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W
[NoW] 새로운 세상을 향한 오프닝, ‘퀸스 갬빗’
블랙 앤 화이트의 환상 동화
2020.12.18
*‘퀸스 갬빗’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가 체스 세트와 체스 관련 도서 판매량을 치솟게 하고 온라인 체스 사이트 가입자 급증을 야기했다. 개봉 한 달 만에 전 세계 6,200만 가구가 시청한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이야기다. 1950~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퀸스 갬빗’은 천재성을 가진 소녀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이 체스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성장담이다. 불의의 사고로 끔찍한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베스에게 체스 게임은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이 닥쳐오는 현실과 달리, 64개 칸 위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자 삶이다. 베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투지로 대회 우승을 거듭해 유명세를 떨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둠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퀸스 갬빗’은 팬데믹 이후 상승세를 보이던 체스 시장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가 공개된 지난 10월 말을 전후로 완구사 골리앗 게임스(Goliath Games)의 체스 판매량은 178%에서 1,048%까지 늘었으며, 온라인으로 체스 대결을 할 수 있는 체스닷컴(Chess.com)에는 235만 명 이상의 신규 이용자가 유입됐다. 무엇보다 ‘퀸스 갬빗’이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뛰어난 여성 체스 선수’ 캐릭터를 통해 체스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방영 이후 여성들의 온오프라인 체스 강의 신청 및 참여가 늘어났고, ‘퀸스 갬빗’을 계기로 체스에 입문하는 소녀들이 생겨났다. CNN은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남성의 분야에서 승리하는 젊은 여성을 묘사했다는 점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보도했다. 인터내셔널 마스터이자 체스 자선단체 운영자인 말컴 페인(Malcolm Pein)은 ‘가디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어린 소녀들이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모들이 체스가 아들뿐만 아니라 딸들을 위한 취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베스의 성공은, 비록 가상의 이야기일지라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판타지는 자칫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얽힌 사회문제를 ‘노력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컨대 베스는 세계 챔피언 바실리 보르고프(마르친 도로친스키)를 ‘가장 두려운 상대’라고 칭하지만, 패배 원인은 적수의 실력이 아니라 세상을 저버린 어머니 앨리스 하먼(클로이 피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약물과 술에 쉽게 기대버리는 자기 자신의 ‘의지’다. 이러한 베스의 삶에서 체스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성차별, 월경으로 인한 불편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공포 등 실제 여성들의 경험은 축소되거나 지워진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에 대해 여성의 성차별적 피해를 눈요깃거리로 삼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원작 소설과 드라마 모두 “여성의 일상에 내장된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 남성중심적 관점이라고 비평했으며, 여성 최초로 세계 체스 랭킹 상위 10위 진입을 이뤄낸 그랜드마스터 유디트 폴가르 역시 대다수 남성들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베스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뛰어나기 어렵도록 만드는 실제 환경”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현실의 불편함을 지워냈다고 해서 ‘퀸스 갬빗’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퀸스 갬빗’이라는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곱씹어보는 일은 과거가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이자 ‘새판’을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가 언급한 것처럼, “베스에게 일어난 일들이 전형적이든 그렇지 않든, ‘퀸스 갬빗’의 인기는 불평등과 성차별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새로이 불러일으켰다.” 보르고프가 베스에게 건네는 말은 어쩌면 ‘퀸스 갬빗’이 세상의 모든 퀸들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실현하고자 하는 다짐일 것이다. “It’s your game. Take it.”
