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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혜리(영화평론가)
사진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 롯데엔터테인먼트

2023년 5월 어느 새벽, 대피 요령이라곤 한 줄도 없는 경계 경보 문자에 잠을 깬 나는 퍼뜩 깨달았다. 만약 운석이나 폭탄이 떨어지면, 나는 나의 개와 꼭 끌어안고 집에서 죽는 편을 택하기 십상이겠구나. 반려동물을 받아주는 대피소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전쟁과 재난 상황에서 피난에 따르는 고통의 총량이 죽음의 공포보다 클 것 같아서다. 인간의 죽음은 태초부터 삶의 일부였지만, 인류의 종말은 한 세대 이전까지는 가설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기후변화와 전 지구적 민주주의의 퇴행이 종말을 빠른 속도로 가시화했다. 우리에게 실상 공포스러운 것은 종말의 순간이 아니라 종말의 예감과 종말 이후의 험난한 생존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모두를 아울러 느린 종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 ©️ Universal Pictures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인간의 손으로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한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가 지휘해 원자폭탄을 실험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시공간의 수학적 분해와 재구성으로 유명한 놀란의 전작들에 비해 ‘오펜하이머’는 서사를 따라가기 쉽다.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제2차 세계대전 중 행적이 ‘반미국적 행위’로 추궁당하는 1954년 청문회가 한쪽 축이고, 그를 질시한 관료 루이스 스트로스가 장관 임명 승인을 위해 미국 상원의 질문을 받는 1959년 청문회가 다른 하나다. 놀란은 이 시나리오를 예외적으로 1인칭으로 썼는데, 오펜하이머의 시점에 의한 시퀀스들은 주관적 시점을 다수 포함해 컬러 촬영했고, 1959년 청문회 장면들은 흑백으로 거리를 두고 찍었다. 전자는 ‘핵분열’, 후자는 ‘핵융합’이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연쇄 핵분열은 원자폭탄을 존재 가능하게 만든 현상이고, 핵융합은 이후 파괴력을 더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어낸 원리다.  

 

잘 알려진 대로 영화의 원작은 2005년 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인데 우선 책의 훌륭함이나 오펜하이머의 천재성과 별개로 오펜하이머를 프로메테우스에 빗대는 것이 적절한가는 생각해볼 문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전유물이던 불(문명의 단초)을 인류에게 훔쳐다준 영웅이지만 원자폭탄은 오로지 파괴를 불러왔다. 당초 폭탄의 목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었다고는 해도 독일 항복 이후에도 실험을 계속해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키고 냉전 군비 경쟁의 첫발이 되었다. 총을 처음 발명한 사람도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존재한 적 없는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연구는 과학자의 일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는 정부와 군부만이 제공할 수 있는 규모의 자원과 시설이 필요했고 어느 과학자도 정부가 연구의 결과물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간이다.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물리학 개념이 난무하는 3시간짜리 전기 영화를 할리우드 여름 대작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와 자주 비교되는 ‘JFK’가 존 F. 케네디 암살의 전말을 모자이크하고 ‘소셜 네트워크’가 마크 저커버그라는 특이한 케이스를 통해 신종 파워 엘리트 집단의 대두를 그렸다면, ‘오펜하이머’는 영화 대부분이 맨해튼 프로젝트가 수행된 로스앨러모스 기지라는 버블과 천재 오펜하이머의 머릿속에 머무른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영화는 목적에 따라 시야와 시점을 선택할 수 있다. 예컨대 왜 폭탄이 투하된 일본의 풍경이나 피해자 관점을 보여주지 않았냐는 지적은 번지수를 찰못 찾은 것이다. 다만 대중 영화가 21세기에 오펜하이머를 다룰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이야기가 딜레마로 수렴할 거라 예상한다. ‘오펜하이머’의 도입부가 묘사하듯 물리학, 천문학뿐 아니라 인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오펜하이머는 세계를 바라보는 20세기의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양자역학에 매료된 걸출한 지성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과학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은 실용주의자이자 애국심 강한 미국인이었다. 유럽에서 종족 학살을 자행한 나치가 원자폭탄을 실험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을 때 미국이 먼저 폭탄을 개발하려는 맨해튼 프로젝트는 오펜하이머에게 망설일 것 없는 사명이었을 터다. 하지만 결국 원자폭탄은 대량 학살 무기가 되어 인류의 진보에 역행했다. 그의 생에서 유추할 수 있는 최대 딜레마의 상황은, 첫째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군이 항복한 시점에 맨해튼 프로젝트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 그리고 종전 이후 더 위력적인 살상 무기 개발 국면에서 발을 빼는 대신 원자력위원회에 계속 관여하기까지의 고민이다. ‘오펜하이머’의 시나리오는 이상하게도 두 딜레마를 회피한다. 해당 시기 오펜하이머가 겪은 갈등 묘사를 생략하거나 경구로 짧게 신비화한다. 영화 후반에는 일찍이 재앙을 예견하면서도 오펜하이머가 (예수처럼)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수난을 자초함으로써 속죄했다고 (그것도) 다른 인물의 대사를 빌어 암시하는 것이 고작이다. 강의실을 만원으로 만드는 달변가였다고 알려진 오펜하이머는 영화 속에서 본인의 갈등을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다. 
 

