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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랜디 서(대중음악 해설가)
사진 출처. 디즈니 플러스

* ‘메이의 새빨간 비밀에 관한 내용이 다수 있습니다. 

 

디즈니·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부모라는 알을 깨고 자신을 알아가는 열세 살 여자아이의 성장기다. 감독 도미 시의 자전적 경험에 기반했다는 영화는 2002년 캐나다 토론토 도시 배경의 아시아계 이민 가정 여학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동화적인 콘셉트에도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북미산 성장물 코미디로 느껴진다.

 

토론토는 비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숱한 미국 배경 영화에 촬영 장소를 제공했지만, 정작 본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었던 곳이다. 어린 나이에 중국에서 이민 와 이곳에 정착한 감독 도미 시는 그때를 회상하며 영화 곳곳에 리얼한 토론토의 모습을 담아냈다. 차이나타운에 사는 메이가 통학할 때 타는 선 달린 전차, 도시 어디서나 잘 보이는 삐죽한 CN 타워 전망대, 메이와 친구들이 관심 있는 잘생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데빈의 일터 데이지마트, 메이를 괴롭히는 남학생 타일러가 입은 토론토 랩터스의 전설적인 선수 빈스 카터의 백넘버 15번 저지 등 모두 실제 토론토를 상징하거나 토론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미국 영화와 비교했을 때 학교나 거리 풍경이 조금 더 인종이나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느껴지는 것도 캐나다다운 특징이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토론토에서는 메이네 학교 수위 아저씨의 펀자브식 터번이나 같은 반 친구의 히잡처럼 민족 문화적 색채를 드러내는 의복을 쉬이 볼 수 있다(단, 영화의 배경 2002년이면 2001년 9.11 테러를 겪고 급격하게 우경화된 미국의 영향을 조금 받았을 때라서, 너무 유토피아처럼만 회상하는 것은 나이브한 접근일 수도 있겠다). 토론토에 대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토론토라는 도시 자체가 갖는 특유의 감성이 영화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 비슷한 틴에이지 코미디로는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이 떠오른다. 시카고에 대한 영화는 아니지만, 도시 곳곳을 누비며 각종 녹음기나 엔지니어링 트릭으로 어른들을 속이고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이 시카고라는 산업 대도시가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와 맞물려 시너지를 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음악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각광받는 음악 감독 중 한 명인 스웨덴 음악가 루드비히 고란손이 맡았다. 디즈니 마블의 ‘블랙 팬서’에서 아프리칸 악기와 힙합 비트가 어우러진 음악으로 2019년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접근했다. 영화 인트로를 보면 메이가 플루트를 다루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초반에는 이 플루트의 멜로디가 2000년대 초반 혹은 1990년대 후반 유행한 뉴 잭 스윙 힙합 비트와 맞물려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메이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엄마 밍과 함께 가족 신을 모신 사원을 청소할 때면 이 플루트 사운드는 자연스럽게 동양 음악의 5음계 선율을 연주하는 디즈(笛子, 가로로 부는 중국식 피리) 소리로 바뀐다. 피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악기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찾아 캐나다로 건너온 메이네 가족이지만, 대륙을 건너도 존재하는 비슷한 악기들을 통해 인류의 다르지만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대륙을 건너 연속되는 메이네 가족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영화의 음악 하면 극중에 등장하는 가상의 보이 밴드 포타운(4*TOWN)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다른 디즈니 영화처럼 대사 도중에 넘버를 부르는 뮤지컬 영화는 아니지만, 메이와 친구들은 슬플 때나 기쁠 때, 그야말로 아무데서나 포타운의 노래를 부른다. 포타운의 모든 곡은 빌리 아일리시와 피니즈 오코넬 남매가 맡았다. 빌리 아일리시는 본인도 자라날 때 저스틴 비버 등 아이돌 가수에 열광했음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뉴 잭 스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들리는 조금은 유치한 가사와 단순한 구조의 팝 곡들은, 빌리 아일리시가 007 시리즈 ‘007 노 타임 투 다이(007 No Time To Die)’에 취입했던 동명의 노래처럼 트렌디하지는 않고, 다만 극중의 이미지에 충실하다.