한 편의 드라마가 체스 세트와 체스 관련 도서 판매량을 치솟게 하고 온라인 체스 사이트 가입자 급증을 야기했다. 개봉 한 달 만에 전 세계 6,200만 가구가 시청한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이야기다. 1950~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퀸스 갬빗’은 천재성을 가진 소녀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이 체스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성장담이다. 불의의 사고로 끔찍한 기억을 지닌 채 살아가는 베스에게 체스 게임은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이 닥쳐오는 현실과 달리, 64개 칸 위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자 삶이다. 베스는 천부적인 재능과 투지로 대회 우승을 거듭해 유명세를 떨치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둠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퀸스 갬빗’은 팬데믹 이후 상승세를 보이던 체스 시장에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가 공개된 지난 10월 말을 전후로 완구사 골리앗 게임스(Goliath Games)의 체스 판매량은 178%에서 1,048%까지 늘었으며, 온라인으로 체스 대결을 할 수 있는 체스닷컴(Chess.com)에는 235만 명 이상의 신규 이용자가 유입됐다. 무엇보다 ‘퀸스 갬빗’이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뛰어난 여성 체스 선수’ 캐릭터를 통해 체스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방영 이후 여성들의 온오프라인 체스 강의 신청 및 참여가 늘어났고, ‘퀸스 갬빗’을 계기로 체스에 입문하는 소녀들이 생겨났다. CNN은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남성의 분야에서 승리하는 젊은 여성을 묘사했다는 점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라고 보도했다. 인터내셔널 마스터이자 체스 자선단체 운영자인 말컴 페인(Malcolm Pein)은 ‘가디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어린 소녀들이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모들이 체스가 아들뿐만 아니라 딸들을 위한 취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베스의 성공은, 비록 가상의 이야기일지라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이 판타지는 자칫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얽힌 사회문제를 ‘노력하지 않는 개인’의 문제로 치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예컨대 베스는 세계 챔피언 바실리 보르고프(마르친 도로친스키)를 ‘가장 두려운 상대’라고 칭하지만, 패배 원인은 적수의 실력이 아니라 세상을 저버린 어머니 앨리스 하먼(클로이 피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버린, 약물과 술에 쉽게 기대버리는 자기 자신의 ‘의지’다. 이러한 베스의 삶에서 체스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하는 성차별, 월경으로 인한 불편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공포 등 실제 여성들의 경험은 축소되거나 지워진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에 대해 여성의 성차별적 피해를 눈요깃거리로 삼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지만 원작 소설과 드라마 모두 “여성의 일상에 내장된 차별을 이해하지 못한” 남성중심적 관점이라고 비평했으며, 여성 최초로 세계 체스 랭킹 상위 10위 진입을 이뤄낸 그랜드마스터 유디트 폴가르 역시 대다수 남성들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베스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뛰어나기 어렵도록 만드는 실제 환경”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다만 현실의 불편함을 지워냈다고 해서 ‘퀸스 갬빗’이 전하는 메시지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퀸스 갬빗’이라는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곱씹어보는 일은 과거가 남긴 문제들을 해결하는 계기이자 ‘새판’을 위한 시작이 될 수 있다. ‘뉴욕타임스’가 언급한 것처럼, “베스에게 일어난 일들이 전형적이든 그렇지 않든, ‘퀸스 갬빗’의 인기는 불평등과 성차별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새로이 불러일으켰다.” 보르고프가 베스에게 건네는 말은 어쩌면 ‘퀸스 갬빗’이 세상의 모든 퀸들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실현하고자 하는 다짐일 것이다. “It’s your game. Take it.”
TRIVIA
유디트 폴가르(Judit Polgar)
헝가리 출신의 체스 선수로, 1991년 15세에 당시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그는 2002년 그랜드마스터이자 세계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여성은 남성 챔피언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통념을 깨트렸다. 2005년 세계 랭킹 8위를 기록, 1989년부터 25년간 세계 여자 랭킹 1위를 지켰다. 한편, ‘퀸스 갬빗’의 체스 자문을 맡기도 한 가리 카스파로프는 여성 선수들을 비하하며 “체스는 큰 싸움이고 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으나 추후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폴가르의 실력에 존경을 표했다.
유디트 폴가르(Judit Polgar)
헝가리 출신의 체스 선수로, 1991년 15세에 당시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그는 2002년 그랜드마스터이자 세계 챔피언인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여성은 남성 챔피언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통념을 깨트렸다. 2005년 세계 랭킹 8위를 기록, 1989년부터 25년간 세계 여자 랭킹 1위를 지켰다. 한편, ‘퀸스 갬빗’의 체스 자문을 맡기도 한 가리 카스파로프는 여성 선수들을 비하하며 “체스는 큰 싸움이고 여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으나 추후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폴가르의 실력에 존경을 표했다.
글. 임현경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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