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인터뷰 내내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실함, 열정, 꾸준함. 그 당연한 말들이 모여 정원이라는 사람을 빛내고 있었다.

‘DARK BLOOD’ 콘셉트 트레일러 촬영을 위해 액션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오랜만에 춤과는 다른 방향으로 몸을 사용하고 주특기인 태권도 발차기도 활용하던데 어땠나요?

정원: 액션 스쿨 선생님과 태권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예전에 태권도를 할 때 ‘K-타이거즈’라는 태권도 시범단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그곳 출신이시더라고요. 궁금했던 것들도 여쭤보고 여러 이야기도 들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춤도 몸을 쓰는 거긴 하지만 춤추는 체력이랑 운동하는 체력은 다르거든요. 오랜만에 몸을 쓰니까 재밌었어요.(웃음) 

 

칼을 맞고 쓰러지는 액션은 물론, 이전까지의 촬영과 달리 스토리의 흐름상 정원 씨의 눈이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연기까지 소화해야 해서 신경 쓸 부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정원: 그때 날씨가 너무 춥기도 하고 스태프분들도 많이 계셔서 저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스토리보드를 자세히 살펴보고 어떻게 촬영할지 미리 많이 고민하고 들어갔어요. 예를 들면 칼 맞는 장면은 사극 속 장면들을 생각하고 촬영한다든지요.

 

평소 내향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고,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촬영할 때도 많이 쑥스러워했어요.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고 촬영해야 하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정원: 저도 신기하네요.(웃음) 그 부분은 방금 말씀해주셔서 깨달았어요. 혹시 선택적 F라는 말 아세요?(웃음) 일을 할 땐 저절로 그렇게 돼요.

 

갑자기 ‘그분’이 오시는 건가요?(웃음)

정원: ‘그분’이요?(웃음) 평소에 감정이 풍부하거나 표현력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일을 할 때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워낙 낯을 많이 가려서 사람들이 절 보는 게 내키지 않는데, 일을 할 때는 크게 의식하지 않아요. 그저 결과물에만 집중하는 편이에요. 

현실적인 부분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직업에 필요한 표현을 발휘하는 거네요.

정원: 이 일을 즐거워하고 좋아하긴 하지만 어쨌든 일은 일이니까요. 앨범 제작을 위해 적지 않은 자본과 많은 분들의 노력이 들어가잖아요. 저와 멤버들의 몫은 그중 일부니까, 저희 몫에서라도 최대한 좋은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위버스 라이브 ‘붉은 밤, 정디’에서 이번 앨범에 대해 “진짜 열심히 준비했다.”고 말했고, 성훈 씨도 ‘빌보드’ 인터뷰에서 “모든 걸 쏟아부었다.”라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그간 월드 투어에서 수많은 엔진을 만난 영향인가요?

정원: 투어 동안 정말 행복하고 재밌었어요. 몸만 괜찮다면 이 일을 평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정말 엔진들이 저희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고 느꼈어요. 이 이상 표현할 말이 없네요. 뭐가 있을까요?(웃음) 이번 앨범이 저희 팀의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콘셉트 트레일러, 콘셉트 포토, 타이틀 곡 모두 ‘뭔가 더 좋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을 거쳐서 나온 결과물이에요.

 

이전까지 엔하이픈은 주로 자아실현과 자기 증명에 대해 노래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첫 트랙 ‘Fate’부터 ‘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요. 정원 씨가 긴 한국어 내레이션을 소화했는데, 연극적인 가사를 절제된 톤으로 표현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감정선은 살려야 해서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정원: 발음이 잘 들리게 하면서 감정을 담는 부분이 조금 어려웠어요. 내레이션 안에 서사가 있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아련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고조되는 포인트가 있어요. 그런 부분들을 살릴 때에는 만약 저라면 어떤 상황일지, 어떤 감정일지를 상상하면서 읽었어요. 프로듀서님도 특별한 디렉션은 안 주셨고, 작업실 불을 다 끄고 조금 노곤노곤한 상태로 편안하게 녹음했어요.(웃음)

평소 현실적인 성격이고 마침 MBTI도 사실에 입각해 생각하는 성향인 S잖아요. ‘Sacrifice (Eat Me Up)’의 “나의 살과 피를 마셔줘”처럼 극적인 가사들을 노래하는 건 어땠나요?

정원: 음, 사실 저희가 사람이긴 하잖아요.(웃음) 그래서 그렇게 콘셉추얼한 노래를 할 때는 오히려 가사 내용보다 보컬에 집중했어요. 최근에 발성과 관련해서 여러 고민과 시도를 하고 있거든요. 열린 소리를 내려고 하다 보면 생각이 많아져서 오히려 성대를 조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부르는 데에 집중하고 있어요. 보컬 디렉터님이 부르는 걸 따라 해보기도 하고, “날카롭게 불러라.”, “넓게 공간을 넓혀서 불러라.” 이런 구체적인 피드백들을 듣고 이해하면서 녹음했어요.

