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많은 래퍼가 랩 게임의 왕좌에 앉길 원한다. 애초부터 배틀을 통한 경쟁 요소가 깊이 내재되어 발전해온 장르의 역사 속에서 래퍼들은 저마다 “내가 진짜이며, 최고”를 외쳐왔다. 매체들도 부추긴다. 거의 매년 ‘가장 위대한 래퍼’의 순위를 매긴 리스트를 앞다투어 공개한다. 상위권의 대부분은 힙합 황금기(*주: 보통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데뷔하여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가 차지한다. 그런데 만약 2000년대 이후 데뷔로 자격 요건을 한정한다면? 힙합 팬 사이에선 완전히 새로운 리스트가 작성될 것이다. ‘엑스맨’의 자비에 교수가 아니기에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순 없지만, 이건 장담한다. 제이 콜(J. Cole)은 상위 열 명 안에 들어갈 유력한 후보자다. 인종의 벽을 깬 랩스타 에미넴(Eminem)과 냉혹한 배틀 랩의 고수 카니버스(Canibus) 등에게 영향받은 콜은 훌륭한 래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요건을 고루 갖췄다.
영리하게 라임을 짜고,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며, 날카로운 펀치라인을 꽂아넣을 줄 안다. 다루는 주제도 폭넓다. 웃음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내는 자기과시부터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 및 폭력 문제는 물론, 개인사와 자아성찰에 이르기까지, 어떤 주제의 곡에서든 리리시스트(Lyricist)로서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연히 랩 퍼포먼스도 뛰어나다. 그의 래핑은 호수처럼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급류가 되어 흐른다. 옹골진 플로우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왕성한 창작욕을 지닌 다작가다. 2007년 데뷔 믹스테이프(Mixtape) ‘The Come Up’으로 주목받은 이래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해오는 중이다. 정규 앨범만 여섯 장에, EP 석 장, 공식 믹스테이프 석 장, 라이브 앨범 한 장 그리고 매니저 이브라힘 하마드(Ibrahim Hamad)와 함께 설립한 레이블 드림빌(Dreamville)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넉 장이다. 올해에도 새로운 정규작 ‘The Fall Off’ 발매를 앞두었다. 랩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에서 프로듀싱 또한 주도적으로 맡아왔으니 놀라움은 배가된다. 예술계에는 잠을 자지 않아도 전혀 이상이 생기지 않는 능력을 타고났을 거로 의심되는 이가 더러 있다. 제이 콜이 그중 한 명이다.
‘Crooked Smile (Feat. TLC)’ (2013)
1990년대 R&B/힙합의 상징적인 그룹 TLC가 피처링한 이 곡에서 콜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탐구한다. 자신의 외모로 고민하며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다. 제니퍼 허드슨(Jennifer Hudson)의 ‘No One Gonna Love You’를 샘플링한 멜로딕한 비트 위에서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다. 발화자가 남성 래퍼란 점에서 자칫 젠더적 우월감에 함몰될 수도 있는 주제다. 그러나 콜은 불우했던 과거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지지해준 여성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함정을 효과적으로 피해갔다. 더불어 과거 ‘Unpretty’란 곡으로 비슷한 주제를 다룬 바 있는 TLC의 참여가 좋은 시너지를 냈다. 두 번째 정규 앨범 ‘Born Sinner’에 수록됐다.
‘Apparently’ (2014)
놀랍게도 콜이 노래를 부르며 시작하는 이 곡엔 그의 다층적인 캐릭터가 잘 담겨 있다. 담보로 잡힌 집이 넘어갈 만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식의 걱정을 덜고자 홀로 버텨낸 어머니에게 존경을 표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을 반성하는가 하면, 창작에 대한 고민, 래퍼로서의 꿈, 자기과시 등의 내용을 이어간다. 동떨어진 듯한 주제가 섞였음에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노래에서 랩으로 전환되는 두 번째 벌스에선 콜이 드물게 선보이는 화려한 기술로 쏟아붓는 래핑을 들을 수 있다. 세 번째 정규 앨범 ‘2014 Forest Hills Drive’에 수록됐다.
‘Jermaine’s Interlude (Feat. J. Cole)’ (2016)
2010년대 블랙 커뮤니티를 비롯한 힙합계에서의 가장 커다란 화두는 흑인을 향한 공권력의 폭력 사건이었다. 콜은 아티스트에게 영혼을 팔라고 요구하는 음악 산업계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고 회의감을 토로하는 이 곡에서 경찰의 잔인성과 폭력 문제를 직시한다(“사이렌을 울리며 차를 세우고 발포하기 시작하는 경찰, From police that flash the siren and pull up and just start firin”). 컨셔스 래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 곡으로 복받치는 감정을 녹여낸 듯한 래핑이 적잖은 여운을 남긴다. DJ 칼리드(DJ Khaled)의 아홉 번째 정규 앨범 ‘Major Key’에 수록됐다.
‘False Prophets’ (2016)
‘거짓 선지자들’이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곡은 콜의 커리어에서 가장 논쟁적인 곡 중 하나다. 비트는 부드럽지만, 안에 담긴 내용은 날카롭다. 겉으로 드러난 주제는 랩이 인기에 의해 환원주의적인 예술이 되어가는 현실을 꼬집고 유명인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문화를 폭로하는 것. 그러나 이를 위해 가사에 등장시킨 인물을 묘사한 부분이 각각 칸예 웨스트(Kanye West)와 드레이크(Drake)를 디스한 거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로부터 약 2년 뒤 콜은 래퍼 출신의 라디오 진행자 앤지 마르티네즈(Angie Martinez)와의 인터뷰에서 최초 칸예를 겨냥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첫 벌스의 내용이 확실히 그에게 해당되긴 한다고 밝혔다. 원래 네 번째 정규 앨범 ‘4 Your Eyez Only’에 수록할 예정이었으나 내러티브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락되었다.
‘Kevin’s Heart’ (2018)
미니멀한 구성과 차분한 무드가 돋보이는 이 곡에서 콜은 연인, 혹은 배우자가 있음에도 다른 이성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이의 후회와 마약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이의 후회를 절묘하게 버무려냈다. 이처럼 다중적인 해석을 유도하는 작사 솜씨는 그의 장기 중 하나다. 제목과 뮤직비디오의 연결 고리까지 파악하면 더욱 흥미롭다. 뮤직비디오에는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케빈 하트(Kevin Hart)가 출연한다.
케빈 하트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웠다가 들통나 크게 지탄받은 바 있다. 방송에서 진심을 다해 사과했음에도 곱지 않은 대중의 시선은 바뀌지 않았다. 제이 콜은 곡의 내용과 연관된 케빈 하트의 이름을 패러디하여 제목을 짓고, 뮤직비디오에까지 출연시키면서 곡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했다. 멜로딕하게 읊조리는 후렴구도 훌륭하다. 다섯 번째 정규 앨범 ‘KOD’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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