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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리(영화평론가)
사진 출처. Festival de Cannes

7월부터 영화평론가 김혜리가 한 달에 한 번,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글을 ‘위버스 매거진’에 기고한다. 첫 이야기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스파이더맨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다. 

 

편집자 주/ 스포일러에 민감한 독자는 영화를 보신  후 읽기를 권합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휙 읽었다. 저자 이나다 도요시는 건너뛰기와 배속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썼다. 닭과 달걀의 선후 문제와 비슷하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빨리 돌려도 지장 없도록 대사로 다 설명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늘어나고 있으며, 실패를 어느 세대보다 두려워하는 오늘날 관객은 유튜브 요약 영상을 통해 재미를 보장받고 감상하기를 선호한다고 한다. 실패? 나는 멈칫한다. 여기서 실패는 아마 영화에 허를 찔려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지는 경험을 지칭할 텐데, 그것은 내가 영화 보기의 가장 강렬한 즐거움을 묘사할 때 동원하는 표현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워낙 투미하다. 놀라고 매혹되고 길을 잃기 싫다면 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매체인 영화를 굳이 본단 말인가? 혹시 나는 실패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 같은 재앙만 없다면 매년 5월 열리는 칸국제영화제는 말하자면 ‘황홀한 실패’를 약속하는 영화들의 제전이다. 다양한 국제영화제들이 각자의 영역을 확보한 21세기에도 칸은 여전히 최고의 시네마 연례 부흥회다. “탄생 100년 넘은 영화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제 거기서 거기”라고 속단했던 회의주의자를 반성시키고, 머지않아 극장은 유적이 될 거라는 장담을 문명 퇴행의 예언으로 만드는 장소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가 방금 뭘 본 거지?”라고 되묻게 하는 미래에서 온 영화가 반드시 한두 편 있다. 코끼리에게 밟혀본 적은 없지만 통증을 희열로 대체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부류의 충격을 남긴 올해 칸의 영화는 조나선 글레이저 감독(‘섹시 비스트’,‘언더 더 스킨’)의 신작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다. 

  • ©️ Festival de Cannes

역사 배경 설명도 연도 표시도 없이 들이닥치는 첫 장면은 유복한 백인 가족의 평화로운 여름 피크닉을 바라보는 롱 숏이다. 아빠와 남자아이들이 먼저 줄지어 자리를 벗어나고, 여자아이들이 다음, 마지막은 젖먹이를 안은 엄마가 일어선다. 해는 기울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 시작되고 가족은 정성껏 관리된 정원과 수영장이 딸린 저택으로 돌아간다. 이튿날 가족은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고 엄마는 하인들에게 어디선가 배달된 옷가지를 나눠준다. 평온한 일상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무엇인가 어긋나 있다. 담 너머 멀리서 솟는 검은 연기는 무엇을 태운 흔적일까? 저택 담벼락 위의 물체는 혹시 철조망? 무엇보다 원경에서 웅웅대는 -극장에서만 거리감을 인지할 수 있는- 귀곡성 같은 음향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다 관객은 깨닫는다. 주인공 루돌프(크리스티안 프리에델)는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를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운영한 나치 장교 루돌프 회스이고 그 아내 헤드윅(산드라 휠러)이 정성껏 안팎을 가꾼 집은 수용소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사택이다. 회스 저택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처럼 거대한 암흑 속에 홀로 불을 밝힌 집이다. 그리고 인접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회스 가족의 ‘관심 영역’ 밖이다(이익(interest)의 영역일 수는 있겠다.). 학살당한 유태인들로부터 압수한 옷가지, 귀금속은 수레에 실려 스크린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질러 헤드윅에게 공수되고 가족적 대화가 오가는 수풀 위쪽으로는 나치 병사들이 탈출한 유대인을 수색하는 맹견을 끌고 유유히 지나간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서사의 고비는 남편의 타 지역 전출 소식을 들은 아내가 아우슈비츠 옆의 이 낙원을 떠나느니 아이들과 남겠다고 통고하는 대목이다. 헤드윅은 여기야말로 총통이 천명한 ‘생활권(Lebensraum)’이라며 못 잃겠다고 한다. 생활권이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 쓴 개념인데 우월한 게르만족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삶의 공간으로서 열등한 민족의 영토를 식민화해 획득하면 된다.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칸의 관객을 뒤흔든 이유는 보편적 영화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유보하고 언어 외적인 영화의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해서다. 조나선 글레이저가 전달하려는 바는 홀로코스트의 우여곡절이 아니다. 대신 그는 정밀하게 구성된 롱 숏의 연쇄로, 파시스트 부부의 심리적 도면을 그린다. 가해자들의 마음속 구획과 인물, 동물, 사물의 동선이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게르만 파시즘의 세계관에 의거해 분할하고 나머지 열등한 인종을 ‘처리’할 가장 효율적인 배관을 설계한다. 학살과 화장의 시스템 업그레이드는 루돌프의 자부심이다. 그래서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문단속의 영화이기도 하다(미안, 스즈메!). 헤드윅과 루돌프는 집과 일터에서 많은 문을 집요하게 닫고 걸어 잠근다. 나아가 글레이저 감독과 촬영감독은 여러 개의 문을 닫는 배우의 연속 동작을 세트 곳곳에 부착한 모션 컨트롤 카메라로 촬영해 숏과 숏 사이까지 물샐틈없이 봉합했다. 그럼에도 영화 후반에는 엄청난 비약의 편집이 한 차례 등장한다. 이는 나치가 그럼에도 결코 닫을 수 없던 하나의 ‘문’과 관련돼 있다. 극장에 앉아서 주시하고 있는 우리, 즉 미래의 인류와 나치 장교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에 그 문이 열린다. 극장의 어둠 속에 익명의 동시대 타인들과 함께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스크린 안팎을 연결하는 이 눈맞춤은 질문이 된다. 지금 우리의 관심 영역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조나선 글레이저는 인과관계의 서사를 거의 버리다시피 하고 불가해한 역사의 단면을 무대화하는 하나의 공연처럼 영화를 만들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의 퍼포먼스가 아닐까 생각하게 부추기는 것은 미카 레비의 강력한 음악이다. 란츠만에 앞서 알랭 레네 감독은 ‘밤의 안개’(1956)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 기록 필름과 1950년대 아우슈비츠의 풍경을 같이 편집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참담한 이미지가 주는 상처를 누그러뜨리는 쪽이지만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음악은 반대로 아직 패배할지 모르는 나치의 평온한 일상 옆에서 경고하고 곡한다. 음향인지 음악인지 구별하기 힘든 미카 레비의 기괴한 스코어는 공연을 이루는 하나의 성부로서 화면과는 다른 ‘가사’를 노래한다. 

