 스케이트보드 문화를 사랑했고 그래서 그 패션 그대로 데뷔했지만, 록 팬들은 이런 에이브릴의 모습이 진정한 펑크도 아니면서 펑크록을 따라 하는 행태라 비판했다. 2003년 그가 그래미 어워드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사건은 ‘어떻게 데이비드 보위도 모르면서 록을 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정작 그는 그게 그리 큰일이었냐며, 자신은 열여덟 살이니 모를 수도 있지 않냐는 반응을 보였고, 라빈이라는 본인의 성 역시 잘못 발음되는 일이 잦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했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초의 이런 분위기는 콩 심은 데 콩이 났을 따름이었다. 록 씬은 20세기부터 유구히 마초적이고 여성 배제적이었다. 당시에 활약한 여성 아티스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앨라니스 모리셋 같은 여성 록 싱어송라이터의 성공은 평단과 팬들, 심지어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감정적인 여자 음악’이라 꾸준히 폄하 당했고, 죽을 뻔한 남편 커트 코베인을 몇 번이나 살려낸 홀의 프런트우먼 코트니 러브는 남편의 사후 ‘마녀’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 멜로디가 듣기 편하다는 이유로 록의 진정성 논쟁으로부터 공격을 받던 같은 미국 팝 펑크 계열의 팬들조차 에이브릴 라빈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작 2022년 현재 Z세대는 그린데이와 에이브릴 라빈 1집을 모두 팝 펑크 플레이리스트에 집어놓고 함께 들으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데 말이다.
에이브릴 라빈은 이런 박대에 꾸준히 항변하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그의 2집 ‘Under My Skin’은 공동 작곡의 비중을 줄이고 단독 작사, 작곡을 늘리며 보다 당대의 포스트 그런지 밴드들과 같은 진지한 무드를 선보였다. 웅장한 편곡의 ‘My Happy Ending’은 1집의 싱글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준수한 판매고를 올리며 그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보다 성숙한 싱어송라이터의 소포모어 앨범에도 그를 1집부터 냉대하던 이들의 입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에이브릴 라빈의 10대 소녀 정체성 그리고 10대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로의 정체성에는 변함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완연한 팝으로 선회한 3집 ‘The Best Damn Thing’ 앨범은 반전이었다. 1집에서 2집으로 흐른 방향을 보아 더욱 어둡고 심각한 음악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달리, 그는 얼얼할 정도로 단순하고 달콤한 팝 펑크 트랙 ‘Girlfriend’로 컴백했다. 심지어 랩(보다는 챈트에 가깝지만)도 하고 춤도 추었다. 눈부시게 탈색한 금발 머리에 선명한 핑크색 브리지를 단 헤어스타일은 이후 에이브릴 라빈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각 앨범 활동기마다 이 브리지 색깔만 달라져서 머리 색깔에 따라 무슨 앨범기인지 알아보는 재미도 추가되었다). ‘Girlfriend’는 그를 커리어 역사상 첫 빌보드 핫 100 1위에 올려놓았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플랫폼 역사상 첫 1억 뷰를 달성한 영상이기도 하다. 로커들의 인정에서 아예 달아나, 로큰롤 인플루언스를 품은 가요를 2000년대 중반 메인스트림 꼭대기에 꽂아넣은 가수. 그의 가사처럼 ‘빌어먹을 (팝 펑크) 프린세스 (motherf**king princess)’ 에이브릴 라빈의 통쾌한 업적이었다. 이 앨범의 팝적인 감성은 1집의 ‘Sk8er Boi’에서 이어온다고도 볼 수 있다. ‘여성스럽고 재미 없는 걔 말고 나 같은 여자를 만나봐.’라는 서사는 지금 생각해보면 구시대적이긴 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에이브릴이 인터뷰에 임하는 애티튜드 등도 상당히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록 팬덤의 공격에 가시를 세우고 방어적으로 나오는 말투였다면, 이때부터는 ‘나는 원하면 록도 하고 팝도 한다.’ 하는, 더 이상 록 팬들의 인정에 천착하지 않는 자세로 변했다. 나이를 먹고 결혼도 하면서 여유로워진 모습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결과겠지만, 이때 변화의 폭이 상당히 커서 어떤 사람들은 “데뷔 초의 에이브릴 라빈은 죽었고 지금은 도플갱어가 활동하고 있다.”는 엉터리 음모론을 펼칠 정도였다(이러한 종류의 루머는 엘비스 프레슬리나 폴 매카트니 같은 최고 인기 뮤지션에게나 붙는다는 점에서 그만큼 에이브릴 라빈이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반증도 될 것 같다). 이 앨범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특히 일본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5집에 들어간 에이브릴 라빈식의 골 때리는 덥스텝 곡 ‘Hello Kitty’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동시에 3집 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일본 팬들에게 보내는 팬 서비스라는 해석도 있었다. 일본 문화를 이국적으로만 그린, 세심하지 못한 작품임에는 분명하지만 말이다.