 

사실 극의 배경인 2002년이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틴 팝 보이 밴드 유행 시기의 막차 때다.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엔싱크에서 벗어나 솔로 앨범 ‘Justified’를 내놓은 해가 2002년이었다. 물론 그 전인 1980년대에도 뉴 에디션부터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인기 보이 밴드가 있었지만, 도미 시 감독과 동년배인 사람들이 기억하는 미국 팝 씬의 보이 밴드 크레이즈라면 백스트리트 보이즈나 엔싱크가 인기를 끌던 바로 그 시기일 것이다. 이 시기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비롯해 아예 틴 팝이 팝 씬의 최강자였다. 2000년에 MTV의 TV 오디션을 통해 오타운(O-Town)이라는 그룹이 탄생했는데, 포타운의 이름이 아마도 여기에서 오지 않았을까 추측한다(안타깝게도 이 팀은 큰 인기를 끌지는 못 했다). 포타운의 앨범 커버나 안무에서도 엔싱크와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오마주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때는 H.O.T.와 젝스키스가 한창 인기를 끌고 그다음 주자인 신화, god 등이 사랑받았다. 동경하던 아이돌을 공연으로 처음 본 주인공과 친구들의 반응이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황홀경인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어린 시절 대형 공연 관람 경험은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변하는 듯한 충격이란 사실을 지극히 ‘덕후’스러운 시선으로 그려낸, 영화의 공감과 웃음 포인트 중 하나다.

영화가 2002년 당시의 재연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준 지점이 있는데, 포타운의 멤버 중 한 명인 한국계 태영의 존재다. 이 시기 북미나 유럽에서 인기였던 보이 밴드들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흑인은 아예 흑인들로만 이뤄진 그룹을 만들거나, 오타운의 트레버 페닉(믹스드 레이스)나 블루의 사이먼 웹처럼 예외적이었다. 더군다나 아시아계 팝스타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태영의 등장은 방탄소년단을 비롯해 보이밴드 하면 K-팝을 떠올리게 된 2022년 현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태영의 캐릭터 디자인이 방탄소년단의 지민을 닮았다거나 뷔의 본명 태형과 비슷하다는 포인트도 팬들을 중심으로 화제가 되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성장 영화다. ‘새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소설 ‘데미안’ 속 표현처럼, 우리는 성장하며 나를 둘러싸고 키워준 첫 번째 세계를 깨는 성장통을 겪는다. 어느 가정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메이와 같은 아시아계 이민 가정에서는 좀 더 극명하게 보이는 점이 있다.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새로운 나라로 건너온 이민자들은 대부분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다. 문화의 충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1세대 이민자들은 자녀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에 올인한다. 가족의 자원을 총동원해 자녀를 교육시키고 이들이 사회에서 인정받는 고소득 직종을 얻게 돕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지만, 이런 성향이 북미의 아시아계 이민 가정,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인도 출신 등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조심스레 덧붙이기는, 이 글을 쓰는 내가 흔한 아시아계 이민자여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족의 자원이 집중되는 자녀로서는 어린 나이부터 가족의 미래가 내 어깨에 달렸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또 어떤 아이들은 늦은 나이에 새 언어를 배워야 하는 부모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큰 일을 맡기도 한다. 가정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이민 가정은 정착과 그 후에도 녹록지 않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족 구성원 간에 그 무게를 나누어진다. 어느 아이에게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알을 깬다는 행위가 더욱 힘들 수 있다. 특히 메이처럼 외동에 엄마와 가까운 딸은 더욱 그럴 것이다. 엄마에게 칭찬 받는 삶이 소중한 동시에 엄마의 헌신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메이는 ‘괴물’을 잠재워줄 정도로 특별한 친구들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영화의 스토리를 엄마인 밍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 있는 소중한 아이가 자신의 보호를 벗어나 달아나는 속터지는 상황이다. 심지어 거대한 짐승으로 변신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도 말이다. 이 영화의 감독과 스태프들은 인터뷰를 통해 레서판다 변신이 2차 성징(Puberty)의 메타포라고 밝혔지만, 밍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닌 듯하다. 민족적 뿌리를 중요시하는 이민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나 아닌 바깥 세상과 어울리며 서구화 되어가는 아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눈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딸의 친구 세 명 중 아시아계인 애비나 프리야 말고 백인인 미리엄을 특히 경계하는 모습에서 추측할 수 있다. 영화는 밍을 결코 선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딸의 감정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보호해야 할 아기 취급을 한다. 메이가 성애적 욕망을 알아가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려낸 그림을 들고 이 남자는 누구냐며 소리를 치고, 아무 상관도 없는 10대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약이나 하니 얼굴이 늙지 않냐는 폭언을 퍼붓는다. 메이의 가장 친한 친구 미리엄을 메이 앞에서 흉보고, 메이가 좋아하는 음악은 쓰레기 같다며 매도한다. 메이는 엄마와 아주 가까운 사이이지만, 이런 엄마의 선제 반응에 자기의 진짜 마음은 표현하지 못한 채 열세 살이 된다. 도미 시 감독은 2018년 단편 애니메이션 ‘바오’에서도 이런 중국계 이민자 엄마의 모습을 그린 적 있다. 생명을 얻어 아이가 된 바오 만두를 애지중지 키우는 엄마는 시간이 갈수록 아이가 다칠세라 아이의 일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종국에는 아이를 파괴하고 만다.

