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의 ‘Indigo’는 그가 믹스테이프가 아닌 정식 발매하는 첫 솔로 앨범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미리 공개된 뮤지션들의 면면으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미국 음악계의 전설적인 뮤지션부터 한국의 인디 뮤지션에 이르기까지 참여한 뮤지션의 면면은 ‘Indigo’가 대체 어떤 결과물로 나올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게 만든다. 12월 2일 ‘Indigo’ 공개를 앞두고, 어제에 이어 ‘Indigo’에 참여한 뮤지션들에 대해 음악평론가 김도헌과 강일권이 두 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 주)
에리카 바두(‘Yun’)
이 위대한 업적을 쌓은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범상치 않은 이름부터 얘기해야겠다. 내면의 자아를 뜻하는 이집트 용어 ‘Kah’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재즈 리프 스캣 사운드 ‘Badu’를 결합한 이름처럼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음악은 심오하고 놀랍다. 과장이 아니다. R&B/소울을 비롯해 재즈, 힙합, 얼터너티브 음악의 황홀한 혼합물. 그가 주조한 작품은 때론 시대를 앞서갔고, 때로는 뒤안길을 돌아보게 했으며, 장르의 뿌리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R&B 음악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네오소울 무브먼트’의 최전방에서 활약한 결과 ‘네오소울의 여왕’이란 칭호가 뒤따른다. 바두는 모든 면에서 대체 불가능한 아티스트다. 만약 그리스 신화 속의 세이렌(Seiren)이 실존했다면, 그의 보컬은 소울풀한 버전의 세이렌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신비롭고 고혹적이다. 마치 사그라질 듯하다가 피어오르길 반복하는 불꽃 같다. 그의 많은 대표곡 중 ‘On & On’(1996)을 들어보면 체감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Woo’(2003) 같은 곡에선 데뷔 이전에 랩 그룹을 결성했던 이력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래퍼처럼 리듬을 타며 노래를 뱉는다. 그야말로 독보적인 음색과 리듬감을 지녔다.
음악관도 남다르다. 라디오에서 전파를 타는 것과 싱글 히트를 신경 쓰기보다 블랙 뮤직이 지닌 그루브와 담고 싶은 메시지에 집중해왔고, 이는 리스너뿐만 아니라 동료 아티스트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바두가 설파하는 메시지는 광범위하며 사색적이다. 사랑의 여러 측면과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 마약과 총격이 난무하는 커뮤니티와 여전히 배고픈 약자의 현실에 대한 고민 그리고 소울 음악 못지않게 사랑하는 힙합에 대한 헌사까지 아우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담았던 데뷔작 ‘Baduizm’(1997) 이후 발표한 모든 앨범이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그래서 단 한 장의 앨범만 들을 수 있다면, ‘Baduizm’을 뽑겠지만, 가능한 한 전작을 다 들어보길 권한다. 비록 새로운 정규 앨범을 오랫동안 내놓지 않았음에도 바두의 존재감은 여전히 묵직하다. 이 범우주적 재능을 지닌 아이콘과의 합작이 과연 어떤 결과물로 귀결되었을지, 현재로선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앤더슨 팩(‘Still Life’)
닥터 드레(Dr. Dre)의 2015년 작 ‘Compton’에서 유명 게스트를 압도하는 지분으로 음악계를 놀라게 한 앤더슨 팩(Anderson .Paak)은 이후 독보적인 음악 세계와 탄탄한 커리어를 구축하며 드레의 혜안이 옳았음을 명증했다. 위조할 수 없는 인장과도 같은 음색으로 노래하고, 힙합과 R&B의 경계를 자유로이 세웠다가 허무는 음악을 주조한다. 그는 달변을 장착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사회의 치부와 문제를 거침없이 공론화하는 리리시스트(Lyricist)이며, (장르적으로) 전통주의와 전위주의를 거리낌 없이 넘나드는 프로듀서이자 때론 조연의 자리에서 다른 이와의 합을 즐기는 멀티 연주자다.
특히 팩은 장르의 본질적인 측면, 이를테면 R&B/소울과 힙합의 역사 및 원형적 특징을 중요시하면서도 매너리즘이나 근본주의에 함몰되지 않는다. 코크 랩(Coke Rap)의 아이콘 푸샤 티(Pusha T)가 조력한 ‘Brother’s Keeper’ 같은 곡을 들어보라. 알 그린(Al Green)의 명곡 ‘Love and Happiness’를 떠올리게 하는 기타 리프가 잔뜩 긴장된 무드를 조성한 가운데, 특유의 랩과 노래 사이를 가로지르는 팩의 보컬이 단번에 맘을 휘어잡는다. ‘Leave The Door Open’에서의 달콤하고 소울풀한 보컬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가장 많은 호평을 이끌어낸 ‘Malibu’(2016) 포함 넉 장의 솔로 앨범과 힙합 프로듀서 날리지(Knxwledge)와의 듀오 프로젝트 노워리즈(NxWorries) 그리고 2021년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브루노 마스(Bruno Mars)와의 실크 소닉(Silk Sonic) 프로젝트까지, 탁월한 완성도로 마감된 그동안의 디스코그래피 또한 이를 방증한다. 2021년 ‘에스콰이어(Esquire)’와 가진 인터뷰에서 BTS와의 컬래버레이션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연결 좀 해보려고 노력 중”이라며 장난스레 답했던 그가 팀의 리더 RM과 호흡을 맞췄다. 에리카 바두와 함께 가장 기대되는 조합이다.
