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한국에서 가장 많은 소비자들이 이용하는 음원 서비스 멜론의 일간 차트 1~10위에는 걸그룹 곡이 여덟이었다. 나머지 두 곡 중 하나는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지수의 ‘꽃’이었다. 걸그룹과 관련이 없는 곡은 8위인 세븐틴의 ‘손오공’이 유일했다. 이 중 아이브는 ‘I AM’과 ‘Kitsch’로 3위와 5위, 르세라핌은 ‘UNFORGIVEN (feat. Nile Rodgers)’과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로 4위와 6위, (여자) 아이들은 ‘퀸카 (Queencard)’와 ‘Allergy’로 1위와 10위다. 여기에 작년에 발표한 ‘Hype Boy’와 ‘Ditto’로 7위와 11위를 기록한 뉴진스까지 더하면, 지금 한국의 인기 걸그룹들은 두 곡 이상을 차트 최상위권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대중의 압도적인 선호를 받고 있다.
이날 차트에서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유일하게 타이틀 곡도, 선공개 곡도 아니다. 르세라핌이 지난 5월 1일 발표한 앨범 ‘UNFORGIVEN’에 수록된 이 곡은 발표 당일 일간 차트 121위를 한 뒤 순위가 내려갔다. 앨범 발표 당시 뮤직비디오가 없고, 선공개 곡처럼 앨범 발표 전 공개돼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도 기대할 수도 없는 수록 곡은 주목받기 쉽지 않다. 이 곡이 일간 차트 100위권으로 들어온 날은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5월 23일 성적을 반영하는 5월 24일부터였다. 이후 세 번의 TV 음악 방송 출연과 두 개의 안무 영상이 올라간 일주일 사이 34위까지 급등했다. 한 번 관심을 모으자 활동 종료 뒤에도 순위가 계속 올라갔다. 이 현상을 차트 ‘역주행’으로 불리는, 처음엔 차트 성적이 좋지 않았던 곡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다시 올라간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주행’은 곡 발표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다가 대중에 의해 재발견될 때 쓰인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순위 상승은 곡 발표 한 달 이내, 뮤직비디오, TV 음악 방송, 안무 영상 등 적극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한 결과다. 선공개 곡이나 타이틀 곡이 아니었을 뿐,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또한 흥행을 의도한 기획이 있었기에 순위 상승이 가능했다.
‘위버스매거진’은 지난해 르세라핌의 데뷔 곡 ‘FEARLESS’가 멜론 일간 차트 100위로 진입한 이후 활동을 종료하는 6월 5일까지 꾸준히 순위가 올라갔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이미 걸그룹의 음원은 공개 이후 음악 방송이 이어질수록 지속적으로 순위가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다수의 걸그룹들의 음원 순위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음악 방송 활동 이후 점진적으로 올랐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걸그룹에 대한 음원 시장의 변화를 보여주는 최신 버전이다. 요즘 인기 걸그룹은 타이틀 곡은 물론 선공개 곡도 멜론 주요 차트 10위권 이내에 올릴 수 있다. 그리고 르세라핌은 후속곡을 흥행시키며 걸그룹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대신 걸그룹의 곡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프로모션의 역할 또한 더욱 중요해졌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퍼포먼스는 이 시장 변화의 실마리다. 르세라핌은 지난해 연말 각종 시상식과 TV 특집 프로그램마다 매번 다른 콘셉트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퍼포먼스에 강한 팀의 특성을 한 곡 안에 압축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곡 시작부터 팔과 다리를 모두 격렬하게 사용하는 동작을 시작으로 다시 다리, 팔, 허리를 각각 역동적으로 부각시키는 동작들이 이어진다. 반면 “Boom, boom, boom 내 심장이 뛰네”로 시작하는 후렴구 안무는 반복적인 동작들로 쉽게 기억에 남고, 일부는 따라 하기 쉬운 동작들로 구성됐다. 르세라핌의 멤버 홍은채가 소파에 앉아 이 곡 후렴구의 안무 중 팔 동작 일부만 따라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웃어, 웃어 더 인형이 되렴”에서 홍은채가 김채원의 손짓에 따라 인형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는 동작처럼 한글 가사 중심의 1, 2절 안무는 가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도입부가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1, 2절은 메시지 중심으로 노래를 부르는 멤버 각각에게 집중하게 하며, 후렴구는 쉽고 신나는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각각의 구간마다 다른 특징을 가진 퍼포먼스가 서로 연결되면서 더욱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후속곡이 가장 잘 어울리는 위치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이 타이틀 곡으로서 뮤직비디오와 퍼포먼스에서 모두 앨범 전체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면 이 곡은 더 신나고 격렬한 노래와 퍼포먼스로 첫 정규 앨범 활동의 애프터 파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새로운 시장 환경은 인기 걸그룹이라면 후속곡도 프로모션 여부에 따라 순위를 급상승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만큼 걸그룹에게 퍼포먼스, 더 나아가 무대 위에서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졌다.
음원 시장의 영향력 확대와 더불어, 걸그룹 시장은 음반 판매량에서도 급격한 성장을 진행 중이다. 걸그룹 역대 첫 주 음반 판매량 순위 1~6위가 밀리언셀러를 넘겼다. 이 중 네 장이 올해 발표된 것이다. 걸그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욱 커지는 동시에 소비력 또한 더욱 늘고 있다. 3세대 걸그룹을 대표하는 블랙핑크는 여러 국가의 스타디움과 돔 공연을 포함한 월드 투어 ‘BORN PINK’를 진행 중이고, 그 사이에는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 ‘코첼라 밸리 뮤직 & 아츠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도 섰다. K-팝 걸그룹의 폭발적인 성장세는 음원 소비자의 숫자뿐만 아니라 인당 지출액의 증가까지 급증한 결과고, 당연히 음원 시장의 영향력 상승과 함께 음반과 공연 시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걸그룹 음원을 소비하는 이들은 그들의 무대 역량에도 관심을 가질 확률 또한 매우 높다. TV 음악 프로그램 한 번, 대학 축제 한 번의 퍼포먼스 한 번이 팀에게 상상치 못한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의미다.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이 타인이 해주는 용서 같은 것은 받을 필요 없는 여성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아가는 노래였다면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의 메시지처럼 살아간 각각의 여성들을 조명하는 노래다. 타이틀 곡 ‘UNFORGIVEN (feat. Nile Rodgers)’이 앨범 전체의 메시지를 던졌다면, 후속곡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이 메시지를 실천으로 옮긴 개개인을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한 장의 앨범으로서 ‘UNFORGIVEN’의 메시지를 완성한다. 르세라핌을 비롯한 지금의 4세대 걸그룹은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처럼 각자 새로운 길을 여는 시작점에 있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시장이 열렸고, 모두 걸그룹의 무대를 기다린다. 걸그룹이 스타디움에서 대형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있다. 꿈의 크기가 다른 시대가 왔고,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의 음원 성적처럼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걸그룹이 하는 모든 일들이 새로운 역사가 될 시대의 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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