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it
글. 강일권(음악평론가)
사진 출처. BANATV 유튜브, E SENS 유튜브

2007년 9월, 미 힙합 씬에선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두 거물 아티스트 칸예 웨스트(Kanye West)와 피프티 센트(50 Cent)가 같은 날 신작을 내고 앨범 배틀을 벌인 것이다. 당연히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롤링 스톤(Rolling Stone)’을 위시한 여러 매체가 이들의 빅 매치를 메인 기사로 다루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해 최고의 힙합 이벤트였다. 

 

2023년 7월, 한국 힙합 씬에서도 이와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두 명의 랩스타 빈지노(Beenzino)와 이센스(E Sens)가 약 일주일 간격을 두고 새 앨범을 발매한 것이다. 두 아티스트는 공통점이 뚜렷하다. 최고 수준의 랩 실력을 보유했고, 앨범 커리어를 견고하게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스타가 되었다. 무엇보다 래퍼들의 래퍼다. 그런 이들이 거의 동시에 신작을 공개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빈지노는 ‘12’ 이후, 무려 7년 만에 ‘NOWITZKI’를, 이센스는 ‘이방인’ 이후, 4년 만에 ‘저금통’을 내놓았다. 각각 다른 지향점과 무드로 완성된 걸작이다.

빈지노는 한국 힙합 최고의 힙스터다. 언제나 힙합과 탈 장르의 경계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가의 자세를 견지해왔다. 그리고 인정받는 결과물을 통해 보여주고 증명했다. 하지만 위상을 유지하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다. 20대 청춘의 에너지와 야심을 대변하던 그도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그 사이에 군 생활과 결혼이라는 삶에서의 커다란 이벤트를 겪었다. 앨범 사이의 공백도 길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타였지만, 씬의 중심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빈지노는 현실을 괘념하지 않는 듯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예술을 추구해왔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팬들 역시 그러한 빈지노의 스탠스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 앨범을 기다렸으나 채근하진 않았다. 그렇게 빈지노의 위치가 굳어지는 듯했다. ‘NOWITZKI’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NOWITZKI’는 실험적인 시도와 전통적인 힙합 음악의 특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앨범이다. 난해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곡, 장르 팬의 감성을 건드리는 곡, 앞선 두 개의 특징을 모두 품은 곡이 황금 비율로 조합했다. 근래 한국 힙합에서 보기 드문 구성이다. 특히 서로의 박자에 맞출 의향 따위 없다는 듯 전개되는 랩과 드럼 그리고 전반부를 완전히 지배하며 끊임없이 잔향을 남기는 전자음이 어울린 ‘Monet’, 디지털 가공된 보컬 샘플이 내내 공명하며 주술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Coca Cola Red’(빈지노의 선택을 받은 oygli의 랩 또한 주목하시라!), 재즈, 힙합, 얼터너티브 팝이 잼 세션을 벌인 ‘Crime’ 등은 백미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R&B 싱어송라이터 커셔스 클레이(Cautious Clay)와 TDE 래퍼 랜스 스카이워크(Lance Skiiiwalker)를 초빙한 ‘여행 Again’과 ‘Trippy’는 트렌드나 전통성이란 함정 어디에도 빠지지 않은 채 힙합의 고유한 맛을 제대로 우려낸 곡이다. 참고로 ‘Trippy’는 선공개했던 싱글 버전과 달리 사운드를 피치 다운하고 뒷부분의 변주를 길게 편곡하여 전반부와 후반부의 무드가 확연히 갈리는 곡으로 변화했다. 신중현이 만들고 김정미가 부른 옛 명곡 ‘햇님’(1973)을 샘플링한 ‘Sanso (Interlude)’도 흥미롭다. 이처럼 다채롭고 신선한 비트로 꽉 채운 앨범 안에서 빈지노는 창의적인 예술가의 삶을 노래하고, 군 생활의 경험과 지나온 삶의 기억을 반추하며, 그의 아내 미초바와 쌓은 추억 및 쌓아가는 현재를 꺼내어 놓는다. 가사엔 예의 감탄을 자아내는 위트와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진중함이 서려 있다. ‘Monet’와 ‘Sandman’에서 그의 대표 곡 ‘Dali, Van, Picasso’와 ‘Aqua Man’을 연상하며 느낄 수 있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비트 스타일에 맞춰서 자유롭게 변형하는 플로우는 마치 ‘엑스맨’ 시리즈의 캐릭터, 미스틱의 초능력을 보는 듯하다. ‘NOWITZKI’에는 삶에서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 빈지노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연 커리어 최고작이다. 그의 위상과 존재감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이센스의 ‘저금통’은 랩의 쾌감이 극대화된 앨범이다. 아니, 이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랩이란 보컬 혹은 발화 방식이 자아낼 수 있는 감흥의 최대치를 선사한다. 이센스는 애초에 랩 스킬이 특별했다. 2003년 데뷔한 이래, 힙합 시장이 급격히 변화하고 세대 교체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언제나 랩 실력으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었다. 