한편 2000년대 팝 씬에서는 에이브릴 라빈의 연속된 성공으로 점차 그의 영향을 받은 여성 팝 록 가수가 등장했다. 디즈니 스타인 힐러리 더프나 마일리 사이러스 등이 팝 록을 기조로 한 음반을 내놓았고 모두 적잖이 히트했다. 지금 틱톡에서 팝 펑크를 즐기는 젊은이들은 유아 시절 디즈니 팝 록 사운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디션 프로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에서 우승하며 처음엔 댄스 팝으로 데뷔한 켈리 클락슨 같은 경우, 에이브릴 라빈이 ‘Let Go’ 앨범을 위해 썼다가 드롭한 곡 ‘Breakaway’를 취입하며 그의 파워풀한 벨팅 보컬과 팝 록 사운드의 상성을 보여줬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그의 최대 히트 곡 중 하나인 ‘Since U Been Gone’을 내기도 했다. 핑크(P!nk) 같은 팝 가수도 톰보이 캐릭터의 인기를 이어가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2000년대 후반 10대들 사이에서는 이모(Emo) 인플루언스가 가미된 마이 케미컬 로맨스나 패닉 앳 더 디스코 같은 어두운 분위기의 팝 펑크 밴드 붐이 일기도 했는데, 이 사이에서 파라모어 같은 여성 보컬 밴드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 역시 에이브릴 라빈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글 초반에 소개한 이모랩에 영향을 미친 이모팝 펑크가 이 라인이다).
그리고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말까지, 에이브릴 라빈은 한동안 팝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비껴나 있었다. 딱히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대중의 취향이 변했다. 2000년대 말을 기점으로 팝 음악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록에서 EDM과 힙합 R&B로 이동했다. 에이브릴 라빈의 두 번째 남편 채드 크로거가 소속된 니켈백 같은 밴드가 계속 해서 라디오 히트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록 음악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쿨한 음악으로 인식 되지는 못했다(특히 그나마 히트하고 있던 니켈백은 다른 밴드들보다 눈에 띈다는 이유로 인터넷 공간에서 더욱 놀림거리가 되고는 했다). 201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여성 팝스타는 레이디 가가나 리아나, 케이티 페리 등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Shut Up and Drive’나 ‘Teenage Dream’ 같은 곡에서 팝 록 인플루언스를 드러내기는 했다. 그러나 에이브릴 라빈은 그 시기 이모셔널한 록 발라드를 하고 싶어 했고, 당시 레이블이었던 RCA 레코드는 이런 취향이 유행과 맞지 않는다고 여겨 대립이 계속되었다. 타협을 거쳐 내놓은 4집 ‘Goodbye Lullaby’나 다시 팝 노선을 택한 5집 ‘Avril Lavigne’은 그의 이름값만큼의 인기는 끌었지만 1집만큼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집 앨범으로 투어를 하던 그에게 2014년 라임병 진단이라는 시련이 찾아왔다. 에이브릴 라빈은 이 병으로 2년간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다. 2015년에는 채드 크로거와 이혼하기도 했다. 극적으로 회복한 그는 2019년 생사를 건 투병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곡을 쓰고, 6년 만의 새 앨범 6집 ‘Head Above Water’를 내놓았다. 죽음 앞에 신을 찾는 이 곡의 가사는 그를 빌보드의 팝 차트보다 기독교 음악 차트에서 더 높은 순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거짓말처럼 팝 펑크의 유행이 다시 돌아왔다. 