 

‘Bite Me’ 코러스 파트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표현하거나, ‘Chaconne’에서 저음을 소화할 때 성대를 살짝 긁으면서 힙합 장르의 무드를 살리거나, ‘Bills’에서 팝적인 보컬을 사용하는 등 각 곡의 특성에 맞춘 표현들이 두드러지던데요.

정원: 데뷔 초에는 저음 파트를 부른 적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코러스나 벌스도 많이 시도하고 있어요. 프로듀서님께서 제 톤이 이전보다 많이 두꺼워졌대요. 2차 변성기가 있다고 하던데 제 변성기가 이제야 끝나가나 봐요.(웃음) 그래서 ‘Future Perfect’ 활동 때부터 ‘TFW (That Feeling When)’의 낮은 저음을 시도하는 것처럼 다양한 톤을 연구하고 있어요. 

 

퍼포먼스적으로도 변화가 두드러져요. 이전까지 엔하이픈의 안무들은 주로 에너지를 강조했는데, 이번 타이틀 곡 ‘Bite Me’의 안무는 상대적으로 선이 부드럽고 복합적인 구성이에요.

정원: ‘Given-Taken’을 제외하면 저희 타이틀 곡들은 대부분 체력이 많이 드는 안무가 많았어요. ‘Future Perfect (Pass the MIC)’는 정말 무대 위에서 한 번 추고 나면 쓰러지고 싶을 정도거든요.(웃음) 그런데 이번 곡은 체력이 덜 드는 대신 디테일을 살리는 게 그만큼 더 어려웠어요. 웬만한 K-팝 안무들은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어서, 연습생 때 배운 기본기만 있어도 몸을 쓰는 방향이나 동선을 이해하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니키가 안무 제작에 참여했는데, 니키가 춤을 오래 춘 만큼 그간 접하지 못한 동작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니키를 보면서 많이 배웠고 개인적으로도 춤 연습을 정말 많이 했어요.

 

‘Future Perfect (Pass the MIC)’에서 정원 씨가 전면에 나서서 강한 에너지로 곡의 분위기를 제시하는 게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Bite Me’에서도 인트로가 끝난 뒤 본격적으로 노래가 시작될 때 정원 씨가 “혈관 속 memory / 널 찾던 내 세포는 scream”을 노래하면서 앞으로 나오는 부분이 인상적이에요.

정원: 그 파트는 무조건 첫눈에 멋져 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연습을 하다 보면 디테일이 허물어지는 경우도 있고, 예전의 표정이나 제스처가 더 좋았던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예전 영상들을 보면서 다시 연구하기도 하고, 거울을 보면서 표정이나 동작을 정리하기도 했어요. 박자가 빠른 춤은 사실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것만으로도 더 잘해 보이기 쉬워요. 그런데 이번 안무처럼 몸을 많이 사용하는 춤은 개개인 역량이 많이 드러나기도 하고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더 넓다고 느껴서 재밌게 준비했어요.

춤의 기본기, 표현, 난이도에 대해서 다각도로 생각하고 접근하네요. 이전에 김성관 디렉터님은 정원 씨에 대해서 “어떤 색을 입혀도 잘 소화하는 백지 같은 친구다. 교과서 같은 퍼포머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정원: 제가 기본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위에 표현을 얹는 편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웃음) 연습생 때도 기본기 연습을 정말 많이 했고, 요즘도 많이는 못하지만 가끔은 해요. 본인만의 스타일로 멋지게 춤을 추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춤을 정말 잘 추시는 분들은 우스워 보일 수 있는 동작을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아요. 그럴 정도로 어떤 동작이든지 멋지게 소화하려면 기본기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일에서 기본이 중요한 것처럼요.

 

작년 10월에는 유튜브에 알렉산더 청의 코레오그래피를 커버한 영상을 올렸어요. 그 영상을 통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요?

정원: 알렉산더 청은 빌리프랩에서 연습생 생활을 할 때부터 정말 좋아하던 댄서분이에요. ‘Blessed-Cursed’ 활동이 끝나고 나서 코레오그래피 레슨을 몇 번 받았는데, 오랜만에 연습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정말 즐거웠거든요. 그래서 안무를 커버해서 업로드하면 엔진분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영상을 올리게 됐어요. 저희 안무가 대체로 뛰고, 점프하고, 힘이 들어간 동작들이 많다 보니 그렇게 그루비한 느낌의 안무를 각 잡고 연습하면 스스로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아쉬웠어요.(웃음)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한 건 아닌가요?(웃음) 틱톡이나 ‘Dance JAM Live’를 보면 춤에 대한 기억력이 정말 좋던데요. 심지어 ‘I-LAND’ 당시 무대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경연 곡 ‘Dive into you’의 안무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정원: 머리로는 기억이 안 나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아요.(웃음) 워낙 많이 봐서. 사실 안무를 정확하게 따는 건 잘 못해요. 춤을 보고 ‘어떤 동작이구나.’를 아는 정도고, 새로운 춤은 니키나 제이 형이 안무를 정말 빠르게 따서 멤버들에게 많이 배워요. 