 

아직은 많은 래퍼가 어색하고 정형화된 랩 스타일에 갇혀 있던 한국 힙합 초창기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부터 동물적인 리듬감을 바탕으로 놀라운 플로우를 선보였으며, 라임 구조를 짜고 여러 주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남다른 수준을 과시했다. 이후 결과물을 거듭하면서 이센스는 완성형 래퍼의 표본이 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한국 힙합 씬의 독보적인 랩 테크니션이자 리리시스트다. 

 

‘저금통’의 초반부만 들어봐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쫀득한 붐뱁(Boom Bap) 비트 위로 무심한 듯 뱉은 래핑이 검질기게 달라붙은 첫 곡 ‘No Boss’부터 서로 다른 질감의 퍼커션이 어우러져 탁월한 공간감이 형성된 비트의 마지막 조각처럼 랩이 작용한 ‘저금통’, 빈지노와 드림팀을 꾸린 것만으로 짜릿함을 주는 ‘A Yo’ 그리고 메소드 맨(Method Man)의 랩을 연상하게 할 만큼 여유로운 동시에 본능적인 리듬감이 꿈틀대는 ‘What The Hell’까지, 정말 밀도 높은 랩 퍼포먼스에 압도당한다.

 

프로덕션을 담당한 건 허키 시바세키(Hukky Shibaseki)다. 개성 있는 비트로 모든 곡에서 이센스의 랩을 보좌했다.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지닌 시바세키와의 조합 덕분에 여러 각도에서 분출되는 랩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How To Love’와 ‘Vanilla Sky’ 같은 곡을 보라. 랩이 얹힐 것을 고려한 힙합 프로덕션의 정형을 벗어나 실험적인 인스트루멘털로 완성되었지만, 이센스는 여지없이 훌륭한 래핑을 쏟아냈다. 그의 솔로 앨범 중에서 제일 자유분방한 주제가 담긴 ‘저금통’은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경이로운 랩으로 완성되었다. 비트의 완성도나 매력이 떨어지는 곡에서조차 아쉬움을 상쇄하고 감흥을 끌어올린다. 누군가 한국 래퍼의 완벽한 랩을 들을 수 있는 단 한 장의 앨범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금통’을 말할 것이다.
 

소수의 슈퍼스타가 주도하는 씬은 위태롭다. 그들의 인기가 사그라지는 순간 씬도 무너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양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인지도와 실력을 겸비한 다수의 아티스트가 어우러져 경쟁하고 화합해야 장르 씬이 융성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론 슈퍼스타의 강력한 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지금의 한국 힙합이 그렇다. Mnet에서 제작한 래퍼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는 10년 넘도록 많은 래퍼와 래퍼 지망생들이 성공을 위해 잡고자 애쓰는 동아줄이었다. 그런데 그 줄이 끊어져 버렸다. ‘쇼미더머니’의 새로운 시즌이 불투명해진 것이다. 그러자 한국 힙합 위기설이 나왔다. 터무니없는 음모론으로 치부하긴 어렵다. 실제로 ‘쇼미더머니’는 음원 차트와 각종 페스티벌 및 행사에서 래퍼들이 돈을 벌 수 있게 해줬으니까. 당분간 꽤 많은 래퍼들의 주머니가 가벼워질 것이다. 

 

빈지노와 이센스의 앨범은 이처럼 우울한 2023년 한국 힙합 씬에 엄청난 활력과 의욕을 부여했다. 무엇보다 두 래퍼는 최정상급의 랩 실력과 탁월한 완성도의 결과물 그리고 ‘쇼미더머니’의 영향권 밖에서 쌓은 스타성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고 랩 스타가 되었다. 그런 그들이 거의 동시에 놀라운 완성도의 앨범을 발표했다. 팔짱 낀 채 한국 힙합에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해왔거나 여러 이유로 멀어졌던 이들조차 다시금 이 장르와 문화에 눈 돌리게 할 정도의 작품을 말이다. ‘NOWITZKI’와 ‘저금통’이 발매된 2023년 7월은 한국 힙합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흥분된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