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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리은, 강명석,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디자인. MHTL
사진 출처. 쏘스뮤직

욕망을 향한 연대

김리은: 르세라핌은 첫 정규 앨범 ‘UNFORGIVEN’의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에서 그들 스스로를 “I’m a villain”, “난 문제아”라 규정한다. 이들은 ‘No-Return (Into the unknown)’에서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고(“I got no invitation”),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에서는 “보지 말람 보고 파 / 날 둘러싼 금기들 / 그날의 이브처럼”이라며 금지된 욕망을 꿈꾼다. 이 욕망은 멤버들의 실제 발언과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트랙 ‘Burn the bridge’를 통해 당사자성을 갖는다. 허윤진은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세상의 부당함을 향해 “I open them all / 그 문 뒤에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 있으니까”라며 금기를 깰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문을 여는 힘은 연대다. 김채원이 과거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인 “나에 대한 확신”이라는 독백으로 시작된 ‘Burn the bridge’는 “We don’t have to be forgiven”이라는 공동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이 “unforgiven girls”와 “unforgiven boys”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 이유다. 르세라핌은 데뷔 곡 ‘FEARLESS’에서 “I’m fearless”라는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마치 관객에게 들리길 바라는 방백처럼 외쳤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외침은 방백이 아닌 대화다.

 

르세라핌은 ‘FEARLESS’에서 “제일 높은 곳에 난 닿길 원해”, ‘ANTIFRAGILE’에서 “더 높이 가줄게”라며 상승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해왔다. 이는 이미 데뷔 경험을 거쳐 팀에 합류한 사쿠라와 김채원 그리고 이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허윤진을 비롯한 멤버들의 서사를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그런데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은 “새 시대로 기억될 unforgiven”이라며 그들의 욕망을 시대정신으로 확장한다. 힙합과 펑크(funk) 리듬을 기본으로 한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은 “Unforgiven I’m a villain I’m a / Unforgiven 난 그 길을 걸어”를 반복하는 랩으로 구성된 훅 파트를 통해 개개인의 캐릭터 또는 스웨그를 보여주는 힙합의 무드를 빌려오고, 허윤진은 2절을 시작할 때 “내 style로 livin livin livin” 같은 가사로 랩을 하며 K-팝 안무라기보다 록스타들이 스스로를 연출할 때 사용할 법한 제스처에 가까운 동작들을 취한다. 그러나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K-팝 특유의 떼창하기 좋은 멜로디 위에 얹은 “나랑 저 너머 같이 가자 my ‘unforgiven girls’”라는 초대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은 하나의 노래 안에 멤버들의 캐릭터와 서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장르와 스타일 그리고 대중이 호응할 수 있는 요소들을 혼합하면서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로 구현한다. 금기와 용서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유쾌하게 비틀어서 표현하는 K-팝 아티스트의 등장 그 자체가 르세라핌이 말하는 “새 시대”의 물결이라고 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은 ‘6포세대’라는 좌절이 어떻게 ‘LOVE YOURSELF’라는 희망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그들 자신의 성장과 서사를 통해 보여줬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이미 많은 것들이 완성된 세상을 살아가는 현 세대의 절망과 자조처럼 미시적인 감정을 다루면서 Z세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이 됐다. K-팝이 청춘과 시대성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콘텐츠가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르세라핌은 특정 세대나 성별이 아닌 결점과 욕망을 가진 모든 자들을 호명한다. “I’m a mess”라는 문구의 반복을 주된 음악적 요소로 사용하는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선악과를 먹고 대가를 치른 이브,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가 남편을 잃을 뻔했던 프시케, 남편의 명령을 어겼다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푸른 수염의 아내처럼 금지된 욕망을 가진 여성들의 메타포를 소환하는 것은 걸그룹인 르세라핌의 당사자성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에서 르세라핌은 “unforgiven girls”와 “unforgiven boys”를 함께 호명하고, 모험에 대한 설렘을 담아낸 트랙 ‘No-Return (Into the unknown)’에서 “넌 나를 이끄는 별이 돼줘”라며 청자와의 유대감을 강조한다. 앨범 발매를 앞두고 공개된 ‘UNFORGIVEN TRAILER ‘Burn the Bridge’’에서 상처를 입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쿠라의 거울 속 모습은 서로를 마주보는 멤버들의 모습으로 바뀌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태워 빛이 될 거야”라고 선언한 그들의 앞에는 푸른 물결이 펼쳐진다. 금기시되던 가치들을 하나씩 깨나갈 때, 그리고 이에 동참하는 개인이 다수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문이 열린다. “Let’s go beyond together”. K-팝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새로운 역사가 르세라핌을 통해 다시 시작됐다.