다행히 영화는 오펜하이머가 한 일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놀란의 태도는 숭배보다 경외와 매혹에 가깝다. 경외나 매혹을 표현하는 데에 설명은 알맞은 도구가 아니기에 위에 쓴 회피는 불가피했을수도 있다. 동일시의 ‘혐의’도 가능하다. 오펜하이머는 어쩔 수 없이 관의 소집에 응한 물리학자가 아니라 로스앨러모스 입지 선정부터 맨해튼 프로젝트 전반을 운영한 기획자다. 당대 일급의 재능을 갖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스템 안에서 성공적 프로덕션을 몇 번이나 해낸 감독이 그에게 감정이입한데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감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놀란 감독은 오랫동안 감정 표현과 대사, 여성 캐릭터 조형에 약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래서 한 인물의 의식에 집중한 ‘오펜하이머’를 두고 마침내 놀란이 심리를 정면으로 다뤄 약점을 보완했다는 호평도 있다. 과연 그럴까?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보다 오펜하이머의 정신에 접근했을까? 도리어 영화는 오펜하이머를 범인에게 이해불가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장성 레슬리 그로브스(맷 데이먼)는 오펜하이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당신이 딜레탕트에다 바람둥이이고 연극적이고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들었다.”라고 캐릭터를 요약한다. 이 시점까지 1시간가량 영화를 지켜본 나는 흠칫했다. 내가 그런 캐릭터를 보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놀란은 오펜하이머의 퍼스낼리티를 행위로 보여주지 못한다. 천재스러운 아포리즘이 있을 뿐이다. 오펜하이머는 분명히 윤리적으로 모순된 사람이었지만 전 인류적 비극에 연루되고도 무너지지 않은 단단한 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견고함의 실체를 영화를 보고 나서도 알기 어렵다. 2023년의 ‘오펜하이머’는 인류가 자멸을 선택하고마는 역설적 정황과 그 복판에 선 지성에 대해 60년 전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보다 예술의 언어로 더 밝힌 바가 있을까? 

 

‘오펜하이머’는 절대 지루하지 않다. 두 청문회의 결과와 트리니티 실험의 성공 여부가 영화 내내 삼중의 서스펜스로 작동한다. 놀란의 전작들에서 우리를 감탄시킨 것 같은 액션 시퀀스는 전혀 없지만 ‘오펜하이머’의 뇌관은 역시 일종의 스펙터클이다. 광활한 우주와 닮은 천재의 뇌리, 그를 중심으로 별자리처럼 연결된 당대 최고 과학자와 권력자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결정적으로 즉각적 사상자 없는 트리니티 실험의 폭발 이미지가 ‘오펜하이머’의 스펙터클이다. 놀란은 동시대 어떤 작가보다 힘(power)의 묘사에 사로잡힌 감독이다. 그가 다루는 힘의 실체가 시간과 공간일 때(‘덩케르크’, ‘메멘토’) 그 결과는 스위스 시계의 무브먼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을 다루고자 할 때 놀란은 그 불완전함과 예측불가함 앞에 경직되고 만다. 스펙터클의 정의는 시각적으로 큰 충격과 효과를 주는 이미지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버섯구름은 일본을 항복하게 만든 위력적 이미지이고 역사상 최대의 스펙터클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의 진일보한 신작이라기보다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위험스러운 영화로 보인다.

