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진 대표의 의도는 시장에 통했다. 쏘스뮤직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FEARLESS’ 뮤직비디오의 일별 조회 수는 활동이 종료된 직후에도 일주일 동안 하루 약 44만~53만 뷰를 꾸준히 기록했다. 이는 활동 5주 차의 일별 조회 수와 거의 유사한 추이로, 활동 종료 이후에도 뮤직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지속됐음을 보여준다. 지난 6월 1일 세계 최대 음악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에서는 르세라핌의 월간 청취자 수가 50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르세라핌의 음악,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등의 콘텐츠들이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장기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같은 경향을 보였다. 르세라핌은 총 5주 동안의 활동으로 각종 음악 방송에서 그들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그사이 한국에서 가장 점유율이 높은 음원 서비스인 멜론의 일간 차트에 100위로 진입했던 ‘FEARLESS’의 순위는 꾸준히 상승했고, 활동을 종료한 6월 5일 이후에도 7월 7일까지 10위권 안에 진입한 상태를 유지했다. 특히 멜론 6월 월간 차트에서도 9위를 기록하면서 5월 대비 13계단 상승한 성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르세라핌에 대한 초반의 큰 관심이 하이브 레이블즈와 영입 멤버가 가진 화제성에서 기인했다면, 콘텐츠에 대한 호응이 이 관심을 팀에 대한 장기적인 반응으로 점차 바꿨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르세라핌(LE SSERAFIM)이라는 팀명은 데뷔 앨범의 핵심 메시지인 ‘I’M FEARLESS’를 애너그램 방식으로 바꾸어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소성진 대표는 “브랜드 자체의 스토리텔링”을 의도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르세라핌의 앨범 ‘FEARLESS’는 김채원과 사쿠라를 비롯한 멤버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수록 곡 ‘Blue Flame’의 작사에는 멤버 허윤진과 김채원이 참여하기도 했다. 세상에 두려움 없이 맞서겠다는 포부와 욕망에 대한 긍정은 르세라핌의 멤버들이 데뷔를 하며 이야기한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걸그룹이 데뷔부터 스스로의 이야기를 반영한 자신의 일기, 더 나아가 앞으로 이어질 역사를 말하는 것은 단지 숫자로서의 매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재 걸그룹 시장의 변화를 보여준다. 소성진 대표가 르세라핌을 론칭한 이유에 대해 한 말은 이 변화의 의미를 보여준다. “아티스트의 생각을 노래하는 K-팝 걸그룹 제작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단기적인 시장 상황이나 소비자가 무엇을 요구하느냐 이전에,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가 이 시대 걸그룹의 시작점이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미국 음악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아티스트라 할 수 있는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 등은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 노래한다. 여성이 결코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벨라 포치의 ‘Build a B*tch’는 작년 5월 발표된 이후 뮤직비디오 조회 수 4억 뷰를 돌파할 만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아티스트들이 다루는 주제는 일정 기간 동안 음악 시장에서 호응을 얻어왔던, 사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노래를 넘어 스스로의 서사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는 중이다. K-팝 걸그룹 시장 안에서도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소녀시대는 ‘The Boys’로 2011년 써클차트(구 가온차트) 연간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보이그룹이 아닌 걸그룹 시장에서도 팬덤을 기반으로 한 음반 판매량 상승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줬다. 블랙핑크는 유튜브 구독자 수로 전 세계 아티스트 중 최상위를 다툴 정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큰 인지도를 얻었다. 트와이스와 아이즈원은 한일 시장을 중심으로 음반 판매량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사이 K-팝 걸그룹 시장에서 주체성이나 당당한 태도를 강조하는 소위 ‘걸크러시' 콘셉트가 유행하기도 했다. 요컨대 K-팝 걸그룹 산업의 역사는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한계로 여겨져오던 것들을 조금씩 돌파해온 과정과도 같다. 아티스트의 욕망 그 자체를 앨범의 핵심 스토리텔링이자 팀명으로 삼는 르세라핌의 등장은 그래서 상징적인 동시에 논쟁적이라 할 수 있다. K-팝 산업과 글로벌 음악 산업, 팬덤을 중심으로 한 시장과 대중을 중심으로 한 시장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아티스트와 대형 기획사에서 제작하는 K-팝 그룹의 경계에서 탄생한 이 걸그룹은 과연 시대적인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음악 산업의 명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것은 K-팝 산업의 한복판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점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연 매출 1,000억 원을 기록하는 걸그룹이 시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소성진 대표의 말은 단순히 한 팀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바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흉짐도 나의 일부”(‘FEARLESS’)라 노래하는 걸그룹은 과연 얼마만큼의 상업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K-팝 산업을 둘러싼 수많은 경계 그 어딘가에서, 걸그룹이 본인의 흠결과 욕망을 노래하는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졌다. 그 영역에서 발생하는 상업적인 성공의 규모는 앞으로 K-팝 걸그룹의 역사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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