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바로 지금이라고요!” 26년 만에 부활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관객 수 360만 명을 넘고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국내 총 순위 2위에 자리 잡았고(2023년 2월 27일 기준), ‘슬친자(‘슬램덩크’에 미친 사람)’, ‘농놀(농구 놀이, ‘슬램덩크’ 영화를 재관람하거나 만화책을 정주행하는 행위)’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강백호가 부상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산왕전의 라스트 8초, 그 찰나의 ‘지금’이 역설적으로 영원할 수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래서 옛 ‘슬램덩크’ 애니메이션과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모두 강백호를 연기한 강수진 성우에게 물었다. ‘지금’의 강백호와 성우로서의 ‘영광의 시대’에 관하여. 

 

26년 만에 다시 강백호로 돌아왔어요.

강수진: 26년이 지나도 강백호는 여전히 강백호로 남아 있죠. 그때 청소년이었던 분들이 30~40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기억 속에는 다혈질에 농구를 좋아하는 소년 강백호가 남아 있어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가슴속의 추억을 소환하는 의미가 있어요. 정작 저는 이제 50대의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26년 전 그 느낌을 연기로 되살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죠. 강백호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던 시리즈에 비하면 대사 분량은 굉장히 줄었지만, 극에서 중요한 부분을 환기시켜준다거나 격정적으로 전환시켜준다거나 하는 흐름의 포인트에서 일종의 히든 카드, 조커 같은 역할을 해서 대사 분량에 비해 존재감이 뚜렷한 역할이었어요. 그래서 대사 분량이 적어도 쉽지만은 않았고요.

 

강수진 성우가 연기한 강백호는 스토리도, 성우도 이전과 달라진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죠.

강수진: 산왕전은 만화책으로만 다뤄졌고 애니메이션으로 연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미 책을 통해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은 없었는데요. 같은 팀원이나 산왕팀으로 참여했던 성우들이 예전에 했던 성우들이 아니어서 앙상블이 잘 이루어질까라는 염려를 조금 하긴 했지만 워낙 연기를 잘하는 후배들이어서 그 친구들을 믿고 저는 제 연기만 잘했죠.(웃음) 극장용 애니메이션 더빙은 일일이 혼자 목소리를 따서, 상대 성우와 호흡을 맞춘다는 개념보다 화면 속 캐릭터와 호흡을 맞춘다는 개념으로 연기해요.

 

강백호와 2023년에 다시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어요?

강수진: 감성적으로는 여전히 철부지이길 바라서 그 느낌을 다시 연기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웃음) 옛날 애니메이션 시리즈와 극장판이 원작자의 연출 의도나 콘셉트가 달라지는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맞추는 게 조금 힘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20분이라는 짧은 에피소드 안에서 흥미를 확 이끌어내야 되고, 다음 편을 기대하게 해야 됐어요. 그래서 캐릭터나 스토리, 연출 방향이 과장되고 코믹한 임팩트에 비중을 많이 뒀다면, 극장판은 2시간 남짓하는 시간에 완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강백호도 바뀌었죠. 예전 강백호는 천방지축, 단순하고 막무가내에 코믹한 요소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과장되고 코믹한 연기 비중을 두고 소리도 지르곤 했는데요. 이번에는 다혈질이라는 캐릭터의 기본적인 성격을 유지하면서 과장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강백호 캐릭터는 강수진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강백호라는 인물의 자연스러움을 주려고 했다고 이야기했죠.

강수진: 배우 본연의 성향과 극중 작품 속 인물의 유사성이 많을 때, 소위 이미지 캐스팅이 됐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강수진이라는 사람 본연의 캐릭터와 ‘슬램덩크’의 강백호는 간극이 너무 커요. 전 강백호처럼 다혈질도 아니고요. 키가 크지도 않고요. 건장하지도 않고요.(웃음) 저랑 완전히 다른 인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제 본연의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면 아마 이미지 매칭이 안 되겠죠. 그래서 본연의 나로서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극중 인물인 강백호의 성격을 분석하고 그 성격의 캐릭터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할지를 분석해서 과장되지 않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거죠. 대본에 나오는 말과 행동은 최종적인 결과예요. 이 결과적인 언행이 있기까지 어떤 심리적 배경이 있는지, 이런 캐릭터가 형성되기 위해 어떤 원인이 저변에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반드시 있어야 돼요. 어떤 캐릭터든지 간에 심리 구조가 저랑 흡사할 경우도 있고 완전히 동떨어질 경우도 있죠. ‘카드캡터 체리’의 오청명 같은 경우도 저하고 많이 동떨어진 캐릭터여서 여러 가지로 힘들었는데, 실제 생활 속에서 오청명 같은 사람은 찾기 쉽지 않으니까 그 캐릭터에 근접하기 위해 다른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비슷한 인물을 참고하며 그런 유형의 사람의 심리나 행동을 공부하거나 관찰하기도 하고 흉내 내보기도 하죠.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카드캡터 체리’의 오청명은 같은 성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극단에 있는 캐릭터예요. 