타블로(‘All Day’)
그룹 에픽하이(Epik High)는 한국 힙합에서 상징적인 이름이다. 드렁큰 타이거, 리쌍, 다이나믹 듀오 등과 함께 2000년대 한국 힙합의 첫 번째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 중심에 타블로가 있다. 에픽하이의 핵심이자 예나 지금이나 타이트한 랩 스킬을 보유한 몇 되지 않는 1세대 래퍼다. 초창기에 활약한 래퍼 대부분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래핑을 앞세운 신세대 래퍼들의 급부상과 변화한 트렌드를 버거워하며 설 자리를 잃어갈 때도 타블로는 굳건히 본인의 영역을 지켰다.
선이 다소 얇은 톤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그의 래핑은 아주 옹골지다. 비트에 쫀득하게 들러붙는가 하면, 차분하게 비트를 밟아 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날카롭게 내리꽂힌다. 멜로딕하고 감성적인 팝 랩(‘Fly’, ‘우산’)부터 둔탁하고 비장미 넘치는 붐뱁 힙합(‘Lesson 3 (MC)’, ‘Nocturne (Tablo’s Word)’)과 서정적인 무드로 가득한 힙합(‘Airbag’)까지, 타블로의 음악은 대중과 마니아, 가요와 장르 음악 사이에서 비교적 균형을 잃지 않으며 많은 이를 설득했다.
문학적인 가사 또한 오늘날 그를 최고의 래퍼 중 한 명으로 일컫는 이유다. 타블로는 시적 은유와 다중적인 의미를 심는 것에 능하다. 살면서 겪은 일련의 고통을 비로소 드러낼 때도, 자극적인 미디어를 향해 신랄한 메시지를 던질 때에도 그리고 래퍼의 자부심을 과시할 때도 단순하게 라인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는 명백한 리리시스트다. 2011년에 발표된 첫 솔로 앨범 ‘열꽃’은 이상의 장점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물론 타블로의 탁출한 랩은 지금도 건재하다.
마할리아(‘Closer’)
그동안 영국의 R&B/소울 아티스트 대부분은 여느 나라의 경우와 달리 미국 음악계의 트렌드에 연연하지 않는 행보를 보여왔다. 트랩 소울이 유행하는 와중에도 꿋꿋이 1960~70년대 레트로 소울 혹은 1990년대 R&B를 근간으로 삼거나 퓨전을 통해 아예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예: 리듬 앤 그라임). 분명히 그들의 음악엔 특별한 것이 있다. 마할리아(Mahalia)의 음악만 들어봐도 그렇다.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 에리카 바두, 로린 힐(Lauryn Hill),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질 스콧(Jill Scott) 등 그가 음악적 영향으로 꼽은 아티스트를 살펴보면, 역시 트렌드에 대한 강박 따위는 없어 보인다. 보컬부터 팝 음악과의 경계를 희미하게 한 오늘날의 R&B 싱어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러니까 슬로 잼(Slow Jam)에 최적화된 끈적한 바이브와 기교는 줄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R&B에 기반을 둔 보컬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할리아의 음악이 마냥 예스러움에 물길을 댄 부류는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멜로딕한 R&B를 연상하게 하는 곡이 주를 이룬다. 2019년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 앨범 ‘Love and Compromise’를 들어보라. 권태롭지 않은 구성과 사운드, 더불어 그윽하게 살아나는 멜로디의 힘이 상당하다. 단번에 귀를 휘감기보다 은근하게 스며들어 사로잡는 작품이다. 2020년에 열린 영국의 저명한 대중음악 시상식 ‘모보 어워즈(MOBO Awards)’에서 ‘Best Female Act’와 ‘Best R&B/Soul Act’ 부문을 수상한 그는 현재 가장 주목해야 할 R&B/소울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폴 블랑코 (‘Closer’)
멜로딕한 흐름을 중시하며 노래하듯 랩을 하는 싱잉 랩(Singing Rap) 스타일은 한국 힙합의 트렌드 중 하나를 대변하는 키워드다. 그리고 폴 블랑코는 현재 한국 힙합 씬에서 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랩과 노래뿐만 아니라 탄탄한 프로듀싱 능력까지 갖췄으며, 트랩부터 얼터너티브 R&B까지 능숙하게 오간다. 특히 어릴 적 이민을 간 캐나다에서의 생활을 녹인 가사가 여느 한국 래퍼들의 것과 다른 결의 감흥을 주곤 한다. 인종차별 경험을 언급하는 ‘사이렌 Remix’(호미들)에서의 벌스가 대표적이다.
그는 창모, 더 콰이엇,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처럼 유명 래퍼들의 곡에 피처링하며 2018년 이후 빠르게 인지도를 쌓았다. 함께 작업한 이들의 이름값이 아직 무명이었던 폴 블랑코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탄탄한 실력과 완성도를 유지한 결과물 덕분이다. 인맥 힙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소리다. 한편 그는 슈퍼스타가 된 잭 할로우(Jack Harlow)의 ‘Hey Big Head’와 ‘Crème’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폴 블랑코의 활동 반경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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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M ‘Indigo’의 뮤지션들 - 1202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