틱톡을 비롯한 SNS에서는 이미 심플플랜의 ‘I’m Just a Kid’나 파라모어의 ‘All I Wanted’ 같은 곡이 밈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래퍼로 데뷔했으나 팝 펑크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난 머신 건 켈리는 ‘Tickets to My Downfall’ 앨범이 빌보드 200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오르며 화려한 재기의 신호탄을 날렸다. 고인이 된 릴 핍이나 주스 월드 이후 이모랩의 2세대를 형성하고 있는 영블러드나 더 키드 라로이는 팝 펑크의 영향을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더 키드 라로이와 Justin Bieber의 ‘STAY’는 빌보드 핫 100에서 방탄소년단의 ‘Butter’와 1위를 겨루며 2021년 최고 인기 곡 중 하나가 되었다. ‘Tickets to My Downfall’을 프로듀스한 블링크-182의 드러머 트래비스 바커는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해 2020년부터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에이브릴 라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장르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그는 윌로우나 모드 선 등과 컬래버레이션을 선보이며 컴백의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2월 25일, 그는 트래비스 바커의 레이블 DTA 레코드에서 새 앨범 ‘Love Sux’를 냈다.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니 새 앨범이 나올 거란 예상은 있었다. 그러나 올해가 이렇게까지 ‘물 들어오는’ 해가 될줄, 불과 5년 전만 해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신보 ‘Love Sux’는 흠잡을 데 없는 팝 펑크 앨범이다. 유행에 맞춰 급조한 음반은 아니다. 최근 인터뷰에 의하면 팬데믹으로 투어가 멈추며 자연스럽게 앨범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사이 유행이 이만치 커졌다고 한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그는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듯 20년 전의 음악과 패션을 충실히 재현했다. 누군가에겐 팝 펑크로의 진입 장벽이었을, 다소 유치하면서 직관적인 가사조차 그대로다. 트랙들은 대부분이 3분을 넘지 않는다. 보다 펑크에 가까워진 모양새라 볼 수도 있겠고, 곡의 길이를 짧게 유지해 스트리밍을 용이하게 한 요즘 팝의 시류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프로듀싱은 상당히 타이트하게 봉합되어 거친 기타나 빠른 드럼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박과 피치가 제자리에 있는, 깔끔한 벡터 이미지 같은 사운드다. 곡 길이가 짧아서인지 이런 크리스프한 텍스처가 더욱 두드러진다. 작년 11월에 선공개한 ‘Bite Me’나 올 1월 역시 선공개한 ‘Love It When You Hate Me (feat. blackbear)’ 모두 그렇다. 비슷하게 팝 록을 하지만 일부러 인디한 느낌을 내려고 로파이하게 접근한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2021년 ‘SOUR’ 앨범과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I’m With You’나 ‘When You’re Gone’ 곡들을 사랑한 팬들을 위해 ‘Dare To Love Me’ 같은 록 발라드도 잊지 않았다. 본인도 최근 많은 피처링 컬래버레이션을 했지만, ‘Love Sux’ 역시 화려한 피처링 진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 면면을 보면 최근 팝 펑크 리바이벌의 축약 같다. 지금의 팝 펑크는 블랙베어의 랩과 무리 없이 어울리는 음악이 되었고, 머신 건 켈리처럼 아예 래퍼에서 로커로 대전환을 이뤄낸 인물도 있으며, 블링크-182의 마크 호퍼스 등 그 시절의 인기 아티스트들이 소환되고 있다.
