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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희원
사진 출처. 위버스

한국국제교류재단의 ‘2021 지구촌 한류현황’에 따르면 전 세계 한류 팬 수는 116개 국가 및 지역 1억 5,660만 명으로 집계됐다. 통계를 시작한 2012년 대비 10년 사이 17배 증가한 수치이기도 하다. 반면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2 해외 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다수의 장르에서 한국 문화 콘텐츠의 호감도를 저해시키는 원인 1위는 번역 미흡, 2위는 생소하고 어려운 한국어로 꼽혔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전 세계의 K-팝 팬에게 번역은 국가 간 경계를 보다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팬 플랫폼인 위버스의 번역 서비스는 이런 예 중 하나다. 위버스의 해외 팬 가입자 수는 2023년 2월 기준 약 5,706만 명으로 총 가입자의 90%에 달하고, 위버스는 이 많은 해외 이용자들을 위해 15개의 언어로 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티스트가 위버스에 글을 올리면 사용자가 다른 번역 앱을 이용하지 않고 플랫폼 내에서 언어 설정을 하거나 클릭 한 번이면 문장이 번역된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BTS Yet To Come in BUSAN’ 콘서트와 올해 2월에 열린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이름의 장: TEMPTATION’ 컴백 쇼케이스는 전 세계 팬들이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간체/번체),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태국어 8개 언어로 실시간 자막을 제공하는 등 실시간 공연에서도 번역 자막이 제공된다. 지금 읽고 있는 ‘위버스 매거진’의 기사 역시 위버스 서비스 중에 이용할 수 있는 언어인 한국어, 영어, 일어로 제공된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번역 이외에 K-팝의 콘텐츠 생산자, 또는 플랫폼 제공자들이 실시간 방송부터 인터뷰 기사까지 번역을 기본 제공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아티스트가 위버스에 올리는 글들이나 실시간 방송 자막 등은 자동 기계 번역을 통한 것으로, 원문의 맥락을 완벽하게 반영하기는 어렵지만 K-팝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데 들어가는 해외 팬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 자동 기계 번역은 전 세계 팬들이 K-팝 콘텐츠를 더 빠르고 쉽게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동 번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동 번역은 역설적으로 K-팝에서 사람의 노력이 들어간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르세라핌의 사쿠라, 허윤진은 스테이션헤드(STATIONHEAD) 라디오 리스닝 파티에서 ‘위버스 매거진’과 가졌던 인터뷰의 번역에 대해 “기사 번역이 정말 잘되어 있어” 놀랐고, “말할 때는 한국어로 이야기했지만, 번역본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며 번역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작은 뉘앙스까지도 섬세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번역에도 그만큼의 노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특히 아티스트의 단 한마디라도 온전히 느끼고 싶은 K-팝 팬들에게 좋은 번역의 중요성은 더 크다. 번역이 좋은 경우 “번역해준 사람의 말 고르는 센스가 뛰어나요!”, “번역어 선택이 명확해서 좋아요.”, “글쓴이와 번역가 모두 아티스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게 느껴져요.” 같은 팬들의 반응이 이어지는 이유다. 

 

