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고칼로리 음식을 먹고 나면 칼로리가 낮은 아메리카노를 마심으로써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가 담긴 신조어 ‘회개리카노’ 역시 널리 쓰였다. 농담처럼 보이는 이런 말들의 배경에는 영양 과다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식욕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죄책감이 있다. 그리고 이런 표현들이 여성 집단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퍼져 나갔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음식과 몸에 관해 느끼는 상시적 억압을 보여준다. 먹는 행위는 (살이 찌도록 하므로) 아름답지 않고, 나 자신을 (뚱뚱하게 만들어) 망가뜨릴 위험이 있다는 수치심과 공포로부터 우리 대부분은 자유롭지 못하다.
날씬한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성공의 완성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가장 쉽게 권장되는 방식은 ‘죽을 만큼 운동하고 죽지 않을 만큼 먹는’ 것이다. 그동안 방송된 다이어트 관련 예능 프로그램 역시 대개 극단적인 식이요법과 혹독한 운동, 나아가 지방 흡입 시술 등으로 출연자를 최대한 ‘바꾸어’ 놓곤 했다. 그러나 KBS ‘빼고파’의 진행자이자 다이어트 멘토인 김신영은 ‘3無’를 선언한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운동 없이, 체중계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닭가슴살 대신 다양한 식단을 통해 감량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배우 하재숙,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방송인 고은아, 출산과 육아로 인해 체중이 늘어난 안무가 배윤정, 다이어트 때문에 면역 체계가 무너질 만큼 고생했던 브레이브걸스의 멤버 유정, 1주일 동안 매번 새로운 다이어트에 도전하는 과정을 콘텐츠로 만들어온 유튜버 ‘일주어터’ 김주연, 과도한 다이어트로 인해 담낭염에 걸린 적 있는 뮤지션 박문치 등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섯 명의 여성이 그를 따른다.
카복시, 삭센다, 한약 다이어트, 무작정 굶기 등 많은 한국 여성이 시도하고 실패했던 그 과정을 그들 역시 지나왔기에 시행착오의 경험은 빠르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대중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훨씬 심각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데뷔한 고은아는 심각한 외모 강박과 우울증, 공황장애에 시달렸고, 공백기를 가진 뒤 개인 방송을 시작했을 때 체중이 불어난 모습으로 등장하자 악성 댓글 폭격을 맞았다. 2019년 드라마 ‘퍼퓸’의 배역에 맞추어 감량했던 하재숙은 당시 SNS에 “배우 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 엄청나게 독서를 했고 악기와 춤을 배웠고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그저 날씬해지는 것이 자기 관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게 서글프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언론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는 기사마다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20kg 감량’이란 문구가 “내 호인 줄 알았다.”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물론 ‘빼고파’ 역시 미디어에서 여성의 몸을 다루어온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출연자들이 신나게 운동할 때 자료 화면으로 제시되는 롤 모델은 납작한 배와 잘록한 허리를 지닌 걸 그룹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다이어트를 지향하는 기획 방향과 군살을 빼야만 민소매를 ‘당당하게’ 입을 수 있다는 표현이 충돌할 때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월경이나 변비 같은 생리 작용에 관해 여성들이 거리낌 없이 이야기 나누고, 운동기구에 쌓인 먼지를 보며 서로 놀려댈 때 이 프로그램은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왁자지껄한 재미를 확보한다. 168cm에 48kg처럼 무리한 기준이 여성의 이상적인 신체상으로 제시되어온 사회에서 “패러글라이딩 몸무게 제한이 100kg이다. 제가 지금 95kg이라서 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무서우니까 체중을 조금 줄여서 여유롭게 하고 싶다.”(일주어터)라고 즐겁게 말하는 여성과 그에게 공감하며 각자 경험을 꺼내놓는 여성들이 앞으로 어떤 좌충우돌 속에서 자신의 몸과 가까워질지 좀 더 지켜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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