 

이런 엄마 밍의 슬픈 모순은 영화의 후반부에 그 이유가 밝혀진다. 엄마 밍에게도 메이와 거의 같은, 엄마와 딸 관계에서 오는 부담감과 상처가 있었다. 메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내면에는 자라나지 못한 ‘금쪽이’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는 아이가 만나는 첫 세계이자 첫 번째 저항의 대상이다. 내용이 어떻게 되었든, 사춘기 시절 아이의 저항은 부모의 모양대로만 빚어지는 것에서 떠나 자기 모양을 지켜내기 위함이다. 안전한 부모 자식 관계 안에서조차 저항의 경험을 연습해보지 못한 아이는 성장 후 다른 관계에서도 자기 주장을 하기 힘들어 하거나 부자연스럽게 대처할 확률이 높다. 

 

디즈니의 최근 애니메이션들을 복기해보면, 이러한 부모 자식 간 혹은 세대를 거듭한 가족 내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이 많았다. 2017년 작 ‘코코’의 미구엘은 선대 할아버지가 음악을 한답시고 가족을 저버렸다며 집안 어른들로부터 음악을 금지당한다. 작년에 나온 ‘루카’의 주인공 바다괴물 소년은 부모와 반목하며 뭍에서의 삶을 꿈꾼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개봉한 ‘엔칸토’도 마법 능력이 없는 손녀 미라벨이 마법을 지키는 것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할머니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 역시 모계로 내려오는 레서판다 변신 능력을 저주로 여기는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끼친 영향 그리고 엄마가 메이에게 끼치는 영향을 담는다. 엄마는 메이에게 사과하지만,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사과하지 않고 “나에게 사과할 필요 없다. 우리는 가족이잖니.” 하고 봉합하는 모습이 조금 아쉬운 점이다. 셋 중 가장 많이 사과하는 사람은 메이다. 다행히 메이에게는 그게 힘들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그런 메이의 사과에서 관계의 치유가 일어남을 볼 수 있다. 그런 점까지 아시아계 이민 가정다워서 당사자로서는 의도치 않게 서글퍼지기도 했다.

‘메이의 새빨간 비밀’이 공개된 첫 주에 트위터에서 ‘소동’이 있었다. 영화평론가 숀 오코넬이 올린 리뷰 때문이었다. 그는 트위터에 발췌하기를, “어떤 픽사 영화들은 보편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만 ‘메이의 새빨간 비밀’은 아니다. 이 작품의 타깃 관객은 몹시 협소하다. 당신이 이 타깃에 해당된다면 재밌게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감상 내내 피곤했다(Some Pixar films are made for universal audiences. Turning Red is not. The target audience for this one feels very specific and very narrow. If you are in it, this might work very well for you. I am not in it. This was exhausting).”라고 적었다. 그의 글은 즉시 큰 공분을 샀다. 어떤 영화에 몰입하고 말고는 비난받을 일이 아니지만, 중년 백인 남성이 평론가라는 권위를 통해 ‘이것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내뱉는 평에는 당사자의 자기 중심적 사고나 자격 의식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난이 쇄도하자 그는 리뷰를 삭제하고 사과했다.