강수진: 성우에게 목소리란 배우들의 외모와 똑같아요. 배우들이 극중 인물로 분하기 위해 분장이나 의상을 통해 외모를 바꾸잖아요. 그런데 외모만 바뀌고 등장인물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괴리가 생기는 것처럼 성우들도 극중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분석해서 내 옷으로 만드는 과정을 충실히 해야 하는 거죠.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장르가 무엇이고 대상 연령층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해요. 애니메이션은 아무래도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콘텐츠가 많아서 소구 대상이 어린이냐, 청소년이냐, 청소년이라면 10대 소녀들이냐, 10대 소년들이냐가 참 중요해요. 심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더라도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아동 심리 구조 같은 것들을 반드시 연구해야 돼요. 목소리만 애 목소리를 낸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감성의 눈높이가 아이가 돼야 돼요. 어릴수록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직감적으로 느끼거든요.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말의 내용은 대사를 통해 전달되지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감정과 정서는 전이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의 감성 눈높이가 그들의 눈높이와 맞춰져 있어야 어떤 말을 하든 괴리감 또는 위화감을 안 느낀다는 거죠.

 

강백호와 오청명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예요. 그때가 소위 ‘중저음 목욕탕 목소리’에서 미성으로 목소리 트렌드가 변화하던 시기이기도 했다면서요?

강수진: 1990년대에 새로운 공중파였던 SBS가 생기면서 애니메이션 편성이나 외화 편성 비율이 갑자기 늘었고, 케이블 채널이 생기면서 애니메이션 물량이 두세 배 이상 늘었거든요. 애니메이션에서 청소년 목소리가 많이 필요했던 거예요. 사실 애니메이션 시장이나 게임 시장의 확장으로 수요가 점점 더 많아지던 환경적 변화에 덕을 좀 본 운 좋은 성우이긴 합니다.(웃음)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강백호의 명대사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가 떠오르네요. 성우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웃음)

강수진: 명예를 얻거나 상을 받는 게 다른 분들이 저에게 주는 영광이라고 한다면 제가 느끼는 영광은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역할을 했을 때, 좋은 작품을 해서 내가 즐거울 때예요. 많은 연기를 하지만 늘 연기가 즐거운 건 아니거든요. 연기하는 작업만큼은 만족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때때로 즐겁게 연기하는 순간순간이 영광스러워요. 노력해서 결과적으로나 수치적으로 성공을 나타낼 수 있는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본인은 성취감이 없거나 불만인 경우도 있잖아요. 성취감과 만족이라는 건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거여서 나만이 느끼는 거고. 연기할 때마다 희열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걸 계속 갈구하면서 느끼려고 하는 게 연기 작업인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 ‘강수진과 빛의덕후단’의 ‘구독 5만 기념 특별 QnA’ 영상에서도 가장 연기하기 어렵거나 힘들었던 캐릭터에 대해 “참 많이 있습니다. 쉬운 건 하나도 없었다.”고 했어요. 

강수진: 성우 연기는 대사를 외울 필요도 없고, 의상을 갖춰야 될 필요도 없고, 마이크 앞에서 보고 읽으면서 연기하면 되니까 볼펜만 있으면 되는 줄 아시는 분들이 꽤 있어요. 특히 애니메이션이나 외화 더빙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우리말로 다시 카피하는 연기라고 생각해서 “남이 해놓은 연기 똑같이 하는 게 네 연기냐?”라고 평가절하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데 똑같이 하는 건 아니고요.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여러 사람의 공이 들어가잖아요. 연기로 치면 배우가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최소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공을 들인 걸 집약시켜놓은 게 2시간짜리 영화인데, 성우들은 이 2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많이 해야 6시간 만에 만들어야 해요. 2년 동안 만든 영화를 6시간 만에 똑같이 연기해낸다는 건 어떻게 보면 불가능해요. 2년 동안 찍은 걸 2시간으로 만든 거라면 똑같이 카피를 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한 달의 시간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현재는 시간 투자를 안 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짧은 시간 안에 관객들이 보기에는 오리지널과 똑같은 감동의 밀도를 요구하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내에 많이 보고, 영화나 캐릭터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럴 시간조차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30년 넘게 성우를 계속할 수 있는 이유가 있나요?