 

음악을 독자적 플레이어로 선택한 영화는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만이 아니었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작 ‘클럽 제로’, ‘아나토미 오브 어 폴’, ‘메이 디셈버’가 음향과 음악을 극히 표현적으로 구사했고, ‘메이 디셈버’의 토드 헤인즈 감독은 심지어 “스코어 위에 영화를 지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작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메모리아’를 통해 던진 “사운드도 시네마인가?”라는 질문에 앞다투어 답을 제출한 형국이도. 당연히도 이만큼 섬세하게 편집된 음악과 음향을 감독의 의도대로 전달받으려면 극장이 필요하다. 요컨대 ‘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삼중의 이유 -큰 스크린을 요하는 교묘히 구성된 롱 숏, 공동체적 체험, 섬세하게 배치된 사운드- 로 극장을 불가결한 장소로 만든다.  

2배속 시청이 수월하고 도중에 ‘나가기’를 눌러도 자책감 없는 개인용 디바이스가 모두의 지척에 있는 오늘날, 극장 사업자들은 ‘공간력’이라는 용어를 거론하고 있다. 영화 체험에 극장 공간이 어떤 차원을 더할 수 있는지 모색하고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강제적 몰입은 집중력 결핍의 시대에 극장이 제공하는 희소한 자원이 됐다. 한데 집중과 몰입을 약속하는 장소인 극장에서 근년 들어 유행하는 주제는 역설적이게도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의 영화적 형상화처럼 보이는 멀티버스 서사다. 최근 할리우드를 돌아보면 우선 시초에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Spider-Man : Into the Spider-Verse, 이하 ‘뉴 유니버스’)’가 있었고, 마블 스튜디오의 마지막 스파이더맨 솔로 영화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이하 ‘노 웨이 홈’)’(2021)이  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 톰 홀랜드를 불러 모아 성공을 거뒀으며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는 다중우주 세계관을 본론으로 삼았다. 그러는 동안 2022년 초 선댄스 영화제에서 파란을 일으킨 멀티버스 가족 드라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1년 가까이 모멘텀을 유지하다 2023년 3월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했다. 

