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계의 유명한 이벤트 중에 ‘XXL Freshman(더블엑스엘 프레시맨)’이란 프로젝트가 있다. 미국 힙합 매거진 ‘XXL’에서 매년 떠오르는 신예 래퍼 10인을 뽑아 발표하는 것이다. 선정된 래퍼들은 온‧오프라인 매체의 커버 스토리를 비롯하여 개개인의 인터뷰와 사이퍼(Cypher)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다. 워낙 주목도가 높고 영향력도 커서 아티스트와 기획사에게 정말 중요한 기회다. ‘XXL Freshman’은 새로운 힙합 슈퍼스타를 미리 볼 수 있는 수정구와도 같았다.
잠시 시간을 2016년으로 돌려본다. 그해 ‘XXL Freshman’은 세간의 비판과 맞닥뜨렸다. 가장 유력한 후보 한 명이 리스트에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포스트 말론(Post Malone)이다. 그는 2015년에 발표한 싱글 ‘White Iverson’의 대성공에 이어 리퍼블릭 레코즈(Republic Records)와 계약하며 엄청난 한 해를 보낸 터였다. 그런 말론이 누락되었으니 의아할 수밖에. 그러자 ‘XXL’의 편집장 바네사 세튼(Vanessa Satten)이 직접 나서서 해명하기에 이른다. 이유는 명백했다.
“포스트 말론 측으로부터 그가 힙합에 집중하지 않고 록, 팝, 컨트리 방향으로 더욱 나아가는 중이란 말을 들었어요. (중략) 그건(*주: ‘선정하지 않은 건’) 당신이 힙합 세계에 있길 원하지 않는다는 거니 우린 그냥 놔두겠다는 메시지였죠.” -라디오 ‘The Breakfast Club’과의 인터뷰에서
세튼의 발언 이후, “말론이 힙합을 버렸다.”는 기사가 퍼져 나갔다. 질책의 화살은 곧 말론을 향했다.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말론이 반박했다. 단지 피곤해서 커버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으며, 뉴욕까지 여섯 시간 비행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것. 여기에 그동안 품어온 예술관을 덧붙였다.
“음악에 대한 저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저를 표현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서는 안 되죠. 그렇지만 저는 단 한 번도 ‘더 이상 힙합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중략) 저는 계속 힙합을 만들고 싶습니다. 기타로 계속 곡을 쓰고 싶고요. 장르를 불문하고 재능 있는 아티스트와 작업하며 제가 좋아하는 일을 이어 나가고 싶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만들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이 일을 하고 있고, 그게 저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 말론 인스타그램
무려 7년 전에 벌어진 이 일화 속 설전의 내용은 공교롭게도 현재 포스트 말론의 음악 세계를 대변한다. 그가 아티스트로서 추구하는 방향성과 음악에 대한 관점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말론은 여전히 힙합을 버렸다고 선언한 적 없지만, 당시보다 힙합에서 멀어진 건 사실이다. 결국, 2016년에 ‘XXL’ 측이 들은 바대로 된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말론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된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본인을 특정 장르 아티스트로 규정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이제 완연한 팝과 록의 경계 안에 있다.
새 앨범 ‘Austin’만 들어봐도 그렇다. 랩 대신 노래가, 트랩 비트 대신 기타 연주가 전반을 주도한다. 수록곡 대부분은 뇌리에 남는 팝적인 후렴구를 동반했다. 더불어 말론은 전곡의 기타를 연주했으며, 몇몇 곡에선 드럼, 피아노, 베이스 기타를 맡기도 했다. 기타로 계속 곡을 만들고 싶다던 그의 바람이 결실을 맺었다. 물론, 이전부터 노래와 멜로디는 그의 음악에서 주요한 요소였다. 랩 스타일도 정석적인 래핑이 아닌, 랩싱잉을 구사해왔다. 또한 2022년 전작 ‘Twelve Carat Toothache’는 그 어느 때보다 팝과 R&B가 프로덕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100% 전환이 이루어졌다.
보컬 면에서 노래는 랩을 완전히 대체했고, 신스팝을 비롯한 1980년대 팝과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영향이 느껴지는 음악으로 그득하다. 커리어 최초로 게스트 참여까지 배제하여 피처링을 통한 일말의 랩/힙합 요소마저 없다. ‘Chemical’, ‘Speedometer’, ‘Overdrive’, ‘Laugh It Off’ 등의 곡을 들어보라. “날 건들면 우지 기관단총을 갖고 올 거야(Fuckin’ with me, call up on a Uzi – ‘Rockstar’)”라며 으름장을 놓던 래퍼 말론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러니까 ‘Austin’은 힙합에서 팝과 록으로 점점 변화해가던 말론의 음악 세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순간이 담긴 작품이다. 어둡고 우울한 주제를 상반된 무드의 프로덕션을 통해 흘려보내며 오묘한 감흥을 자아내는 장기도 절정에 달했다. 말론은 슬픈 내면을 즐거운 외피로 감싸는 데에 능하다. 리드 싱글 ‘Chemical’은 좋은 예다. 상호의존적 관계의 불안정함과 일종의 자기혐오가 뒤섞인 음울한 가사지만, 신스팝과 팝록을 배합한 밝은 프로덕션으로 완성했다.
가장 최근에 싱글로 발표된 ‘Enough Is Enough’도 마찬가지다. 말론이 사랑해 마지않는 술, 적확하게는 과도한 음주를 반성하는 모습과 성찰이 담긴 곡이다. 이 고통스러운 풍경이 컨트리로 시작하여 토토(Toto) 스타일로 끝나는 상쾌하고 멜로딕한 프로덕션에 어우러졌다. 자기혐오를 표출하면서 상대방에게 본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묻는 첫 곡 ‘Don’t Understand’에서도 이처럼 모순된 감흥을 느낄 수 있다. ‘Austin’ 속 음악들은 지금 말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가리킨다.
오늘날 힙합 씬을 넘어 범대중적 인기를 획득한 랩스타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포스트 말론처럼 장르의 경계를 극단적으로 넘나들거나 아티스트 정체성의 변화를 감행하면서도 평판과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기존 힙합 스타들의 사례와 확연하게 차이 나는 지점이다.
포스트 말론은 이제 귀를 사로잡는 강력한 싱글과 다양한 장르 그리고 고유한 색을 앞세운 팝스타다. 트랩 위에서 랩싱잉을 뱉는 ‘화이트 아이버슨 록스타’로 다시 돌아가주길 바라는 이도 많겠지만, 180도 달라진 지금 또한 말론의 진솔한 모습이다. “원하는 것을 만들겠다는 순수한 목적”은 여전히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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