K-팝 콘텐츠의 영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구현아 번역가와 파팅튼 필립 번역가는 “기계 번역이 많이 똑똑해지고 있지만, 아직 사람의 감정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번역은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며 번역가로서 점점 커지는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 번역을 위해서는 양국의 언어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모두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단순 언어를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어가 교환되면서 달라지는 의미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까지 반영해야 한다. 구현아 번역가와 필립 번역가는 아티스트 인터뷰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인 “많이 사랑해주세요.”, “기대해주세요.”와 같은 표현을 영어로 바꾸게 되면 “이거 꼭 기대해!”, “나 꼭 사랑해!”와 같이 강요하는 듯한 느낌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 노력할게요.”, “더 열심히 할게요.”라는 표현은 그대로 번역하면 ‘지금까지 열심히 안 했으니까, 앞으로는 열심히 하겠다.’라는 의미로 느껴질 수 있어서 “그동안 노력해왔지만,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는 식으로 번역해 원문의 뉘앙스를 전달한다고 덧붙였다. 필립 번역가는 “아무 설명 없이 ‘고3’이라고 써도 한국인은 ‘정말 힘든 시간’이라고 알 수 있지만, 외국인은 그냥 ‘고등학교 학년 중 하나’ 정도라고 받아들여요.”라며 영어 원어민으로서 같은 단어라도 한국인과 외국인이 받아들이는 의미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위버스 매거진’의 방탄소년단 진 인터뷰에서 “코로나19는 꺼져주세요.(웃음)”라는 문장은 영어로 “And, to COVID-19: Please get lost.(laughs)”로 번역되었다. 자칫 의도와는 다른 거친 표현처럼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에 “평소에 진지한 말투로 엉뚱하고 귀여운 이야기를 많이 하는 진의 성격과 모습을 상상하며 표현”한 것이다. 해당 인터뷰를 번역한 구현아 번역가와 필립 번역가는 “K-팝은 오랜 시간 애정을 가지고 아티스트를 지켜본 팬들의 전문성이 번역가보다 높은 분야인 것 같아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팬들이 속상해하는 일이 없도록 저희도 여러 콘텐츠를 모니터링하며 전문성을 키우려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반면 “아티스트에 대해 너무 잘 알고, 빠지게 되면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번역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고민도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자체 제작 콘텐츠나, 인터뷰를 찾아보며 아티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새롭게 팬이 되거나 아직 팬이 아닌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장벽 없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번역”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이브의 언어 서비스를 관리하는 랭귀지랩에서는 “아티스트의 다양한 사투리와 억양, 말장난과 언어유희를 해외 팬들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데 늘 아쉬움이 있어요.”라고 전했다. 아티스트의 말투를 그대로 살리고 싶지만 “사투리는 번역이 제대로 안 될뿐더러, 번역한다고 해도 한국인이 느낄 수 있는 문맥상 유머를 전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콘텐츠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나왔을 때 “해외 팬분들이 ‘이해하고 같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세하고 긴 설명을 달아 어떤 농담인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영상 번역의 특성 상 글자 수 제한, 줄 나눔을 비롯한 여러 물리적, 기술적 제약 사항에 부딪힌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직접적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고 메시지의 내용이 하나하나 중요한 K-팝 관련 번역은 번역자가 언어는 물론 K-팝에 대한 지식, 팬이 아닌 이들이 번역 내용을 읽을 때의 반응 등을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전 세계적인 흥행을 거둔 영화 ‘기생충’에서 ‘서울대 문서위조학과’는 ‘옥스퍼드대학 문서위조학과’로, ‘짜파구리’는 라면과 우동을 뜻하는 ‘람동’으로 번역됐다. 이렇듯 해외에 콘텐츠를 번역할 때는 내재한 메시지와 뉘앙스를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번역가의 역량이 중요해졌다. K-팝 콘텐츠 일본어 번역가로 활동하는 야자와 히로코 번역가는 ‘위버스 매거진’에서  방탄소년단 RM의 ‘비빌 언덕’이라는 표현을 일본어로 번역한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곤란할 때나 궁지에 몰렸을 때 사용하는 ‘頼みの綱(믿고 의지할 대상)’라는 일본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RM 씨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에 딱 맞는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잠시 쉬며 홍차를 타고 있을 때 문득 ‘홍차가 나의 비빌 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心の拠り所(마음의 지주, 사는 보람을 주는 것)’이란 따뜻한 표현을 찾을 수 있었어요.” 번역이 원문의 의미를 건조하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정서적인 면까지 전달되는 데에는 번역이 전달될 사람의 정서적 환경까지 고려해야 하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야자와 히로코 번역가는 “첫 번째로 정보를 찾아보며 철저하게 번역한 후, 두 번째로 원문과 비교하며 빠진 부분이나 틀린 부분을 확인하고, 세 번째로 일본어로 소리 내 읽고 자연스러운지 확인”한다고 말했다. 구현아 번역가와 필립 번역가는 “한 문장, 한 단어를 가지고 10~15분 동안 서로 토론하며 한참을 고민”한다고 이야기했다. “틀린 번역은 애초에 나와서는 안 되는 번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국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번역가의 단어 선택에 따라 전달받는 내용이 많이 달라져요.”라는 한 해외 K-팝 팬의 말처럼, 해외 팬들은 번역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받는다. 과거 K-팝 산업이 주로 음악, 뮤직비디오, 퍼포먼스 등 비언어적인 요소가 강한 창작물로 해외 팬들에게 닿았다면 지금은 아티스트의 인터뷰가 공개 동시에 번역본까지 함께 전 세계에 퍼진다. 이 영향력이 가진 무게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번역본은 딱 깔끔하게 나가지만, 그 중간 과정을 보면 엄청나게 지저분한 원고가 있어요.(웃음)”라는 구현아 번역가의 말처럼, 번역가들은 생각보다도 훨씬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K-팝은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거대한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해외 팬이 10년 사이 17배 느는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K-팝을 느끼는 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연결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다. 번역은 K-팝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주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이브 랭귀지랩은 “여러 제약 조건 속에서도, 아티스트가 전한 메시지가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의 팬들에게 잘 전달되고, 아티스트의 마음을 팬들이 잘 헤아릴 수 있는 번역”을 목표로 하고, “번역은 한 개인이 좋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넓혀주는 일인 것 같다.”고 말한 필립 번역가는 “K-팝 팬들이 아티스트가 나와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번역”을 하려 한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한 말에 감명받고, 너무 사랑해서 콘텐츠를 닳고 닳도록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구현아 번역가는 “그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팬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번역하려 하고, 야자와 히로코 번역가는 번역가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콘텐츠가 많지만 “번역가가 조금이나마 즐거운 ‘덕질’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하다고 느끼며 자신이 번역하는 콘텐츠에 책임감을 갖는다. 이것은 일부 번역가들이 오히려 번역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번역을 하고 싶다고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마치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처럼 “해외 팬들이 글을 읽을 때 느끼는 것이 ‘번역본’이라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고, 그냥 이 콘텐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쉽게 비난받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피드백에 항상 귀를 기울이면서 완벽에 가까운 번역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구현아 번역가는 “완벽한 번역이 있을까요?”라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모두에게 정답이 되는, 그런 완벽한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해요. 그게 저희가 그냥 지키고자 하는 규칙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