 

마블 스튜디오의 관점에서 멀티버스는 서사를 종횡으로 가지 치고 병행하는 코믹스식 서사의 누적된 하중을 감당하기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멀티버스라는 구조는 과연 하나의 하위 장르로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며 여러 영화를 지탱할 수 있을까? ‘노 웨이 홈’의 인기는 다중 우주 자체의 매력이 아니라 세 스파이더맨이 한 프레임에 있는 광경이 불러일으킨 감격 덕택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페이즈5를 여는 ‘앤트맨과 와스프 : 퀀텀매니아’에서 TV 시리즈 ‘로키’에 등장했던 악당 캉의 무수한 버전을 소집해 더 많은 멀티버스 연작을 예고했으나 뜨거운 반응은 체감되지 않는다. 

한편 마블이 고전하는 동안 소니가 공개한 3부작의 두 번째 -혹은 2편의 1부- ‘스파이더맨 :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애니메이션이야말로 멀티버스 서사에 가장 적합한 양식이라는 가설을 확신으로 바꿨다. 마일스 모랄레스와 그웬 스테이시의 성장담을 내포한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서사 자체는 새롭다 하기 힘들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DC 히어로 영화 ‘플래시’의 그것과도 유사하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진정한 강점은 슈퍼 히어로 영화의 본산인 코믹스로부터 멀티버스 서사뿐 아니라 양식과 미학까지 가져왔다는 데에 있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서 스파이더 캐릭터의 디자인은 그가 활동하는 세계와 호응하고 번호가 붙은 각각의 유니버스는 고유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그웬의 뉴욕은 파스텔 톤의 블루와 핑크가 번지는 회화적 풍경으로 스파이더우먼의 감정과 성정체성을 유동적으로 반영하고 마일스의 뉴욕은 힙합과 그래피티의 세계다. 호비는 1980년대 런던 펑크신의 잡지를 뜯어 붙인 모습으로 로커가 악기를 내두르듯 액션을 수행한다. 멀티버스의 대원칙을 수호하는 단체의 수장 미구엘 오하라의 지구는 사이버펑크 그래픽 노블의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메카닉의 세부 묘사가 정밀하다. 르네상스 양식 우주 출신의 벌처는, 양피지에 깃털 펜을 긁어 그린 선으로 이루어진 캐릭터다. 실사보다 훨씬 유연하게 화면의 톤과 동작의 안무를 변주할 수 있기에 애니메이션은 멀티버스의 좋은 그릇이다. 

 

거대 스크린으로 팝아트 전시를 2시간 20분 동안 관람하는 듯한 체험을 제공하는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애니메이션에 육박하는 분량의 CG로 완성된 마블의 실사 영화를 상대적으로 조악하게 보이도록 한다. 한편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현명함을 본받아 멀티버스를 플롯 장치로 쓰는 대신 보편적 삶의 은유로 심화시킨다. 예컨대 이 영화를 통틀어 제일 이상한 장면은 그웬이 경찰서장 아버지에게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스파이더우먼이 악한이고 살인자라고 믿어온 아버지는 딸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즉각 총을 내리지 않는다. 왜일까? 미국의 성소수자 청소년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자식을 분명 사랑하면서도 커밍아웃한 자신을 한동안 적대시한 부모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절망한 그웬은 아버지를 떠나 스파이더 공동체에 몸을 의탁한다. ‘엑스맨2’에서 매그니토와 자비에 교수가 아이스맨의 부모를 만나는 장면을 잇는 히어로 영화의 커밍아웃인 셈이다. 흑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인 어머니의 아들인 마일스는 우등생이지만 부모는 세상이 그를 잘 받아줄지 염려스럽다. “어디서든 누가 너에게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절대 귀기울이지 말아라.”는 어머니의 충고는, 스파이더 피플 사이에서 자격을 의심받는 마일스에게 되돌아온다.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스스로의 모태인 코믹스 세계에 보내는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백지에 잉크를 떨어뜨린 단순한 형상의 악당 스팟은, 종이에 점을 찍는 순간부터 무한을 향해 열리는 만화처럼, 반점을 웜홀 삼아 멀티버스를 넘나든다. 무수한 우주에서 각자의 서사를 써가는 스파이더맨들이 대원칙(canon)을 넘지 않도록 통제하는 미구엘 오하라의 캐릭터는 마블 코믹스 사령탑의 편집자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코믹스/멀티버스의 존립 근거 보편 원칙 대 자유 의지는 2024년으로 예정된 최종편 ‘스파이더맨 : 비욘드 더 스파이더버스’에서 결판을 낼 것이다. 제목이 이미 스포일러인 것 같긴 하지만. 

 

2023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