 

보편성이라 해서 말인데, 이제까지 디즈니·픽사의 영화가 정말 보편적이기만 했나를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일단 대부분이 판타지 소재인 만큼 동물이나 사물의 의인화가 잦고, 아득한 미래나 바닷속 같은 상상 속의 세계를 소개하기도 했다. 물고기에는 이입할 수 있지만 아시아계 소녀에는 이입하기 힘들다는 말은 자신과 다른 인종과 성별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심지어 토론토는 앵글로 중심 도시이니 미국에 사는 백인 남성에게 그렇게 이질적인 공간도 아니다). 주제뿐만 아니라 줄거리 상의 작은 요소도 마찬가지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앤디처럼 아이가 자라서 대학교에 진학하는 건 어떤 사회와 계층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인사이드 아웃’의 아빠가 아이를 혼낼 때 “네 방으로 들어가!”에서 그치는 것 역시 문화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전개다. ‘몬스터 대학교’에서 보여주는 대학교 기숙사는 어딜 봐도 서구권 혹은 그런 영향을 받은 사회에서나 볼 법한 프래터니티 하우스다. 디즈니·픽사 작품들은 보편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전에, 미국 백인 중산층에게 당연한 것이 보편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오만은 아닌가 점검해봐야 할 것이다. 이제껏 백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은 많고 많았다. 오로지 성장 영화로만 국한해봐도 그렇다. 숫적으로 많으니 당연히 명작도 많았다. 비백인, 비남성 관객들은 이런 작품을 보면서 기꺼이 인지적으로 공을 들여 나와 다른 정체성의 주인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미 자신이 포함된 주류 정체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 이렇게 많은 세상에서 디즈니·픽사의 신작 한 편이 내 위주가 아니라 투정하는 건 어른스럽지도, 좋은 시민답지도 못한 태도다. 

 

영화 공개 초반에 흔하게 가해진 비판은 너무 ‘오그라든다’는 점이었다. 메이와 친구들의 ‘아이돌 덕후스러움’이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대는’ 모습, 그런 것을 벌 주지 않는 영화의 시선이 너무 ‘오글오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그라든다’는 감상은 불호 관객들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이 영화를 사랑한 관객들 역시 저마다 ‘오그라드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메이가 야한 그림을 그리다 엄마에게 들켰을 때, 엄마의 돌출 행동 때문에 망신을 당했을 때, 제발 “모두 꿈이었습니다.” 하며 없던 일이 되길 간절히 바랐지만 이야기는 무참히 그대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언제 ‘오그라든다’는 감정을 느낄까? 주로 특정 행동이 사회적인 표준(norm)에서 벗어났음을 느끼는 그 찰나의 망신스러운 순간이다. 메이가 친구 아닌 사람들 앞에서 성적인 욕망을 가졌단 사실이 강제로 드러난 순간, 수업 중 창밖에서 수위에게 끌려나가는 엄마를 발견한 순간, 메이도, 영화를 보는 우리도 모두 ‘오그라드는’ 경험을 한다. 다만, 영화를 사랑한 관객들은 이것이 골수를 찌르는 깊은 공감으로 받아들였고, 불호 관객들은 열세 살 여자아이의 유치한 행동으로 구분지었다. 영화는 이 격렬한 ‘오그라듦’을 다스리는 비결을 감정을 소통하는 친구들의 존재로 묘사한다. 불안과 창피함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안전한 존재는 곧 감정의 숨쉴 틈이고, 그래야 성숙할 수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그저 유치하고 격한 열세 살 소녀들의 모습이 ‘오글오글’해서 싫다고 밀어내다 이런 메시지를 놓치는 건 큰 손해가 아닐까.

디즈니 플러스에서는 ‘메이의 새빨간 비밀’과 함께 영화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제공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속 도미 시 감독은 메이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와 꼭 닮은 인물이다. 잘 웃고, 냅다 삐걱거리며 춤을 추기도 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자기 일을 너무나 사랑하는 모습이다. 감독 본인은 자신이 눈치가 없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는 스타일이라고 하지만, 눈치가 극도로 발달한 공동체주의 문화권 출신 창작자가 눈치를 안 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도미 시 감독은 ‘오그라든다’는 비난 따위 생각지도 않은 것처럼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소녀 메이를 그려냈다. 실은 나이 어린 여성들의 열정은 그것이 무엇을 향하든 사회적으로 조롱받아온 역사가 있다. 아이돌 문화도, 다이어리 꾸미기도, 외모를 치장하거나 혹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그 열정의 당사자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철없는 행동이라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소녀들의 저항은 계속 되고 있다. 이들이 자라나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나 사회 곳곳에서 자기 일을 하며 쌓아가는 여성의 시선은 이들을 무시한 사회에 균열을 내고, 결국 보다 포용적이고 다양한 세상을 만드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영화를 접하는 여자 아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자신감 있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그래서 디즈니·픽사가 이번 영화를 극장 개봉하지 않은 것은 몹시 아쉽다. 스크린 가득 거대하고 복실복실한 레서판다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