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코는 아이돌에서 힙합 아티스트라는 정체성을 획득하고 성공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여러 배경이 작용했다. 굳이 ‘아이돌치고는’이라는 방어기제를 투사할 필요 없는 랩 실력, 어느 순간 아이돌 래퍼와 힙합 래퍼를 나누는 것이 무색할만큼 경계가 흐릿해진 한국 힙합 씬의 상황 그리고 본인의 곡은 물론, 다른 아티스트의 곡까지 작업을 진두지휘할 줄 아는 프로듀서로서의 자질 등등.
지코는 트랩 뮤직(Trap Music)으로 대표되는 2010년대 이후의 미국 메인스트림 힙합 사운드를 발빠르게 차용하여 윤기나는 프로덕션을 선보여왔다. 나아가 다른 아티스트와의 작업에선 힙합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그동안 미디어와 음악 팬들 사이에서 지코의 랩은 많이 거론되었다. 이번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은 프로듀싱에 관해 얘기해볼까 한다. 그가 내외적으로 프로듀싱한 주목해야 할 다섯 곡을 통해서.
지코 - ‘말해 Yes Or No (Feat. PENOMECO, The Quiett)’ (2015)
지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 중 하나이자 그가 힙합 아티스트로서 지향해온 음악색을 대표하는 곡이다. 트랩 뮤직에 기반을 둔 이 느릿한 템포의 뱅어는 지코가 가장 잘하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원래는 여자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육지담의 미션 곡으로 공개됐다가 약 8개월 뒤 더콰이엇과 페노메코를 대동한 지코 버전이 발표됐다. 비트는 그대로지만, 랩의 주체가 바뀌면서 전혀 다른 감흥을 준다.
특히 새로운 후렴구가 신의 한 수다. 2010년대를 기점으로 트랩 뮤직의 시대가 열리면서 보다 단순한 구성과 반복을 통한 중독적인 후렴구가 각광받게 되었다. “말해 yes or no”의 후렴은 이 같은 추세에 완벽히 부합한다. 비트와 랩도 수준급이지만, 이 곡이 많은 리스너의 귀를 잡아끈 데에는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후렴구의 영향이 컸다. 그저 비트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프로듀싱을 하는 래퍼란 정체성이 제대로 빛난 순간이었다.
슈퍼주니어 - ‘2YA2YAO!’ (2020)
슈퍼주니어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 리패키지 ‘TIMELESS’의 타이틀 곡으로 지코가 만들어 화제를 모았다. 프로덕션만 따진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건대 지코의 커리어에서 최고 자리를 다툴 만하다. 그만큼 흠잡을 곳 없이 타이트하다. 무엇보다 메인 루프가 강렬하다. 생생한 관악 사운드와 디지털 가공된 소리의 경계에 걸친 듯한 루프가 강력한 타격감으로 곡이 진행되는 내내 긴장감을 안긴다.
후렴으로 가는 길목에선 서정적인 신스 파트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정반대 무드의 변주가 메인 루프에서 전해지는 쾌감을 배가한다. SM 특유의 보컬 스타일 및 구성 그리고 멜로디 라인과 동떨어지지 않으면서 힙합의 장르적 특징이 적절히 녹아들었다. 트랩 리듬이 잠시 틈입하는 후반부에서의 두 번째 변주도 프로덕션적인 묘미를 더한다. 여러모로 지코의 영리한 프로듀싱이 돋보이는 곡이다.
화사 – ‘Kidding’ (2020)
화사의 첫 번째 미니 앨범 ‘María’에 수록된 ‘Kidding’은 비단 힙합뿐만 아니라 미국 메인스트림 음악계의 트렌드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지코의 프로덕션적 특징이 잘 드러난 곡이다. 일렉트로팝과 아반트-팝(avant-pop)의 경계에 선 음악 안에 싸늘한 보컬이 어우러졌다.
한편으론 보컬 스타일, 보컬에 가해진 디지털 가공, 무드, 멜로디 전개 방식 등 여러모로 이 계열의 아이콘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음악을 떠오르게 한다. 카피와 적절한 레퍼런스는 한 끗 차이다. 다행히 화사와 지코의 조합은 후자다. 기존에 화사가 지닌 캐릭터성을 가사와 보컬에 잘 녹여낸 지코의 프로듀싱이 빛을 발했다.
김세정 – ‘꽃길 (Prod. By ZICO)’ (2016)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에서 선보였던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코가 프로듀싱하고 그룹 구구단의 세정이 부른 곡이다. 시작을 열고 인스트루멘탈을 주도하는 건 피아노 아르페지오다. 이후 보드라운 기타 리프가 내려앉아 무드 조성을 돕고, 후렴에 이르러 감정을 고조시키는 현악까지 가세하여 서정적인 가요 발라드 구성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점점 고조되던 세정의 보컬과 현악 파트가 적절한 순간 절제된 덕에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아무런 정보 없이 이 곡을 듣는다면, 지코의 이름을 떠올릴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있긴 할까?! 이처럼 지극히 전통적인 발라드라니…. 그만큼 ‘Prod. By ZICO’가 달린 “꽃길”은 다소 충격적이다. 트렌디한 힙합을 발판 삼은 지코가 만든 발라드라는 점에서 그렇다. 동시에 그래서 프로듀서 지코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저 다른 시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꽤 괜찮은 발라드를 만들어냈으니까.
지코 - ‘새삥 (Prod. ZICO)(Feat. 호미들)’ (2022)
Mnet의 오리지널 댄스 시리즈 ‘스트릿 맨 파이터’의 계급 미션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곡으로 지코의 주력 장르인 랩/힙합 프로덕션이 돋보인다. 얼핏 그의 음악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트렌디한 힙합 사운드인 것 같지만,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핵심은 키보드다. 808드럼이 주도하는 비트는 전형적인 트랩 뮤직에 기반을 두었으나 건반 연출에서 2000년대 초반 YG표 힙합의 향이 진하게 스며 나온다.
물론 건반이 주요하게 부각되어 긴장감을 자아내는 구성은 뉴올리언스 바운스나 애틀랜타의 트랩 뮤직에서도 흔하다. 다만 극단적으로 내려앉으며 멜로디를 형성하는 ‘새삥’에서의 건반 루프는 원타임, 지누션 그리고 페리(Perry)가 만든 곡에 인장처럼 찍혔던 사운드를 떠올리게 한다. 지코가 이를 의도한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미국 힙합의 트렌드와 한국 힙합의 과거가 만나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흥미로운 곡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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