에이브릴 라빈의 보컬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더 강하고 날카로워졌다. 특히 ‘Bite Me’의 찌르는 듯한 첫 소절 선창은 압권이다. 틴에이지 스타의 이미지에 다소 가려졌을 수 있지만, 애초에 그는 노래를 잘해서 캐나다에서 미국까지 모셔온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의 창법은 여전히 젊고, 심지어 어린 시절보다 더욱 확신에 차 있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진 프로듀싱일수록 라이브에서 그대로 구현하기 쉽지 않은데 그는 이 모든 것을 너무나 수월하게 해낸다.
2022년의 록 씬, 그중에도 팝 펑크 씬이 2000년대와 비교해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일까. 아직 씬 전반에 적용하긴 어려운 이야기지만, 다양한 인종과 젠더의 아티스트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당시에는 에이브릴 라빈이 겪었듯 여성에게 배제적이었음은 물론이고 인종적인 다양성도 부족했다. 캐나다의 팝 펑크 아티스트 피피 돕슨(Fefe Dobson)은 준수한 앨범을 냈음에도 흑인 혼혈이란 이유로 레이블로부터 지속적인 장르 체인지(물론 R&B 같은 ‘어반’ 장르로)를 강요 받았다. 역시 흑인과 미국 원주민계의 자손인 래퍼 트래비 맥코이는 짐 클래스 히어로즈라는 팝 펑크 밴드로 활동하던 당시 씬의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모든 문제가 단번에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통 백인 음악 이미지였던 팝 펑크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가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있고,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음악을 만들고 있다. 에이브릴 라빈이 피처링하기도 한 윌로우는 어린 시절 톱스타인 아버지 윌 스미스의 도움으로 댄스 팝 가수로 데뷔했던 과거를 벗어나 팝 펑크 아티스트로 거듭나고 있다. 짱짱한 사운드와 라이브 매너를 갖춘 미트 미 앳 디 얼터는 멤버들이 전원 유색인종 여성으로 이루어진 밴드다. 이 밖에도 디웨인이나 케니후플라 등이 팝 펑크의 새 얼굴로 주목받고 있다.
2010년대 후반에는 미국 인디 씬을 중심으로 여성 로커들이 대거 등장했다(기타 메이커 펜더에 의하면 언제나 남성 구매자 쪽이 압도적이던 성비가 거의 비등해질 정도로 여성 소비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 중 상당수가 소녀 시절 록스타를 꿈꾸게 한 존재로 에이브릴 라빈을 꼽았다. 사커 마미나 스네일 메일 같은 인디 아티스트는 물론이고, 테일러 스위프트나 올리비아 로드리고 같은 팝스타도 에이브릴의 팬을 자처한다. 2000년대 초에는 에이브릴 라빈이 ‘진정한’ 록이 아니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팝에 한 발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대중에게 자신을 노출할 수 있었고, 나이 어린 리스너에게까지 가 닿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록 음악을 동경하게 된 소녀들이 2010년대 들어 거의 죽어가던 록 씬을 살려냈음은 바로 팝의 아이러니다.
팝의 힘이란 그런 것에 있는 것 같다. 많은 어린이들에게 내 마음을 처음으로 두드린 음악이란 대부분 접근성이 좋은 팝이다. 누가 뭐래도 이런 아티스트들은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고,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 후에도 함께 사이좋게 나이 먹어간다. 에이브릴 라빈 역시 그렇다. 그 시절 10대를 보낸 이들에게는 그리운 친구이자, 지금 한창 활동하는 여성 로커들에게는 척박한 곳에 씨를 뿌린 선구자다. 시들었던 팝 펑크 장르의 인기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지금, 그래서 에이브릴 라빈의 컴백이 더없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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