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음악계만 보자면, 오늘날 팝과 힙합의 경계는 꽤 희미해졌다. 프로덕션 면에서 힙합이 팝 속으로 깊숙이 침투하면서 힙합스러운 팝, 팝스러운 힙합이 넘쳐나는 중이고, 보컬 면에서도 싱잉에 기반한 래핑이 대유행하며 예전처럼 랩과 노래를 분명하게 분류하기 어려운 사례가 즐비하다. 단지 가사에서의 차이가 극명할 뿐이다. 물론, 이 부분이 장르의 경계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지점 중 하나지만, 어쨌든 음악적으로 팝과 힙합은 그 어느 때보다 크로스오버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K-팝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아이돌 음악 중에는 힙합의 트렌드인 트랩(Trap), 래칫(Rachet), 드릴(Drill) 뮤직의 프로덕션적인 부분만 차용하고 K-팝 특유의 보컬 어레인지와 멜로디를 가미하여 완성한 곡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개중엔 장르적 색채를 더욱 뚜렷하게 띠는, 그러니까 힙합으로 무게중심이 분명하게 쏠린 곡이 간혹 있다. 그저 노래가 아닌 랩을 해서가 아니다. 가사적으로도 힙합의 특성을 계승한다. 가장 최근의 결과물로서는 세븐틴 리더즈(SVT LEADERS)가 발표한 신곡 ‘CHEERS’가 그렇다.
그들은 곡에서 지금까지의 성장과 성공을 자축 및 과시하고 야망까지 드러낸다. 이는 힙합 아티스트가 자주 펼쳐놓는 성공 서사와 맞닿아 있다. 힙합에서의 성공 서사는 스웨그(Swag), 또는 브래거도시오(braggadocio/*주: 사전적 의미는 허풍, 허세지만, 랩에서는 표현적 과시가 섞인 자기과시를 일컫는다.) 가사의 중요한 배경으로서 드러나거나 그 자체가 스토리텔링을 통한 한 편의 극적인 오디오 드라마가 된다. ‘CHEERS’는 따지자면 전자다. 이 곡이 힙합을 표방하며 브래거도시오 가사의 랩을 선보인 최초의 아이돌 음악은 아니지만,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의 시도 중 손꼽을만하다. 그간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 간략하면서 함축적으로 표현한 점이 유효했다. 우지(WOOZI)가 뱉은 “머릿수 많아서 밥값은 어쩌냐 했어”란 라인은 좋은 예다. 성공 가능성은 엿보이지 않는데, 멤버 수는 많은 그룹을 두고 업계에서 나오기 마련인 냉소적인 반응이 그 대상인 아티스트의 입을 빌어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그들이 직면했던 과거의 상황이 단 한 줄로 정리됐다. 위태로웠던 세븐틴 리더즈의 상황은 이후 나오는 또 다른 우지의 벌스에서 “모두가 우릴 보고 망할 거라고 했어”란 라인을 통해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아이돌 그룹이기에 쓸 수 있는 동시에 쓰기 어려울 가사여서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에스쿱스(S.COUPS)가 맡은 벌스는 랩 가사 특유의 쾌감을 고스란히 전한다. “우린 지하 방에서 건물을 올리지”. 2012년 발표되어 힙합과 아이돌 음악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 결정적 트랙, 지드래곤(G-Dragon)의 ‘One Of A Kind’에서 자기과시가 절정에 달했던 “내 노랜 건물을 올리지”란 라인을 재치 있게 인용했다. 이런 식의 라인 비틀기는 래퍼들의 가사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언제나 즐거움을 주는 요소다. 이번처럼 말이다.
이렇게 흥미로운 포인트를 지닌 가사와 안정적인 랩 퍼포먼스가 결합하여 감흥을 배가했다. 혹자들이 잣대로 삼듯 ‘아이돌치고는’이란 전제는 불필요하다. 아이돌 그룹이 힙합을 표방한 곡에서의 래핑은 과잉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슬픈 주제일 땐 애절함을 더하려 애쓰듯 쥐어짜내는 래핑이, 자기과시적, 혹은 다른 심각한 주제일 땐 호전적인 면모를 최대한 호소하려는 듯 과하게 내지르는 래핑이 구사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종종 작위적인 느낌의 플로우가 형성된다. 하지만 세븐틴 리더즈의 랩은 딱 필요한 순간까지만 달아오르다가 이탈하기 전에 정상궤도로 돌아온다. 그래서 몰입감을 깨지 않는다. ‘CHEERS’의 랩 디자인은 만족스럽다.
철저하게 트렌디한 힙합 노선을 따르면서도 아이돌 그룹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은 가사, 플루트와 피아노 조합이 메인 루프를 형성하고 808드럼이 뒤를 받친 탄탄한 프로덕션 그리고 대중적인 멜로디의 노래 파트를 삽입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지지 않는 구성까지, K-팝 팬과 힙합 팬 전부를 아우를만한 곡이다. 무엇보다 ‘CHEERS’는 적어도 곡 단위에서만큼은 오늘날 아티스트의 정체성이 힙합이냐 아니냐의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결국 중요한 건 장르적 완성도를 통한 설득력이며, ‘CHEERS’는 그 부분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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