함께 추는 춤

강명석: 르세라핌의 새 앨범 ‘UNFORGIVEN’의 동명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 퍼포먼스는 곡의 메시지를 반영한다. 훅 멜로디의 “Unforgiven I’m a villain”에서는 악마 또는 빌런이 연상되도록 손가락으로 머리에 뿔 모양을 만들고, 채원이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부르는 파트는 “힘 없이 늘 져야만 했던”이다. 이때 다른 멤버들은 채원 옆에 네 개의 기둥처럼 서 있다 채원이 앞으로 나가면 반대로 뒤로 가며 원근감을 부여하고, 채원이 일어나 “But I ride”를 부르는 사이 곧바로 채원의 뒤로 이동해 채원과 함께 채원의 그림자처럼 제자리걸음을 걸으며 “ride”를 표현한다. 퍼포먼스가 곡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멤버들은 각자의 파트를 소화하는 다른 멤버를 위한 배경이 되어 가사 속 상황에 영화처럼 보다 구체적인 장면을 더한다. 상당한 연습량에 기반한 팀워크가 기반이 돼야 하는 이런 퍼포먼스들은 그 자체로 가사 이상의 메시지를 더한다. 채원의 “But I ride”를 위해 사선으로 서 있던 멤버들은 다시 일렬로 대형을 바꾸고, 그때 허윤진은 허리를 뒤로 90도로 꺾어 카메라를 바라본다. 허리를 꺾는 동안 양옆의 멤버들 손을 잡아 몸을 지탱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부분의 가사가 “바란 적도 없어 용서 따위는 난 금기를 겨눠 Watch me now”라는 것을 생각하면,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에서 금기를 깨는 것은 다른 동료들의 손을 맞잡은 결과다. 도입부에서 “a villain”이 후렴구에서 “Unforgiven girls”의 일원이 되는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의 가사가 금기를 넘어서기 위해 “한계 위로 남겨지는 우리 이름”이 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한다면, 멤버들이 서로를 계속 지원하는 퍼포먼스는 “우리”가 돼야 할 이유에 대한 증명이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은 좌우로 서 있는 멤버들을 카즈하가 젖히고 앞으로 나오며 시작한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 및 주연을 맡은 동명의 영화와 제목이 같고, ‘석양의 무법자’로 알려진 미국 서부 영화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메인 테마 OST를 샘플링한 것까지 고려하면 카즈하의 동작은 서부 영화의 한 장면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서부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술집의, 양쪽으로 밀어 젖히는 문을 힘차게 열고 나오는 주인공.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는 여성들이 그들이 가진 원한을 풀어주는 자에게 현상금을 주겠다고 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반면 르세라핌의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에서는 그들이 서부극의 주인공이 돼 직접 활약한다. 동명 영화가 서부극의 흐름을 바꾼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점까지 더하면,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의 퍼포먼스는 서부 영화가 가진 장르로서의 의미를 활용해 지금 르세라핌의 위치를 설명한다. “낡은 대물림”이 싫어 “새 시대로 기억될 unforgiven”의 등장. “신념이 죄라면 빌런”이라는 가사처럼 한때는 빌런 또는 악녀나 마녀처럼 여겨졌던 그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사실 시대를 앞서가는 신념을 가진 이들었다는 반전. 서부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에서 성별을 바꾼 퍼포먼스는 ‘용서받지 못한 자’가 사실 스스로 용서받을 필요조차 없는 존재임을 선언할 수 있게 된 시대의 변화를 한순간에 체감시킨다. 그런데 곡 후반부, 세 번째 후렴구에서 르세라핌 멤버들은 이 변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가 모인 순간에 점프를 하고, 팔을 쭉 뻗으며 큰 동작들을 선보인다. “a villain”이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다른 이들과 함께 “우리”가 되어 시대의 변화를 끌어내는 과정은 그렇게 바운스를 타며 맞이하는 신나는 해방이 된다. “한계 위로 남겨지는 우리 이름”이 된 “unforgiven girls”가 함께 손을 맞잡고 “my unforgiven boys”에게 보내는 “나랑 선 넘어 같이 가자”는 메시지는 퍼포먼스의 에너지를 통해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신나는 해방임을 보여준다. 용서받지 못했던 한 명의 빌런이 용서받을 필요 없는 “girls”가 될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걸그룹이 무대 위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르세라핌의 대답이다.