강수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상대적으로 성우 연기에 대한 가치가 그렇게 높게 평가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톱 클래스의 주연 배우들은 다작보다는 작품성 위주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평균적으로 성우는 다작을 해야만 생활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다작을 하다 보면 불만스러운 작품이 있을 수도 있고, 내 연기가 늘 아쉬울 수도 있고, 본질을 떠나서 기능적, 기계적으로 연기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때때로 자괴에 빠질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그럼에도 계속 해야 되는 건 직업이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제 30년 전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가 분명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인 이미지에도 차이가 생기면 문제가 생기겠죠. 예전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 차이로 인해 생긴 이미지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게 저의 책임이에요. 예를 들면 ‘원피스’의 루피나 ‘명탐정 코난’의 남도일은 25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거잖아요. 20년 전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해서 서른 살이 넘어도 아직 ‘남도일’을 좋아하는 오래된 팬들과 저와의 교감이 지속되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그걸 계속 끝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노력하는 거죠.

그래도 영원한 루피이자 남도일이자 강백호였으면 좋겠어요.

강수진: 나이도 있고, 경력도 있고, 많은 후배들이 있다 보니 성우로서 일의 양이 줄 수밖에 없는 게 현재 저의 위치예요. 많은 부분들은 후배들이 해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물려줄 건 물려줘야 하기 때문에 ‘성우로서 일의 양이 주는 대신 질적으로 완성도를 높이자.’, ‘질적으로 좋은 일,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을 하자.’, ‘대신 나의 꿈도 실현할 겸 성우들과 함께할 수 있는 제작이나 연출 일을 같이 하자.’라는 생각으로 연출도 시작하게 된 거죠. 일의 내용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처음 학교에 다닐 때는 사실 연출이나 제작을 공부했는데, 좋은 연출을 하려면 연기자의 입장에서 작품 분석도 해보고, 몸도 움직여보고, 연기자의 마인드를 이해해야겠다 해서 연기도 열심히 공부한 거였거든요. 좋은 감독, 좋은 연출을 하려면 연기 경험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열심히 배우다 보니 연기자적 재능도 발견하게 됐는데 당시 연출을 하려면 언론 고시 공부를 해서 방송국에 들어가야 했고, 현실적으로 연출을 할 수 없어 테스트 삼아 성우 시험을 본건데 ‘덜컥’ 여기까지 왔죠.

 

시작은 ‘덜컥’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유튜브 채널 ‘픽시드’의 ‘성우 지망생 단톡방에 숨은 레전드 성우 찾기 (feat. 강수진)’편에서 다들 “저는”만 듣고도 알아볼 정도로 목소리가 유명해졌어요. 

강수진: 제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했다가 욕을 먹은 적도 꽤 있는데 (웃음) 연기할 때만큼은 제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연기를 하려고 애를 써요. 성우의 목소리가 배우의 외모와 비슷한 개념이라면 배우가 연기하면서 시청자에게 어떻게 보일 건지만 신경 쓰고 연기하지는 않는 것처럼 캐릭터에 몰입해서 연기를 잘하는 모습을 멋지게 만들어주는 건 스태프들, 감독님께 맡기고 저는 그냥 연기를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성우들에겐 좋은 목소리에 대한 강박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그걸 버려야 해요. 그래서 성우로서는 목소리를 신경 쓰지 않고 하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매번 강박을 이겨내고 연기할 수 있나요?

강수진: 원론적인 얘기인데 진정성 있게 연기하는 거죠.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사람으로 치자면 굉장히 단순한 인간이잖아요.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특성상 캐릭터의 감정선이 실제 사람처럼 복잡다단하거나 디테일한 경우가 흔치는 않아요. ‘그런 패턴화된 감정이라도 진정으로 가자.’, ‘기술적으로 하지 말자.’라고 생각해요.

 

다혈질에 막무가내이지만 농구에 진심인 강백호처럼요?(웃음)

강수진: “내놔.” 기억하세요?(웃음) 극적인 캐릭터도 살면서 영화 전체에서 격정적 분기점이잖아요.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도 워낙 감동적인 대사여서 좋아합니다만, 개인적으로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강백호 대사 중에 제일 사랑하는 대사는 “내놔.”입니다.

Credit
글. 오민지
인터뷰. 오민지
비주얼 디렉터. 전유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오민지
사진. 이진혁 / 한지이, 김다영(KOIWORKS)
헤어. 강보람
메이크업. 강보람
스타일리스트. 이윤정, 권민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