 

하지만 틱톡이나 ‘Dance JAM Live’ 라이브에서도 Mnet ‘스트릿 맨 파이터’의 ‘LAW (Prod. Czaer)’, 카이 씨의 ‘Rover’, 지코 씨의 ‘새삥’ 등 트렌딩하는 안무 챌린지들을 꾸준히 보여주고 있어요.

정원: 연습생 때부터 춤을 잘 추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요즘 다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직 제가 어떤 장르를 잘하고 어울리는지 모르는 단계라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어요. 틱톡이나 위버스는 시간이 닿는 한 최대한 많이 하려고 해요. 엔진분들이 좋아하시니까. 물론 여러 일정들이 있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충분히 보여드릴 수 있는 콘텐츠들이니까요.

위버스에서는 정말 틈이 날 때마다 게시물을 올리고 엔진들에게 댓글을 달고 있어요.

정원: 일단 엔진들과 이야기하는 게 즐겁고, 자주 올리다 보니 책임감이 생겼어요. 엔진들은 제가 자주 오는 것에 익숙하니까 갑자기 안 오면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걱정을 안 끼치려고 하다 보니 위버스를 하는 게 루틴이 됐어요.(웃음) 무엇보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제가 일반인이었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 직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SNS에 사진 한 장만 올려도 엔진들이 행복해하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원 씨의 춤을 보면 정말 단 한순간도 대충 추는 순간이 없어요. 무대 위에서도, 틱톡 촬영을 할 때도, ‘Dance JAM Live’를 할 때도요. 그 모습이 바로 정원 씨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원: 늘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 건 사실 선배님들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방탄소년단 선배님들, 세븐틴 선배님들을 보면 활동 연차가 오래되셨는데도 정말 흔들림 없이 멋진 무대를 보여주시잖아요. 연습생 때부터 늘 그런 아티스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변했다는 말을 듣는 걸 제일 싫어해요. 스스로에게 만족하진 않지만 초심을 지키려 노력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초심을 지키다가 틀어지면 오히려 더 크게 실망시킬 수 있잖아요. 그래서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기대치를 낮추고 싶지 않아요.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계속 높이고, 충족시키고,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껴요.

‘EN-O’CLOCK’에서 성훈 씨와 버블 슈트 씨름을 할 때도 정원 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더라고요.

정원: 그냥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제 일을 정말 많이 미루는 성격이었어요. ‘5분만’ 괴물이었거든요.(웃음) 그런데 자리가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제 위치에 있었다면 이렇게 했을 거예요. 무언가를 해야 할 때 하는 것. 제일 기본적인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2022 ENniversary’에서 공개한 ‘1년 뒤 나에게 from.2021’을 보니, 1년 전에 비해 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엔진분들을 만나면서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어요. 그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정원: 사실 즐겁다기보다는 이 직업이 재밌어요. 그리고 저희는 아직 성장 중이니까 앞으로 달성할 수 있는 확실한 목표들이 있잖아요. 이렇게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해 나가는 게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요. &TEAM의 하루아라는 친구와 니콜라스 형이 저희 콘서트를 보러 와서 “멋지다.”라고 칭찬해줬거든요. 제가 방탄소년단 선배님들의 콘서트를 보고 꿈을 키웠던 것처럼, 다른 분들이 저희를 봤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행복한 만큼 목표를 이룬 뒤가 어떨지 두려운 마음도 있나요?

정원: 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요. 다만 목표가 사라지는 건 무서워요. 그래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해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엔하이픈이라는 팀으로 최대한 오래 많은 목표를 이뤄나가고 싶어요.

Credit
글. 김리은
인터뷰. 김리은
비주얼 디렉터. 전유림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김지은
비주얼 크리에이티브팀. 허세련, 이건희, 차민수, 이지훈 (빌리프랩)
사진. 니콜라이 안 / Assist. 조승한, 이해지
헤어. 안치현 (fleek)
메이크업. 권소정
스타일리스트. 지세윤 / Assist. 최한별
세트 디자인. 최서윤, 손예희, 김아영 (da;rak)
아티스트 메니지먼트팀. 박성진, 이신동, 홍유키, 김한길, 강병욱, 우수현, 박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