모험의 닻을 올려라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말은 힘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나를 다그치는 “해야지!” 한마디가, 마음에만 담아두었던 다짐을 친구들 앞에서 큰소리로 선언할 때의 에너지가 주는 힘을 우린 이미 잘 알고 있다. 르세라핌의 첫 정규 앨범 ‘UNFORGIVEN’은 이들이 세상에 처음 등장하며 던진 외침을 반복하며 시작한다. ‘FEARLESS’의 간판 아래 나를 평가하는 세상을 한껏 강해져 손에 넣어버리고 싶다는 꿈틀대는 야망, ‘ANTIFRAGILE’ 스티커로 온몸을 휘감은 채 어디 한번 날 부숴보라고, 날 검은 바다에 던져보라고, 그래 봤자 나는 점점 더 강해질 뿐이라는 서늘한 기개 모두 그대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이 이 질문이다. 말의 힘을 감안하고라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런 앨범 구성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총 13곡이 담긴 ‘UNFORGIVEN’의 전반부는 르세라핌이 지난해 EP 두 장을 통해 선보인 것들의 요점 정리다. 인트로 ‘The World Is My Oyster’와 ‘The Hydra’를 선두로 각 앨범의 타이틀이자 캐치프레이즈였던 ‘FEARLESS’와 ‘ANTIFRAGILE’을, 그 뒤로 서브 곡이었던 ‘Blue Flame’과 ‘Impurities’를 배치했다. 구조로만 보자면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았던 두 장의 앨범은 정규 앨범 안에서도 데칼코마니처럼 앞뒤에 위치하며 앨범의 절반을 채운다. 정규 앨범의 경우 기존 활동 곡이나 히트 곡을 중간중간 넣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이 정도면 파격적이라 해도 좋을 구성이다.

 

앞서 궁금했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앨범 중반을 지나며 비로소 이해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르세라핌이 듣는 이에게 다시 말을 걸기 때문이다. 강렬한 비트로 시작하던 이전 인트로와 달리 이번에는 목소리가 앞선다.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감. 내가 결정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발화 내용과 발화자의 어조가 정확히 일치하는, 단단하고 매끈한 차돌 같은 김채원의 목소리. 티저 영상과 함께 사전 공개되었던 ‘Burn the Bridge’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체를 바탕에 두고 더욱 당당해진다. 지난 한 해 동안 자신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쳐 증명해온, 앞선 여섯 트랙 말이다.

 

그 무엇보다 든든한 지원군을 바탕으로 앨범은 한편으론 익숙한 르세라핌을, 다른 한편으론 정규 앨범에서만 할 수 있는 시도를 부지런히 늘어놓는다. 농담이 아닌 전설의 프로듀서이자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와의 협연으로 화제를 모은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은 서부 영화를 연상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비트와 휘파람 소리, 르세라핌 특유의 중독성 넘치는 후렴구가 얽히고설키는 과연 타이틀 곡다운 트랙이다. 시원시원한 브라스 연주가 매력적인 상쾌한 디스코 팝 ‘No-Return (Into the unknown)’과 저지 클럽을 기반으로 차세대 퍼포먼스 그룹을 노리는 르세라핌의 팀 정체성이 폭발하는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가 이어지고, 팬덤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피어나’는 작곡에도 이름을 올린 허윤진을 비롯한 전 멤버가 작사에 참여하며 K-팝 정규 앨범이 담보하는 고전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늘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팝 슬롯은 ‘Flash Forward’가 안정적으로 가져간다.

 

르세라핌을 꾸준히 지켜봐온 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의 나열은 마지막 곡 ‘Fire in the belly’에 이르러 급격히 방향을 튼다. 예고 없이 터진 폭죽처럼 흐드러지는 꽃잎과 겹겹이 펄럭이는 무지갯빛 스커트 자락이 갑작스레 시야를 온통 어지럽힌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혼돈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말을 건넨다. “너 내 동료가 돼라”. 또다시 말이다.

 

생각해본다. 본작을 포함한 총 석 장의 앨범을 통해 르세라핌은 줄곧 누군가와 대립하고 싸워왔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망가뜨리려는, 나를 끝내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누군가. 뚜렷한 실체는커녕 가끔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벌이는 섀도복싱처럼 우리를 외롭고 또 괴롭게 만드는 것들. ‘UNFORGIVEN’은 모두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특정해 복수할 수 없게 만드는 교활한 이가 꼭꼭 숨은 세상을 향해 르세라핌이 본격적으로 던지는 출사표다. ‘혼자 하면 방황이지만 함께하면 모험’이라는 앨범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그런 서사의 흐름 속 탄생한다. 지난 1년을 압축한, ‘르세라핌 오리지널 완전 신장 재편판’ 같은 앨범을 여러 번 돌려 들으며 이제 막 문을 연 모험의 시작을 실감한다. 르세라핌이 말의 힘으로 불러낸 기운이 힘차게 너울거린다. 저 손을 잡으면, 동료가 되면, 모험이 시작되면 비로소 그 정체와 맞닥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험의 닻이 올랐다. 르세라핌이 선두로 나아간다. 두려움 없이, 용서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