  • ©️ Lotte Entertainment

‘오펜하이머’가 인류 종말의 씨를 뿌린 개인의 이야기라면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포칼립스 이후 살아남은 인간 집단이 경험할 정치적, 윤리적 시험을 시뮬레이션한다. 이때 군중은 남한의 대도시 아파트 거주자들이다. 이 변수는 상당히 중요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2024년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 부문의 한국 대표로 출품이 결정됐는데 ‘기생충’의 반지하 주거를 적극적으로 이해했던 해외 관객들이 한국 특히 서울에서 아파트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포착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재앙은 지진이다. 극중 스치는 뉴스로 미루어보아 운석의 충돌이 지진의 원인이지 싶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회 시스템이 초토화된 후 순전한 우연으로 살아남은 한 아파트 주민들이 기약 없는 겨울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준다. 

 

최근 기억만 뒤져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 전쟁’부터 HBO 시리즈 ‘더 라스트 오브 어스’까지 미국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대다수는 로드 무비의 틀을 취할 때가 많다. 주인공들의 여정은 감염원이나 괴물로부터의 도주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지역의 생존자들과 접촉해 돕든 싸우든 상호작용하고 그 과정에서 비상사태에 임시로 들어선 정치 시스템 일단을 드러낸다. 감염되는 재앙이라면 백신을 개발하려는 공동의 노력도 주요한 서사적 목표다. 반면 북쪽 국경이 막혀 실질적으로 섬의 조건을 가진 반도 국가 한국에서 종말 이후 생존에 관한 영화의 무드는 로드 무비보다 밀실 호러에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 ‘반도’에서 항구는 출발점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도달하기 힘든 최종 목표이며 ‘부산행’의 부산도 유사한 성격이다.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와 TV 좀비 드라마 ‘해피니스’(2021)가 생존자 집단의 내적 계급 갈등에 착안했다면, 재난 이전부터 사회‧경제적으로 비슷한 조건을 공유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지진 이후 부족사회적 체제를 수립한다. 이를테면 자원 분배는 필요가 아니라  수렵, 채집의 기여도로 결정되고, 성별 분업의 양상은 21세기에 나온 포스트 아포칼립스 드라마와 영화를 통틀어 가장 구식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피아를 나누는 경계선은 집의 유무다. 지붕을 잃은 ‘무주택자’는 황궁아파트 공동체에 기여할 잠재력이 있든 없든 박멸해야 할 위험한 존재로 간주된다. 아파트 너머의 공간, 다음 달 이후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황궁아파트 커뮤니티는 그리 오래 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정치와 행정의 상부 구조를 다루는 태도다. 영화는 황궁아파트 바깥, 서울과 한국 외부에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다. 지진의 실태는 모호하고 정부나 국제사회에 누구도 희망을 걸지 않는다. 한국의 재난 영화에서 정부가 있으나 마나 하게 그려진 일이 새롭지는 않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시야는 유난히 좁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양대 기둥은 문제 해결 능력을 입증해 지도자로 선출된 영탁(이병헌)과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려는 간호사 명화(박보영)다. 엔딩이 적시하듯 이 영화의 영혼은 명화에게 있으나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기억하는 주인공은 영탁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명화에게 영탁의 단기적 추진력을 회의하게 할 만한 공동체 질서의 기획이 있길 소망했지만 이는 소망으로 남았다. 명화가 영탁과 최종적으로 대결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혜원(박지후)은 명화와 함께 대안을 산출하는 길로 나아가기는커녕 플롯의 기능을 다하는 순간 영화에서 축출된다. 혜원이 제거되는 방식은 유난히 폭력적인데 이는 오직 영탁의 광기를 가시화하는 데에 기여할 뿐이다(여기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중 냉혹한 한 장면을 상기한 것은 나뿐일까?). 이는 비단 스타 이병헌의 카리스마가 초래한 불균형은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사는 결국 명화 편에 서지만, 영화의 몸통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영화를 보고 명화를 민폐라고 비난하는 댓글은 등골을 서늘하게 하지만 그것은 관객의 편향만은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명화에게 공감하고 믿고 싶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명백히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만 대안을 적시할 수 없는 캄캄한 터널 속에,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2023년의 한국 관객은 함께 갇혀 있다. 이 영화가 불만족스러워도 애틋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